메세지로 읽는 시편 145편
시편 145편은 다윗의 노래이자, 그의 인생이라는 악보에 그려진 가장 웅장한 피날레입니다. 평생 왕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했던 다윗이지만 이 시에서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왕관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나의 왕이신 하나님이여." 자신이 왕이 아니라, 왕을 모시는 신하임을 자처하는 이 아름다운 항복 선언 속에서, 우리는 진짜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다"고 노래합니다. 우주의 광대함을 담기엔 인간의 계산기는 너무나 작고 초라합니다. 그러나 진짜 기적은 크기에 있지 않고 '방향'에 있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그 무한하신 말씀이 유한한 육신이라는 좁은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셨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측량할 수 없는 겸손으로 우리 곁에 앉으셨습니다. 우리가 찬양해야 할 것은 그분이 만든 우주의 크기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작아지신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잴 수 없기에, 갚을 수도 없습니다.
세상의 왕들은 '쓸모 있는 자'를 찾습니다. 그들의 식탁에는 강한 자, 이긴 자, 당당한 자들만 초대받습니다. 하지만 우리 왕, 예수님의 식탁은 다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주님은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예수님은 넘어진 자를 밟고 지나가는 정복자가 아니라, 넘어진 자 곁에 쭈그리고 앉으시는 친구입니다.
그분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사랑'을 물으셨습니다. 숨어있는 삭개오에게 '내려오라' 호통치지 않고 '함께 머물겠다' 청하셨습니다. 주님의 손은 심판의 칼을 쥐는 손이 아니라, 넘어진 내 손을 맞잡는 손입니다. 그 손을 잡을 때, 우리의 '비굴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비범함'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다윗은 이 찬양이 한 세대에서 멈추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거룩한 메아리'가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양화진의 선교사들이 낯선 조선 땅에 자신의 심장을 묻으며 남기고 싶었던 것도 오직 하나, '예수'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의 왕은 공포로 통치하지 않고, 긍휼로 통치하십니다. 억압이 아닌 은혜로, 착취가 아닌 섬김으로 다스리십니다. 이 멋진 왕의 통치를 나만 누리고 끝낼 수는 없습니다.
내가 경험한 그 따뜻한 통치를 자녀에게,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 그것은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왕의 백성 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가장 영광스러운 '유산의 상속'입니다.
묵상 질문
내 인생의 왕좌에는 누가 앉아 있나요? 혹시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되어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나요? 오늘 아침, 나의 왕관을 벗어 진짜 왕이신 주님께 드릴 준비가 되셨나요?
최근 넘어진 것 같은 실패감이나, 남들에게 말 못 할 비굴한 마음이 든 적이 있나요? 그때 나를 꾸짖지 않고 조용히 손 내밀어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눈빛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내가 너무나 좋아서 누군가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내게 있나요? 오늘 그 사랑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작은 친절이나 말 한마디로 전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