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책임은 막중하며, 하나님 나라는 목자 없는 백성에게 결코 안전하지 않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는 잡혀 죽을 양 떼를 먹이라 - 스가랴 11장 4절 이스라엘의 멸망은 단순히 외세의 침략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부패와 백성의 거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들에게 백성을 어떻게 돌보았는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한 목
시리즈 · 이지열
묵상노트 279편
그들은 스스로 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애통하며 회개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 스가랴 12장 8절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취하게 하는 잔"(2절)과 "무거운 돌"(3절)로 비유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성결하고 거룩한 나라로 세우십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스가랴 13장 1절 하나님은 죄와 더러움을 깨끗이 씻으시는 샘을 여십니다. 이 샘은 한 번 흘렀다 그치는 물줄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결단이나 의지로는 결코 자신을 정결
여호와의 날은 누군가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주님의 백성에게는 생명과 구원의 날이 된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스가랴 14장 9절 여호와의 날은 먼저 두려운 장면으로 다가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도성이라 불리지만,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
불안한 현실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유일한 안전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심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시 124:1) 시편 124편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2.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3. 그 때에
하나님은 눈물을 기쁨으로, 수고를 은혜로 바꾸시는 분이시며,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 순종할 때 우리의 삶은 헛되지 않고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진다. 시편 126편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
주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고난 속에서도 은혜가 마르지 않습니다. 시편 128편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시편 129편 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기다림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품, 그리스도 안에 누리는 평안 시편 130편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시편 131편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공동체의 연합과 찬송으로 하나 됨을 기뻐하는 신앙의 삶 시편 132편 5.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7.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10.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11. 여호와께서 다윗에
복음은 조언이 아니라 능력이다. 우상에서 돌아서게 하고, 환난 중에도 본이 되게 하며, 다시 오실 주를 기다리게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 1.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
우리의 사역 동기는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16절 1.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우리의 권면은 간사
복음은 성과가 아니라 사람을 상으로 준다. 환난 속에서도 사랑을 더하고, 거룩으로 굳게 세우신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절~ 3장 13절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20절 1.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2.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
세상의 끝을 기다리는 신앙은 미래의 두려움이 아니라, 오늘의 구체적 삶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함, 사랑,신실함으로 드러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절~ 12절 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부활과 재림의 약속은 성도로 하여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늘을 믿음·사랑·소망으로 살아가게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 5장 11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 ~18절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다시 오지 않을 하루를 사는 성도의 삶의 태도를 점검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 5장 28절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우리의 삶은 매일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때의 미혹 속에서도 성도는 진리를 사랑하고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7절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
매일, 매일 성도는 복음이 일하도록 기도하며, 질서 있게 일상에 충실하고,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18절 1. 끝으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퍼져 나가 영광스럽게 되고 2. 또한 우리를 부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시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4. 너희에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임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 앞에 침묵하며 겸손히 주를 경외하는 자는 소망을 붙듭니다. 스바냐 1장 1~13절(새번역) 1.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 때에, 주님께서 스바냐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의 아버지는 구시이고, 할아버지는 그달리야이고, 그 윗대는 아마랴이고, 그 윗대는 히스기야이다. 2.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말끔
심판의 날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그러나 겸손히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스바냐 1장 14~2장 3절(새번역) 14. 주님께서 심판하실 그 무서운 날이 다가온다. 득달같이 다가온다. 들어라! 주님의 날에 부르짖는 저 비탄의 소리, 용사가 기운을 잃고 부르짖는 저 절규. 15. 그 날은 주님께서 분노하시는 날이다. 환난과 고통을 겪는 날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교만한 자를 심판하시고, 당신의 주권을 증명해 보이십니다. 스바냐 2장 4~15절(새번역) 4. 가사는 버림을 받을 것이며, 아스글론은 폐허가 될 것이다. 아스돗은 대낮에 텅 빌 것이며, 에그론은 뿌리째 뽑힐 것이다. 5. 바닷가에서 사는 자들아, 그렛 섬에서 사는 민족아, 너희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블레셋 땅 가나안아, 주님께
하나님의 질투는 심판이면서 동시에 사랑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스바냐 3장 1~8절(새번역) 1. 망하고야 말 도성아, 반역하는 도성, 더러운 도성, 억압이나 일삼는 도성아, 2. 주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주님의 충고도 듣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도 않는구나. 3. 그 안에 있는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다. 재판관들은 이튿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우리의 가장 큰 부요와 영광입니다. 역대하 1장 1~17절(새번역) 1.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자기의 왕위를 튼튼히 굳혔다. 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며, 그를 크게 높여 주셨다. 2. 솔로몬은 온 이스라엘,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재판관들과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각 가문의 족장들을 불렀다. 3. 솔로몬은 온 회중
가정과 교회는 벽돌로 쌓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평화의 소망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역대하 2장 1~18절(새번역) 1. 솔로몬은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모실 성전과 자기의 궁전을 짓기로 작정하였다. 2. 그래서 솔로몬은 짐꾼 칠만 명, 산에서 돌을 떠낼 사람 팔만 명, 그들을 감독할 사람 삼천육백 명을 뽑았다. 3. 솔로몬은 또 두로의 히람 왕에게
돌아보면 내가 한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등 뒤에서 이루어진 은혜의 일입니다. 역대하 3장 1~17절(새번역) 1. 솔로몬은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주님의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 곳은 주님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셨던 곳이다. 본래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으로 쓰던 곳인데 다윗이 그 곳을 성전 터로 잡아놓았다. 2. 성전을 짓기 시작
성전의 기구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죄인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는 은혜의 통로를 보여줍니다. 역대하 4장 1~22절(새번역) 1. 솔로몬이 놋으로 제단을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스무 자이고, 너비가 스무 자이고, 높이가 열 자이다. 2. 그 다음에 후람은 또 놋쇠를 부어서 바다 모양 물통을 만들었는데, 그 바다 모양 물통은, 그 지름이 열
내 수고와 만족을 위한 집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신 집으로 인생을 지을 때 우리의 삶은 진정한 기쁨과 빛으로 가득해집니다. 역대하 5장 1~14절(새번역) 1. 이렇게 해서, 솔로몬은 주님의 성전을 짓는 모든 일을 완성하였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거룩하게 구별해서 바친 성물, 곧 은과 금과 모든 기구를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 창고에 넣었다. 2.
기도를 올려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역대하 6장 26~42절(새번역) 26. 또 그들이 주님께 죄를 지어서, 그 벌로 주님께서 하늘을 닫고 비를 내려 주시지 않을 때에라도, 그들이 이 곳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거든, 27.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님의 종들과 주님의 백성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는 기쁨과 영광이 가득합니다. 역대하 7장 1~22절(새번역) 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제물들을 살라 버렸고, 주님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 찼다. 2.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성전에 가득 찼으므로, 제사장들도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3. 이렇게 불이 내리는 것과 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고민과 노력을 기뻐하십니다. 역대하 8장 1~16절(새번역) 1. 솔로몬이 주님의 성전과 자기의 궁전을 다 짓는 데에 스무 해가 걸렸다. 2. 곧 이어 솔로몬은 히람에게서 얻은 성읍들도 다시 건축하여, 거기에 이스라엘 자손을 살게 하였다. 4. 그는 또 광야에 다드몰을 건축하고, 모든 양곡 저장 성읍들은 하맛에다가 건축하였다. 5
지혜는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의 태도와 자세에서 나옵니다. 역대하 8장 17~9장 12절(새번역) 17. 그 때에 솔로몬이 에돔 땅의 성읍인 에시온게벨 항구와 엘롯 항구로 갔더니, 18. 히람이 신하들을 시켜서 솔로몬에게 상선들을 보내고, 바다에 노련한 부하들도 보냈다. 그들은 솔로몬의 부하들과 함께 오빌로 가서, 거기에서 금 사백오십
하나님이 주신 부는 복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의지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시험이 됩니다. 역대하 9장 13~31절(새번역) 13. 해마다 솔로몬에게 들어오는 금의 무게가 육백육십육 달란트나 되었다. 14. 이 밖에도 관세 수입과 외국과의 무역에서 벌어들인 것이 있고, 아라비아의 모든 왕들과, 국내의 지방 장관들이 보내오는 금도
하나님의 징계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돌이키는 자에게 회복의 길이 열립니다. 역대하 12장 1~16절(새번역) 1. 르호보암은 왕위가 튼튼해지고 세력이 커지자, 주님의 율법을 저버렸다. 온 이스라엘도 그를 본받게 되었다. 2. 그들이 주님께 범죄한 결과로, 르호보암 왕이 즉위한 지 오 년째 되던 해에, 이집트의 시삭 왕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다. 3
예배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적극적인 순종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누리는 길이다. 역대하 13장 1~14장 1절(새번역) 2. 그는 예루살렘에서 세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 미가야이다. 아비야와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3. 아비야는 전쟁에 용감한 군인 사십만을 뽑아 싸우러 나갔고, 여로보
하나님은 의롭고 진실하려고 노력하는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역대하 14장 2~15절(새번역) 3.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석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부수었다. 4. 그는 또 유다 백성에게 명령을 내려서, 주 조상들의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실천하게 하였으며, 5. 또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산당과 태양상을 없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은혜와 자비를 기억하며 오늘도 마음과 뜻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리에.... 역대하 15장 1~19절(새번역) 2. 그가 아사 앞에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사 임금님과 온 유다와 베냐민은, 제가 하는 말을 들으십시오. 임금님과 백성이 주님을 떠나지 않는 한, 주님께서도 임금님과 백성을 떠나지 않으실
인생을 끝까지 잘 살아 내려면, 겸손함과 가난한 심령, 그리고 회개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역대하 16장 1~14절(새번역) 1. 아사 왕 삼십육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고, 어느 누구도 유다의 아사 왕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2. 그러자 아사는 주님의 성전 창고와 왕실 창고의 모든 은과 금을 모아서, 다마스쿠스에
인생을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선택하며 걸어가려면 겸손과 선을 행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역대하 22장 1~12절(새번역) 1. 예루살렘 사람들이 여호람의 막내 아들 아하시야를 왕으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전에 아라비아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쳐들어 왔던 침략군들에게 아하시야의 형들이 다 학살당하였으므로, 여호람
참된 개혁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내면의 진심에서 시작됩니다. 역대하 24장 17~25절(새번역) 17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으니, 유다 지도자들이 왕을 부추겨서 자기들의 말을 듣도록 하였다. 18 백성은 주 조상의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백성
신앙의 출발이 중요한 것 같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결국 무너집니다. 역대하 25장 1~13절(새번역) 1 아마샤가 왕이 되었을 때에,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스물아홉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여호앗단은 예루살렘 사람이다. 2 그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마음을 다하여 하지는 않았다. 3 왕권을 확고하게 장악한 뒤
말씀에 귀 기울이고, 교만을 피하며, 끝까지 순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충만하고 빛나게 하십니다. 역대하 25장 14~28절(새번역) 14 아마샤는 에돔 사람들을 학살하고 돌아올 때에, 세일 자손의 신상들을 가져 와서 자기의 신으로 모시고, 그것들 앞에 경배하며 분향하였다. 15 이 일로 주님께서 아마샤에게 크게 진노하셔서 예언자 한 사람을 보내시니,
형통할 때 교만이 부러짐의 시작임을 경계해야 합니다. 역대하 26장 1~23절(새번역) 1 유다의 온 백성은 웃시야를 왕으로 삼아,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에,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 2 아마샤 왕이 죽은 뒤에, 웃시야는 엘랏을 재건하여 유다에 귀속시켰다. 3 웃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에,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는 예
과거에서 배우는 자는 흔들림 없이 서고, 배우지 않는 자는 실족합니다. 역대하 27장 1~28장 15절(새번역) 27장 1 요담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열여섯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여루사는 사독의 딸이다. 2 그는 아버지 웃시야가 한 것을 그대로 본받아서,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으나, 그의 아
교회의 회복도, 나의 삶의 회복도 진심 어린 회개와 전심의 예배, 감사로 섬기는 헌신에서 시작됩니다. 역대하 29장 20~36절(새번역) 20 히스기야 왕은,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도성에 있는 대신들을 불러모아, 주님의 성전으로 올라갔다. 21 왕가의 죄와 유다 백성의 죄를 속죄받으려고, 그는 황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와 어린 양 일곱 마리
흩어진 자녀들을 불러 모아 먹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왕이 품어야 하는 마음입니다. 역대하 30장 1~12절(새번역) 1 히스기야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전갈을 보내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에는 각각 특별히 편지를 보내서,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기리며 유월절을 지키도록, 오라고 초청하였다. 2 왕이 대신들과 예루살렘의 온
하나님은 자격 있는 자를 초대하시는 분이 아니라, 돌아온 자에게 기쁨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히스기야 왕은 무너진 성전과 흩어진 백성을 바라보며 마음에 큰 결심을 합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모이자. 다시 예배하자.” 그래서 그는 남유다뿐 아니라 멸망한 북이스라엘에도 편지를 보냅니다. “돌아오십시오. 주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도 여러분께로 돌아오실 겁니다.”
마음이 주님을 향하면, 삶의 구조가 변한다. 예배가 회복되면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성전 문이 다시 열리고, 유월절 식탁에서 함께 은혜를 누린 백성들이 성전 문을 나서자마자 한 가지 행동을 합니다. 각자의 마을로 돌아가 우상을 부수고 산당을 헐어버린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용기와 신앙이 백성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회복은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제단 위에 다시 예배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하시며, 우리가 순종으로 제단을 세울 때 그곳에서 희망이 피어납니다. 에스라서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에스라 1장은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회복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바사 왕 고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항상 방해와 낙심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믿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간교함을 분별하고, 태도를 분명히 하며, 끝까지 의의 길을 걸을 때 하나님은 멈춘 듯한 시간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세우십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희망을 잃어갔습니다. 그들의 고향은 폐허가 되었고, 성전은 무너진 채 먼지만 남았습니다. 그런
우리의 신앙은 ‘평안할 때’가 아니라, 두려움이 몰려올 때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삶이 멈춘 것 같고,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가도 하나님은 그 ‘멈춤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바벨론의 긴 포로생활이 끝나고,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셨다. 예루살렘에 그분의 성전을 다시 세워라.” 그 한마디가 역
신앙의 길에는 늘 방해와 지침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멈춘 자리에서도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 끝나갈 무렵,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1장) “하늘의 하나님이 내게 명하셨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세워라.” 역사는 제국의 칙령으로 돌아가는 듯했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손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2장에
의로 행하는 이는 때로 반전을 만나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우십니다. 바벨론 포로로 무너진 시대에,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다시 세우라”는 조서를 내리십니다. 그 말씀에 응답한 사람들은 적고 약했지만, 믿음을 따라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처음 한 일은 성전이 아니라 제단을 세우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은 세상의 권력과 제국의 틈새에서도 당신의 손으로 사람을 세우시고 길을 여십니다. 섬리를 믿는 사람은 겸손과 성실로 행하며, 보이지 않는 손길을 감사로 받아들입니다. 바빌론에서 다시 일어난 사람 ― “말씀의 사람 에스라” (7장)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시대, 에스라라는 제사장 겸 학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아론의 후손으로, 모세의 율법에 능통하며 말씀
공동체의 재건은 ‘나 한 사람의 믿음과 용기’에서 시작되지만, 그 믿음이 ‘말씀과 순종’으로 이어질 때, 하나님은 그 한 사람을 통해 전체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에스라와 귀환 공동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8장은 그 두 번째 귀환의 행렬을 보여줍니다. 에스라는 출발 전, 함께 갈 사람들의 이름을
성숙한 신앙은 믿음으로 도전하고, 정직하게 헌신하며, 끝내 넘치는 감사로 응답하는 길을 걷습니다. 하나님은 그 길 위에서 보이지 않게 지키시며, 그 신앙의 여정이 공동체에 새로운 자극과 생명을 줍니다.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시대, 하나님은 한 사람 에스라를 부르셔서 말씀으로 회복의 길을 여십니다. 그는 학자이자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심”을
혼탁한 시대 속에서도 말씀의 날을 세우고, 동역자에게서 위로를 얻으며, 기도로 다시 은혜를 회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에스라와 귀환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로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무사히 성전 재건을 위한 예물을 바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모든 것이 안정되는 듯 보였지만, 그들의 신앙적 현실은 이미 깊이 타락해 있었습니다. 9장에 들
회복을 구한다면 은혜를 먼저 헤아리고,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자비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라는 귀환한 백성들이 다시 이방 문화와 타협한 사실을 듣고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는 깊은 슬픔 속에서 무너진 신앙의 현실을 바라보며, 무릎 꿇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립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남겨두셨습
하나님은 외형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며, 성전 재건의 핵심은 벽돌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한동안 성전 재건을 시작하는 듯했지만 금세 일상을 핑계 삼아 멈춰버렸습니다. 시간은 흘렀고, 집들은 하나둘씩 고급스러워졌지만 성전은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능력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었습니다
현재의 초라함을 바라보지 말고,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을 신뢰해야 합니다. 옛 영광과 비교하며 낙심하는 백성 (1–3절) 성전 공사가 재개되었지만 솔로몬 시대 성전을 기억하는 이들은 지금의 초라한 성전을 보고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이게 뭐가 성전인가… 너무 초라하지 않은가?” 비교는 낙심을 불러왔고, 낙심은 사명을 흔들었습니다. 낙심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
복은 외적인 환경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두는 마음에서 흘러나옵니다. 삶의 결정 앞에서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신뢰하는가입니다. 학개서 전체는 한 가지 메시지로 요약됩니다. “겉으로는 성전이 무너졌지만, 사실은 마음의 성전이 무너져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각자 자기 집을 꾸미고 생계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에게 기도와 준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기도로 방향을 받고, 준비로 순종하며, 행동으로 믿음을 증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도시는 여전히 황폐했고 공동체는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궁중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는 순간, 그의 평안한 삶은 무너졌습니다
공동체의 가장 큰 적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안에서 자라는 이기심과 마음의 장벽입니다. 복음을 따라 사랑과 책임을 실천하며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무너진 공동체의 신앙·관계·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여정입니다. 1–2장에서는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부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사명의 집중은 끝나지 않습니다. 성전은 이미 세워졌고 성벽도 거의 완성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사탄의 공격은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무리 단계에서 가장 치밀하고 교묘하게 다가옵니다. “한 번 만나자” (사명을 멈추게 하는 포장된 제안) “네가 왕이 되려 한다더라” (평판을 흔드는 음해) “성전에 숨어라” (두려움을 부추기는
사람의 수고 속에서도 결국 역사를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했고, 성전은 이미 스룹바벨 때 재건되었지만 예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폐허였습니다. 성벽은 단순한 ‘담’이 아니라 정체성, 예배의 자존심, 공동체의 안전, 영적 회복의 상징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황폐한 소식을 듣고 울었고, 기도하며 금식했고, 왕의
성도들의 헌신과 자기 부정을 요구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감동과 지도자(리더)의 솔선수범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서는 크게 두 줄기로 흐릅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이야기(1–6장) 외부의 방해, 내부의 낙심, 지도자의 리더십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공동체를 붙드시는지 보여줍니다. 무너진 ‘백성’을 다시 세우는 이야기(7장 이후) 다시 말하면, 6장까지는
말씀의 생명력이 회개를 일으키고, 회복의 기쁨까지 이르게 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정답은 세 가지입니다. (1) 말씀은 ‘다시 듣고 싶게’ 만듭니다. (1–3절) 백성들이 스스로 에스라에게 율법책 낭독을 청했고, 해 뜰 때부터 정오까지 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말씀 앞에서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성이 살아납니다. (2)
참된 회심의 증거는 순종과 소유권 양도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릴 때, 공동체는 새로워집니다. 성벽은 완성되었지만 예루살렘은 여전히 비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단지 성만 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 흩어진 백성들의 이름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스스로 에스라를 불러 “말씀을 읽어 달라”고 요청
하나님은 ‘원치 않아도 순종하는 마음’보다 ‘자원하여 드리는 마음’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은 나를 다시 어떤 자리로 부르시는지 묻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을 다시 채우는 장면입니다. 무너졌던 성벽은 세워졌지만, 그 안을 다시 채울 사람들은 필요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자원하는 사람들과 선택되어 순종하는 사람들을 세우십니다. 자
신앙은 스스로 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도와 헌신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를 다음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믿음의 반응입니다. 오늘의 한 문장 오늘의 나는 누군가의 은혜로 세워졌고, 오늘의 누군가는 나의 작은 헌신으로 다시 일어선다. 느헤미야 12장은 긴 이름 목록으로 시작합니다. 레위인, 제사장, 조상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이
우리는 살면서 종종 마음의 성벽이 무너지는 경험을 합니다. 실패, 낙심, 혹은 게으름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다시 쌓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예루살렘 성벽이 드디어 완공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성벽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 신앙의 길엔 완성이란 없습니다. 언제든 넘어질 수 있고 언제든 타협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공동체는 다시 이완되고 혼합주의, 안일주의, 기회주의가 자리 잡았습니다. 성벽을 세울 때의 뜨거운 신앙과 회개는 사라진 듯합니다. 신앙의 길에는 '완성'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혼합주의 백성들이 율법책을 듣고 잘못을 깨달아 모압과 암몬 사람들
고난의 이유를 묻지만, 축복의 이유를 묻지는 않습니다. 축복에는 감사하지만, 고난에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인과응보의 세계관에서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이 닥칠 때 실존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몇이나 될까요? 환난 중에도 절망하지 않고 다윗은 소망이신 주를 향합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다윗이여, 당신은 고난 중에도 어떻게 노래할 수 있습니까? 칼
숨을 곳이 없다는 것은, 당신이 어디에 있든 사랑받지 못할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나를 온전하게 이해해 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가장 가까운 가족도, 평생을 약속한 친구도 내 마음 깊은 곳의 그림자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을 때, 나는 철저히 혼자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완전한 앎 앞에 나를 숨김없이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때, 그 작품의 아주 작은 부분 하나까지도 이유 없이 만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물며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만드실 때는 어떠셨을까요? 오늘 시편 기자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어머니의 뱃속, 그 어둡고 은밀한 곳에서 나의 형체가 생
세상에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덫과 올무가 가득합니다. 때로는 악한 자들의 말이 뱀의 독처럼 날카롭게 우리 영혼을 파고듭니다. 이럴 때 우리는 고민에 빠집니다. "나도 똑같이 맞서 싸워야 할까? 아니면 그냥 모른 척 피해야 할까?" 하지만 시편 기자는 제3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는 '기도'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듭니다. 기도는 악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비
위기 속에서 낙망하지 않고 소망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기도의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의 묘사처럼,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쌓이는 '향'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서 제사장의 소명을 받은 존재임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태도 (분별, 경청, 구원) 분별 선과 악을 구별하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제사장이 악을 품으
나의 전략과 경험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을 때 승리는 시작됩니다. 전쟁터의 베테랑이자 한 나라의 왕이었던 다윗,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누구보다 자신의 경험과 ‘감’을 믿어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는 자신의 승리 비결이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 서 있는 우리가
시편 145편은 다윗의 노래이자, 그의 인생이라는 악보에 그려진 가장 웅장한 피날레입니다. 평생 왕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했던 다윗이지만 이 시에서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왕관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나의 왕이신 하나님이여." 자신이 왕이 아니라, 왕을 모시는 신하임을 자처하는 이 아름다운 항복 선언 속에서, 우리는 진짜 왕으로 오
현실의 왕 vs 영원의 왕: 당신은 누구를 신뢰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왕'에게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권력으로 약속을 내세우는 정치적 왕, 금융과 경제 시스템을 움직이는 재정적 왕, 유명인과 영향력 있는 이들을 향한 사회적 왕. 이들은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말하지만, 그들의 힘은 제한적이고 유한합니다. 주식 시장은 폭락하고
웅장한 하나님과 나의 작고 연약한 현실을 연결헤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시편 147편은 마치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광활한 우주에 수억 개의 별들이 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별들이 너무 많아 감히 셀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만,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그
익숙함에 속아 은혜를 값싸게 만들지 않는 거룩한 분별력 유다는 원래 기쁜 마음으로 '우리가 함께 받은 구원'에 대해 편지를 쓰려 했습니다. 하지만 펜을 든 그의 손은 떨렸고, 마음은 다급해졌습니다. 외부의 적이 칼을 들고 쳐들어온 것이 아니라, 가장 위험한 적이 이미 '우리 안'에 몰래 들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곁
주제 : 내 욕망이 무너지는 순간, 비로소 하나님의 진짜 계획이 시작됩니다. 어느 날, 밤새 잠 못 이루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내일 아침 회의에서 어떻게 경쟁자를 밟고 승진할지, 부동산 정보를 이용해 어떻게 더 큰 이득을 취할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웁니다. 그의 머릿속엔 '더 많이, 더 높이'라는 생각뿐입니다. 날이 밝자마
세상의 기준인 '성공'과 '효율'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정직'과 '공의'를 회복하는 나라를 원하신다. 여기, 화려한 고층 빌딩 숲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성과를 내라"는 압박 속에 아랫사람들의 고혈을 짜내는 리더들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들의 모습을 마치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꺾어 솥에 삶는 것 같다"고 끔찍하게 묘사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서로를 겨누던 경쟁의 무기가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바뀌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전쟁터와 같습니다. 직장에서는 동료보다 더 빨리 승진하기 위해 날 선 '성과'의 칼을 갈고, 학교에서는 친구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스펙'이라는 방패를 두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밟아야 한다"는 생존 논리가 지배하는 이곳에서, 평화란 그저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라는 질문을 멈추고, 이미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마음’과 ‘삶의 방식’을 점검하기 우리는 신앙조차 ‘거래’로 생각합니다. 내가 희생(Input)을 넣으면, 하나님은 복(Output)을 뱉어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탄절의 감격이 채 식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성과’와 ‘보상’이라는 차가운 비
때와 장소와 사람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찬양할 수 없는 상황이나 장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지금도 하나님의 통치와 목적 아래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은총으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오늘 우리에게 그 찬양의 이유를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운 의미를 입히는 힘, 찬양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우리는 습관처럼 '어제의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 오늘도 피곤하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야", "나는 왜 이 모양일까"라는 낡고 무거운 마음의 소리들입니다. 하지만 시편 149편은 우리에게 **"새 노래를 부르라"**고 초대합니다. 여기서 '새 노래'란 단순히 최신 유행가를
삶의 모든 순간을 긍정하고, 호흡이 있는 한 감탄하라. 한 해의 마지막 자락, 혹은 새로운 시작의 문턱에서 시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숨 쉬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거대한 오케스트라와 같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당신이 서 있는 그곳, 답답한 사무실이든, 소란스러운 거리든, 혹은 고요한 방 안이든 그곳이 바로 성소라고. 하늘의 웅장
혼돈 위에 말씀하시는 하나님, 새해를 여시는 하나님의 첫마디 성경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시작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정돈되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고,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으며, 아무것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혼돈의 한
새해는 우리 마음에 “이번에는 좀 달라지고 싶다”는 변화의 갈망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짐을 쉽게 말하지 못합니다. 진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결심이 얼마나 연약한지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슷한 죄 앞에서 반복해서 무너져 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질문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계속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는가? 성경은 그 원인을 의지 부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인류는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죄와 죽음,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현실은 가인의 삶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무려 '세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첫째, 제물이 거절되었을 때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주셨으나 그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둘째,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 회개할 기회
우리는 아침마다 뉴스를 켭니다. 누군가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마치 창세기 4장에 나오던 가인의 후예들이 쌓아 올린 화려한 문명처럼, 세상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하고 자랑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 뉴스들의 끝은 언제나 같습니다. "누가 죽었다." 창세기 5장은 마치 거대한 공동묘지의 비석들을 읽어 내려가는
하나님은 끝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살려내어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뉴스에서 마주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짓밟고, 폭력이 일상이 되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들. 창세기 6장의 세상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당시 사람들을 '육신(flesh)'이 되었다고 표현합
사람들은 흔히 폭풍이 지나가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막상 폭풍의 한가운데를 통과해 본 사람은 압니다. 비는 그쳤어도, 마음속의 '먹구름'은 쉽게 걷히지 않는다는 것을요. 노아의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트라우마'와 '불안'이라는 후유증을 안고 살아갑니다. 한번 실패를 겪고 나면,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또 망하면 어쩌지?
구원을 경험한 이후에도, 인간의 한계는 여전히 드러납니다. 홍수가 끝났습니다. 방주는 멈췄고, 물은 빠졌고, 노아는 새로운 땅 위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노아는 단순한 생존자가 아닙니다. 그는 심판을 통과한 사람이고, 세상의 끝을 본 사람이며,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새로운 인류의 대표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여기까지의 노아를 기억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야기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이야기로 읽는 창세기 10장(제목 :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성경의 족보는 언뜻 보면 지루한 이름들의 나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건조한 명단 속에는 인류가 걸어온 치열한 삶의 궤적과 두 가지 운명이 숨겨져 있습니다. 대홍수 이후, 텅 빈 지구라는 캔버스 위에 다시 선 인류. 그들은 어떤 그림을 그
인간은 하늘에 닿으려 발버둥 치지만, 구원은 우리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낮은 곳으로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원을 만났다고 합니다. 에덴의 동쪽, 가인의 동쪽처럼 성경에서 '동방'은 하나님을 등지고 멀어지는 방향을 의미합니다. 그곳에서 인류는 최초의 기술 혁명을 일으킵니다. 울퉁불퉁한 자연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된 일상과 죽음의 그늘 아래, 하나님이 심어둔 새로운 시작의 씨앗을 발견합니다. 오래된 족보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셈에서 아브람까지, 이 명단은 얼핏 보면 그저 '누가 누구를 낳고 죽었다'는 지루한 기록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곳엔 서늘한 공포가 흐르고 있습니다. 600년을 살던 수명이 400년, 200년, 그리고 10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결핍의 관점’을 주입합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기회는 희소하니, 지금 움켜쥐지 않으면 영원히 뒤처질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불안에 쫓기며, 내 몫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경쟁, 즉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을 살아갑니다. 이런 세상에서 타인을 위한 양보란, 어리석은 패배자의 변명처럼 들리기도 합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기대어 삽니다. 누군가는 통장 잔고에, 누군가는 화려한 인맥에, 또 누군가는 '핫플레이스'라 불리는 성공의 중심지에 인생을 베팅합니다. 조카 롯이 그랬습니다. 그는 가장 안전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도시, 소돔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삶은 짓궂은 농담 같습니다. 가장 안전해 보였던 성벽이 가장 위험한 감옥이 되고, 나를 지켜줄 것 같았던
(유튜브 : 32분- 50분) 사람은 불안해지면 속도가 빨라집니다.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마음부터 앞질러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더 기다리면 늦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어.” 조급함은 언제나 그럴듯한 이유를 달고 옵니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이고, 책임감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조급함의 진
우리는 누구나 '기다림'이라는 시험대에 오릅니다. 약속된 승진, 간절히 바라는 자녀, 해결되지 않는 재정 문제, 혹은 나아질 기미가 없는 관계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부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신의 약속을 받은 지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아이는 생기지 않았고,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만 갔습니다.
아브람의 99세.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성경은 이 13년 동안 하나님이 침묵하셨다고 암시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습니다.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의 뜨거움은 식었고, 기도 제목 노트는 낡아갑니다. 취업 준비가 길어질 때, 승진에서 계속 누락될 때, 간절히 원하던 아이가 생기지 않을 때, 혹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관계나 질
우리는 소돔 같은 이 차가운 세상에서 결코 완벽한 영웅으로 살 수 없습니다. 안전한 거리를 두고 던지는 '동정'은 쉽지만, 나의 공간을 내어주고 위험을 함께 짊어지는 '동행'은 목숨을 건 거룩한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 롯처럼 자주 두려워하고, 때로는 판단을 그르치며, 거대한 세상의 힘 앞에 무력함을 느낍니다. 선하게 살아보려는 당신의 노력은
아직 어둠이 남아 있던 새벽, 소돔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했습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밤, 내일도 계속될 것 같은 평범한 시간. 사람들은 잠들어 있었고, 불은 꺼져 있었고, 이 도시가 하나님의 심판을 앞둔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두 천사가 롯의 집 앞에 섭니다. 그들은 밤새 머물지 않습니다. 머뭇거릴 여유도
소돔을 향해 불과 유황이 쏟아집니다. 도시는 한순간에 사라집니다. 견고해 보이던 집들, 안전하다고 믿었던 터전, 사람들이 의지하던 모든 확신은 하룻밤 사이에 연기처럼 흩어집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고, 오늘도 별일 없이 지나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의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아브라함은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라 불렸지만, 위기 앞에서 그는 여전히 계산합니다. 기도는 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라는 또다시 위험 속으로 들어가고, 문제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봉합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브라함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개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를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사라는 웃었습니다. 이번에는 의심의 웃음이 아니라, 오래 참아 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조심스러운 웃음이었습니다. 기다림은 끝났고, 약속은 생각이 아니라 몸이 되었고, 말씀은 이야기에서 아이가 되었습니다. 백 세의 아브라함과 구십의 사라는 “말씀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팔에 안고 웃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웃음으로 시작해 눈물로 흘러갑니다. 아이의 웃음소
월요일 아침은 늘 정체성을 시험합니다. 사업가는 성과로,직장인은 평가로, 취업 준비생은 결과 없는 노력으로, 부모는 끝없는 책임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야 하는 자리 앞에 섭니다. 사람은 주말을 지나 월요일을 맞이할 때마다 이름이 아니라 역할로, 존재가 아니라 결과로 자신을 설명하려는 압박 속에 놓입니다. 요한도 그런 자리 앞에 섰습니다. 사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도 우리처럼 이런 일상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인생이 정리된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준비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결심의 자리에서 부름받지 않았고, 하루를 살던 중 부름받았습니다.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듣고 큰 소리 없이, 조용히 예수를 따라갑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놀라울
가나의 결혼식은 기쁨으로 가득한 자리였습니다. 사람도 많고, 웃음도 많고, 축복도 넘쳤습니다. 그런데 한창 잔치가 무르익었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많았지만,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많다고 결핍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만들어내는
우리는 보통 성전을 조용한 장소로 생각합니다. 질서 있고, 정돈되어 있고, 문제가 없어 보이는 공간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마주하신 성전은 달랐습니다. 그곳은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돈이 오가고, 체계가 있었고, 모두가 익숙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성전 안에서
니고데모는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많이 아는 사람이었고, 인정받는 사람이었고, 이미 충분히 도달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묻는 질문에 답해 주는 위치에 있었고, 삶의 구조와 질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질문은 공손했고, 말은 정중했으며, 논리는 정확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기도하러 나온 것도 아니고, 인생을 바꾸겠다는 결심을 품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필요한 것을 채우러 나왔습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 어제와 같은 시간, 어제와 같은 우물가. 그 반복의 한가운데에서 예수님은 그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로 들어오셨고,
사마리아 여인은 여전히 물을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는 아직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물을 제게 주십시오. 다시는 여기 오지 않게 말입니다.” 이 말은 믿음의 고백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삶이 덜 번거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더 가깝습니다. 갈증은 해결하고 싶지만, 자기 삶의 구조까지 바꾸고 싶지는 않은 상태
마리아 여인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처음에 왜 그곳에 왔는지를 잊어버립니다. 물을 길으러 왔는데, 정작 물은 그대로 두고 돌아갑니다. 물항아리를 내려두고 마을로 향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감동적인 이야기라기보다 아주 현실적인 변화의 징후입니다. 사람은 보통 가장 급한 목적을 잊지 않습니다. 생계를 잊지 않고, 체면을 잊지 않고, 불안을 쉽게 내려놓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 환영은 신뢰라기보다 기대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보다, 무엇을 보여 주실지를 궁금해했습니다. 보여 주시면 믿겠다는 태도. 확인되면 맡기겠다는 태도. 그 모습은 오늘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업은 결과가 나와야 안심하고, 직장은 성과가 보여야 확신하며, 합격 통보가 와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지만, 그곳은 자비보다 속도가 중요했던 자리였습니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낫는다는 말 한마디에 병자들은 서로를 밟으며 물의 움직임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물이 문제라고 믿었고, 타이밍이 전부라고 생각했고, 자기 인생은 늘 한 발 늦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을
명절은 끝났습니다. 식탁은 치워졌고, 선물은 정리되었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남습니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갈릴리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를 먹었습니다. 배는 불렀고, 기적은 선명했고, 분위기는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사람들은 수군거립니다. “저 사람은 요
예수님의 말씀은 때로 우리를 위로하기보다 흔들어 놓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제자들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이해되지 않는 손실이 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계약이 깨집니다. 직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는데 평가가 기대와 다릅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은 ‘왜 나는 아직인가’라는 질문 앞에 섭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이렇게까지 기도했는데
월요일입니다.다시 출근길에 오르고, 다시 일정과 숫자와 결과 앞에 섭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압니다. 시장 흐름도 알고, 회사 분위기도 알고, 자녀의 성향도 알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압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보며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안다.” 그들의 앎은 출신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출신, 요셉의
초막절 마지막 날, 가장 큰 날. 사람들은 성전에서 물을 붓는 의식을 보며 광야에서 반석을 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서서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말씀은 조용한 위로가 아닙니다. 공개적인 선언입니다. “생수의 근원은 여기 있다.” 나는 지금 무엇에 목마른가. 사업하는 분은 계속되는 경쟁 속에서 “
우리는 속으로 판단합니다. 사업은 냉정해야 한다고 말하며 사람보다 성과를 먼저 세웁니다. 직장에서는 ‘저 사람 왜 저래’라는 말이 쉽게 나옵니다. 취업 준비생은 자기 자신을 정죄합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 부모는 아이를 걱정한다는 이름으로 실은 비교와 불안을 쏟아냅니다. 사람들은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 율법을 들이밀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진리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자리로 흩어집니다. 사업가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로, 직장인은 평가와 책임 사이로,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앞으로, 부모는 정답 없는 양육의 하루 속으로 들어갑니다. 겉으로는 모두 다르지만 우리 안에는 같은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나
우리는 자유를 원합니다. 사업하는 분은 재정에서 자유롭고 싶고, 직장인은 사람 눈치에서 자유롭고 싶고, 취업 준비생은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고, 부모는 자녀 문제에서 자유롭고 싶습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좀만 안정되면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
월요일입니다. 한 주가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루를 열며 이미 계산을 시작합니다. 이 선택이 안전한지, 이 말이 관계를 흔들지 않을지, 이 고백이 손해가 되지는 않을지. 요한복음 9장도 그런 자리입니다. 맹인이 눈을 뜬 기적이 일어났지만 기쁨 대신 긴장이 흐릅니다. 바리새인들은 진리보다 입지를 먼저 생각하고, 신학적 분별보다 정치적 판단을 먼저 내립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다시 불려 나옵니다. 그 자리는 대화의 자리가 아니라 이미 결론이 정해진 심문 자리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안다.” 그들은 사실을 묻는 척하지만 자기 확신을 강요합니다. 이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어딘가로 불려 나옵니다. 회의 자리로, 면접 자리로, 보고 자리로, 발표 자리로. 그리고 그 자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양”이라 하십니다. 양의 특징은 단순합니다. 힘이 센 것도 아니고, 방향 감각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누구의 음성을 듣느냐에 따라 길이 결정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 담을 넘는 자들, 양을 이용하는 삯꾼과 양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목자를 대조하십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 이 말은 단순한 신학적 설명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행한 일들을 보라. 그 일들이 내가 누구인지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논리를 쌓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가 병들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말에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오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무덤 앞에는 냄새가 났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간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나흘이라는 시간은 완전히 끝났다는 의미였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고 기적을 말할 상황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미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 “이 일은 끝났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위로하고, 울고, 장례를
사람의 마음은 이상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기 전까지는 괜찮다고 느끼던 삶도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SNS를 보다 보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누군가는 더 잘 나가는 것 같고 누군가는 더 인정받는 것 같고 누군가는 더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올라옵니다. “나는 왜 이 정도일까.”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되지 못
사랑은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저 드립니다. 그러나 계산하는 마음은 항상 묻습니다. “그게 정말 가치 있는 일인가?” “그만한 이유가 있는가?” “그럴 만한 사람이 맞는가?” 그래서 계산은 늘 사람의 자격을 먼저 따집니다. “그 사람이 받을 만한가.” “그 사람이 그 정도 가치가 있는가.” 유다의 마음이 바로 그랬습니다. 향유를 보며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여!” 사람들은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끝내 줄 왕, 세상을 뒤집어 줄 왕, 자신들의 삶을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왕을.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환호했죠.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왕의 모습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왕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
사람들이 생각한 영광은 권력을 잡는 순간, 세상을 뒤집는 순간, 사람들이 환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완전히 다른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사람들이 생각한 길은 살아남는 길이었습니다. 높아지는 길,
사람은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더 인정받고 싶고, 더 중요해 보이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높아지고 싶습니다.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누가 더 큰지 이야기했고, 십자가보다 자리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십니다. 예수
사람이 어둠으로 가는 순간은 생각보다 그렇게 극적인 순간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큰 악을 선택하면서 인생이 무너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아주 작은 마음에서 시작되죠. 마음에 섭섭함이 하나 남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대할까.” 작은 실망이 쌓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이해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조용히 마음 한쪽에 자리 잡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에 대해 꽤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저 상황에서는 신앙을 지킬 것이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그는 진심이었습니다.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 그러나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두려움 앞에서 인간의 결심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집니다. 그런데 복음의
아침을 시작할 때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으로 하루를 엽니다. 일의 방향, 관계의 선택, 미래에 대한 불안. 길은 많은 것 같은데, 확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알아야 할 것 같고, 더 분명해져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마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질문에
어느 날은 유난히 사람이 많은데도 혼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대화를 나누고, 일을 하고, 하루를 바쁘게 보내지만 마음 한쪽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남아 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늘 함께 계시던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 앞에서 그들은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강해지라는 명령이 아니라, 놀라지 말라는 설명입니다. 흔들리는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두려워지는 것도 믿음 없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방향을 바꾸십니다. "성령이 증언하시니, 그리고 너희도 증언하게 되리라" 증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아서 되는 것도 아닙니
제목 ;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어떤 일을 하실까? 예수님은 미리 말씀하십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숨기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환영하지 않습니다. 밀어냅니다. 배척합니다. 악은 악처럼 오지 않습니다. 명분을 입고 옵니다. 정의의 얼굴을 하고 옵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이 장면 앞에서 사람은 무너집니다. 두려움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방향을 무
우리는 이미 받은 것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아직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말씀도 듣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지만 왜 우리의 마음은 쉽게 기울어질까요? 문제는 부족이 아닙니다. 무엇이 더 실제처럼 느껴지느냐의 문제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이미 방향을 잡기 시작합니다. 해야 할 일, 아직 이루지 못한 것, 다른 사람의 삶 보이지
우리는 하루를 시작할 때 이미 마음이 분주해집니다. 해야 할 일, 아직 안 된 일, 앞으로 될지 모르는 일들까지.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붙들고 하루를 버티듯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붙들수록 불안하고, 쥐고 있을수록 더 흔들립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아직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이루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기도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흔들릴 것을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무너질 것도 아셨고, 제자들이 흩어질 것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지켜 주옵소서”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세상 가운데서도 악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과거의 기록이
차가운 밤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횃불이 흔들리고, 그 빛이 예수님을 향해 모입니다. 예수님은 도망가지 않으십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십니다. 제자들은 흩어집니다. 그 가운데 베드로는 따라갑니다. 도망가지는 않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지도 않습니다. 그는 거리를 둡니다. 보일 듯 말 듯, 들킬 듯 말 듯. 그렇게 사람들 틈에
빌라도는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질문도 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겉으로 보면 듣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결론을 가진 채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그의 마음은 지위, 권력, 자기 보존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고 말씀하시자 그는 말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건 질문이 아닙니다. 진리를 들을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본능적으로 한 가지를 찾습니다. “누가 나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가” 그날도 그 질문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압제, 불안한 현실, 무너질 수 있는 삶.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생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칼을 거두라, 십자가를 지라 이 말씀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맞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몰려 있습니다. 군인들은 분주하고, 사람들은 구경하고, 어떤 이들은 계산하고, 어떤 이들은 비웃습니다. 그 중심에 십자가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예수님이 달려 계십니다. 그때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군인들은 옷을 나누고 제비를 뽑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그저 하루
이야기로 읽는 요한복음 20장 19~31절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 그들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기대했던 미래는 사라졌고 따르던 스승은 처형당했고 이제 남은 것은 두려움과 자기보존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문을 잠급니다.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밖의 위협” 때문에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자기 안
밤이 지나도 삶이 바뀌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애쓴 흔적은 있는데 손에 잡히는 것은 없는 아침. 제자들이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결과는 하나입니다. 아무 것도 없음입니다. 이 장면이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무언가를 하고는 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묻습니다. “고기가 있느냐?”
사람은 실패하면 두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더 잘하려고 자신을 밀어붙이거나, 아예 물러나 접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확신이 무너졌습니다. “나는 끝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다르다”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 믿음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갔습니다. 심지어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가서 예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 말은 신앙 고백처럼 들리지만, 상황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에서, “함께 돌아오겠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분명한 확신의 표현이라기보다, 스스
우리는 삶에서 확실한 것을 원합니다. 보이는 결과, 손에 잡히는 증거, 지금 당장 확인되는 안정. 그래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면, 이미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믿음이 있다면, 상황도 따라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창세기 23장은 전혀 다른 장면을 보여줍니다. 사라는 죽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죽었지만, 약속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 다음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입니다. 리브가는 미래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삭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가나안이 어떤 곳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움직입니다. 왜입니까? 이미
우리는 대부분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가능성이 보이면 움직이고, 결과가 예상되면 선택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는 늘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게 의미 있는 선택인가?” 그런데 창세기 25장의 아브라함은 전혀 다른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줍니다. 이건 단순한 상속이 아닙니다. 보이는 기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약속을 기준
사람은 위대한 선택으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아주 사소한 선택으로 무너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서는 거창한 결정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배고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그릇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더라” 이건 단순한 실수가 아닙니다. 약속을 작게 보았습니다. 여기서 인간
우리는 위기 앞에서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그런데 현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그 믿음은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근이 왔습니다. 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더 안전해 보이는 곳, 더 현실적인 선택. 그때 하나님이 막
우리는 어떤 순간에 진짜 모습이 드러날까요. 일이 잘 풀릴 때가 아니라, 오히려 잘 풀리기 시작한 이후입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결과가 보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묘한 긴장이 생깁니다.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관계의 공기가 변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빠르게 반응합니다. 잃지 않으려 하고, 밀리지 않으려 하고, 정당함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갈
오늘 본문 속 에서는 아버지 앞에서 울부짖습니다. “내게도 축복하소서”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잔인할 만큼 분명합니다. “이미 늦었다” 여기서 우리는 멈춥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냅니다. 우리는 선택할 때는 가볍게 여기고 결과 앞에서는 절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순간을 따르고 나중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
왜 이렇게 되었는지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 선택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핑계 댈 수 없고, 억울할 수도 없고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피하거나 합리화하거나,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버팁니다. 야곱이 그렇습니다 그는 속였고 빼앗았고 결국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운이 나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결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상한 장면을 보여
우리는 선택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더 좋은 선택을 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나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야곱은 지금 도망자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도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라헬을 만난 후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7년이라는 시간이 며칠처럼 느껴집니다. 성경은 이유를 단순하게 말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
라헬은 “내게 자식을 주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말합니다. 이건 과장이 아니라, 정체성 붕괴의 언어입니다. 라헬에게 자녀는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야곱에게 분노합니다. 핵심 구조 결핍 → 비교 → 분노 → 타인에게 책임 전가 그리고 결국 빌하를 통해 우회적으로 결과를 얻으려 합니다. 여기서 중
사람은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누가 더 사랑받는지, 누가 더 인정받는지, 보이지 않게 자신을 그 사이에 놓고 확인합니다. 창세기 29장의 레아가 바로 그렇습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 비교 속에서 밀려난 사람. 누군가의 선택에서 제외된 사람. 그런데 성경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야곱은 보지 않았습니다. 야
월요일 아침, 우리는 다시 방향을 정합니다. 이번 주는 다르게 살겠다 결심합니다. 그런데 하루가 시작되면 드러납니다. 방향은 바뀌었는데, 방식은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계산으로 결정하고, 여전히 불안으로 움직이고, 여전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먼저 붙듭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납니다. 분명한 결단입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여전합니다. 말하지
라반은 계속 선을 넘던 사람입니다. 관계를 이용하고, 경계를 흐리고, 기준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이런 관계의 특징은 분명합니다. 선을 긋지 않으면 계속 침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단순히 떠나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경계를 세우게 하십니다. “여기까지다.”, “이 선을 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입니다. 이 경계는 상대를 막기 위한 것이면서
야곱은 지금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한쪽에는 하나님의 군대가 있습니다. (마하나임) 다른 한쪽에는 에서의 400명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야곱은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에서의 군대를 “더 현실로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이 이상해집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런데 동시에 나눕니다. (혹시 망하면 대비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에게 이 질문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속이는 자”입니다. 그동안 야곱의 삶을 말해줍니다. 야곱은 평생 다른 이름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형처럼 살고 싶었고, 축복받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고, 괜찮은 사람처럼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이름을 걷어내십니다
어제는 분명했습니다. 내 힘을 안된다는 사실에 무너졌고, 연약함을 인정했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런데 오늘, 상황속에서 기도의 언어가 아니라 예측의 언어가 먼저 올라옵니다. 야곱이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습니다. 어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가족을 나눕니다. 앞, 중간, 뒤. 이건 단순한 배치가 아니라 “어디까지 잃을 수 있는가”를 계산한 구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런데 이미 결정한 채로 기도합니다. 방향은 정해졌고, 결론도 내려졌고 하나님께는 확인만 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의지가 아니라 절차가 됩니다. 겉으로는 신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확신을 하나님으로 덮는 행동입니다 야곱은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겜에 머뭅니다. 왜입니까? 더 안전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 계산 가능한
우리는 매일 선택합니다. 더 나은 조건, 더 빠른 결과, 더 유리한 자리. 그런데 이상한 경험을 합니다. 분명 더 좋은 선택을 했는데, 마음은 더 불안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과로 안정되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지점을 정확히 건드립니다. 에서의 삶을 보십시오. 가정도 있고, 재산도 있고, 이미 기반이 잡혀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잘
우리는 결과를 보면 쉽게 판단합니다. 누가 더 빨리 자리 잡았는지, 누가 더 안정된 삶을 살고 있는지. 에서는 빨랐습니다. 이미 왕들이 세워지고, 나라의 틀이 잡혔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공, 구조, 안정. 말 그대로 “잘 풀린 인생”처럼 보입니다. 반면 야곱의 후손은 느립니다. 아직도 가족 공동체 수준이고, 노예가 되고, 광야를 지나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
우리는 인생을 ‘이해되는 흐름’으로 살고 싶어합니다. 이 선택을 하면 이 결과가 나오고, 이 길을 가면 저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예측 가능한 선을 그리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실제 삶은 다릅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고 결정했는데 길이 꼬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관계는 어긋나고, 상황은 더 복잡해지고,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조차 흔들립니다. 요셉이 바
우리는 종종 인간관계나 일터에서 '멀리서' 나를 판단하고 차가운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요셉의 형들이 멀리서 걸어오는 요셉을 보며 "꿈꾸는 자가 온다"며 조롱하고 낙인찍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내 진심을 가까이서 보려 하지 않고,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나를 오해하고 때로는 깊은 상처를 줍니다. 결국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미움에 떠밀려 캄캄한
우리는 종종 인생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느낄 때보다, 멈춰 버렸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연락이 없습니다. 진심을 다했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기도했는데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제는 좀 풀리겠지” 기대했는데, 오늘 아침 눈을 뜨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럴 때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올라옵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우리는 대개 삶이 계획대로 흘러갈 때 안심합니다. 일정이 예상대로 진행되고, 관계가 안정되고, 건강에 큰 문제가 없고,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안을 하나님의 임재보다 내가 관리할 수 있는 상태에서 찾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명되지 않는 일이 찾아옵니다. 예상하지 못한 건강검진 결과, 갑작스러
우리는 좋은 말을 듣는 데 익숙합니다. 설교를 듣고, 책을 읽고, 누군가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순간에는 분명 마음이 움직입니다. “맞아. 그렇게 살아야지.” “이제는 달라져야지.” 그런데 삶은 이상할 만큼 쉽게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깨달음은 있었지만 변화는 없고, 감동은 있었지만 결단은 없고, 생각은 바뀌었지만 습관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우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더 민감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순간에도 마음이 완전히 평안해지지는 않습니다. 원하던 회사에 들어가도, 승진을 해도, 누군가에게 인정받아도, 마음속에는 또 다른 질문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인가?” “이 자리
살다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드렸는데 상황은 그대로이고, 기다렸는데 문은 열리지 않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일하고 계신 걸까?” “내 삶은 왜 이렇게 멈춰 있는 것 같지?” “기도해도 달라지는 게 없는데.” 창세기 42장은 바로 그런
우리는 살면서 은근히 이런 질문을 자주 합니다. “왜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사랑받는 것 같지?” “왜 나는 늘 덜 인정받는 것 같지?” “왜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게는 더 많이 주시는 것 같지?” 비교는 아주 조용하게 우리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감사는 사라지고 서운함이 자리를 차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요셉은 형제
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사람의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모든 것이 잘될 때는 누구나 친절할 수 있습니다. 여유가 있을 때는 누구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손해를 봐야 할 때, 억울함을 감당해야 할 때, 내가 대신 책임져야 할 상황이 올 때, 그때 비로소 사랑은 말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마
우리는 흔히 공동체가 무너지는 이유를 환경에서 찾습니다. 사람이 부족해서, 관계가 어색해서, 서로 성격이 달라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이유가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 한 발 물러섭니다. “왜 내가 나서야 하지?” “괜히 말했다가 오해받으면 어떡하지?” “내 일도 바쁜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겪어도 어떤 사람은 평생 상처 속에 머물고, 어떤 사람은 그 상처를 통해 더 깊고 넓은 사람이 됩니다. 차이는 사건이 아니라 해석입니다. 상처를 중심에 두고 인생을 해석하면 마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피해자다.” “저 사람이 내 인생을 망쳤다
우리는 살면서 꼭 한 번쯤은 “이제 기대 안 해.” 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너무 실망해서, 기도해도 바뀌지 않아서,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마음이 천천히 식어 갑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요셉이 죽었다고 믿은 뒤, 야곱은 살아 있었지만 사실 마음은 오래전에 무너져 있었습니다. 창세기 45장을 보면 요셉이 살아
우리는 보통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높이 올라간 사람, 많이 가진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의외로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보다 “누군가를 얼마나 살렸는가”를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요셉을 단순히 성공한 사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결국 자신이 정말 믿고 있던 것이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은 마지막까지 돈을 붙듭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인정과 아쉬움을 붙듭니다. 떤 사람은 지나간 상처와 후회를 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달랐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약속”을 붙듭니다. 요셉에게 말합니다. “나를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을 남기고 떠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상처를 남기고, 어떤 사람은 비교와 조급함을 남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됩니다. 재산은 남겨도 마음까지 지켜 주지는 못하고, 스펙은 물려줘도 인생의 방향까지 책임져 주지는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
우리는 보통 인생의 실패가 능력이 부족해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똑똑했으면, 조금 더 돈이 있었으면, 조금 더 좋은 환경이었다면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은 죽기 전 아들들을 축복하며 그들의 미래를 말해 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재능”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다스리지 못했는지를 더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말하지 못할까?"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능력이 없을까?" "왜 내 삶에는 없는 것만 보일까?" 비교는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이 주신 것보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것에 머물게 만듭니다. 그런데 야곱이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단은 단대로, 갓은 갓대로, 아셀은
우리는 사람을 현재 모습으로 평가합니다. 취업을 못하면 실패한 것 같고, 사업이 어려워지면 뒤처진 것 같고, 관계가 꼬이면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잘 되면 괜찮은 성도 같고, 말씀이 잘 읽히면 믿음이 좋은 것 같고, 반대로 마음이 식어지면 내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현재의 상태
사실 사람은 연결보다 구분을 더 쉽게 합니다. 저 사람은 나와 달라. 저 사람은 내 편이 아니야. 나는 저 사람과 수준이 달라. 저 사람은 보수적이야. 저 사람은 진보적이야. 저 사람은 MBTI가 달라. 저 사람은 성향이 달라. 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어.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분류합니다. 이해하기보다 판단합니다. 품기보다 선을 긋습니다
우리는 보통 강한 것을 좋아합니다. 좋은 학벌, 좋은 직장, 높은 연봉, 많은 팔로워, 뛰어난 능력, 화려한 스펙.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더 강해져라." "더 똑똑해져라." "더 인정받아라." 그래야 안전하고, 그래야 행복하고, 그래야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이 흔들릴 때마다 하나님보다 먼저 능력을 찾고
우리는 살면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을 만납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결과가 기대와 다를 때가 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상처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유를 찾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우리는 이해해야 안심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영적 성숙을 오해합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 오래 교회를 다닌 것, 직분을 가진 것, 기도를 오래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영적 성숙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고린도전서 3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많았습니다. 지식도 많았습니다.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향해 "신령한 자"라고 부르지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갑니다. 가정도 공동체이고, 직장도 공동체이고, 교회도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공동체가 무너질 때를 자세히 보면 대부분 큰 죄 하나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할 때, 문제를 문제라고 인정하지 못할 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할 때, 공동체는 서서히 병들어 갑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도 바로 그것이었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틀린 게 아닌데."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하지?" "이번에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해." 그래서 관계보다 옳음을 선택하고, 사람보다 승리를 선택하고, 화해보다 판결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세상의 법과 정의는 필요합니다. 악을 방치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합니다. 누가 간섭하는 것도 싫고, 누가 내 삶을 평가하는 것도 싫고,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늘 말합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다." "내 몸은 내 것이다." "내가 행복하면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를 외치는데,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합니다. 원하
청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의외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사실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실패하고 싶지 않아요." "잘못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요."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아요." 우리는 사랑을 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상처를 피하고 싶은 경우가
우리는 늘 무언가를 더 얻어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결혼을 하면, 집을 사면, 시험에 합격하면, 사업이 안정되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취업 전에는 취업이 걱정이고, 취업 후에는 성과가 걱정입니다. 결혼 전에는 결혼이 걱정이고, 결혼 후에는 가정이
월요일 아침이 되면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합니다. 학생은 시험과 과제를 향해 달리고, 직장인은 업무와 성과를 향해 달리고, 사업가는 매출과 계약을 향해 달리고, 누군가는 결혼을 위해, 누군가는 취업을 위해, 누군가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달립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달리는가"보다 "얼마나 열심히 달리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지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무엇을 먹을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콘텐츠를 볼지, 무엇을 좋아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내 인생인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되지." 하지만 자유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더 자주 묻습니다. "이 선택이 정말 괜찮은 걸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우리는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인지 끊임없이 비교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직장에서는 성과로, 학교에서는 성적으로, SNS에서는 팔로워 수와 관심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관계마저 경쟁이 됩니다. 누가 더 인정받는지,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지, 누가 더 주목받는지를 끊임없이 따집니다. 하지만 바울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더 위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 많이 먹고,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이상하게도 함께 먹는 법은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갑니다. 식당에 가면 각자 휴대폰을 바라보며 밥을 먹고, 가족이 한 식탁에 앉아 있어도 서로의 하루를 묻지 않습니다. 회사에서는 함께 커피를 마시지만 경쟁하고, SNS에서는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마음을 나눌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배부른 시대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검색창을 열고,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과 영상을 추천합니다. 성경 공부 자료도 넘쳐납니다. 설교를 듣고, 신학 강의를 보고, 묵상 콘텐츠를 소비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아는 것은 많아졌는데, 삶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정보는 넘치는데 확신은 부족하고, 연결은 많아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출근길 단체 채팅방에 남기는 한마디, 회의 시간에 던지는 의견, 가족과 나누는 대화, SNS에 남기는 댓글까지. 하루에도 수백 번 말을 하고 수천 개의 메시지를 읽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은 소통의 수단은 많아졌지만, 이해받는 경험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상대방이
우리는 보통 은사라고 하면 특별한 능력을 떠올립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 리더십이 있는 사람, 기도를 오래 하는 사람, 영적인 체험이 많은 사람을 보며 은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 은사가 공동체를 세우고 있는가?"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없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은사가 너무 많은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새로운 정보, 새로운 책, 새로운 영상, 새로운 사람. 그래서 신앙도 종종 "새로운 깨달음"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아주 이상한 말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하노니"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다시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생각보다 무지해서 무너지는 존재
우리는 생각보다 오늘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달 월급, 이번 시험, 이번 프로젝트, 이번 관계, 이번 실패. 눈앞의 현실이 너무 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약속은 자꾸 작아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만 버티면 된다." "당장 손해를 보면 안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다." 바울은 바로 그 생각을 뒤흔듭니다. "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마음은 이미 지쳐 있습니다. 밀린 업무를 생각하고, 해결되지 않은 관계를 떠올리고, 반복되는 하루를 계산합니다. 분명 살아가고는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생명을 누리며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하루를 버티고 있는 걸까?" 우리는 생각보다 '죽음'을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월요일 아침이 되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흩어집니다. 회의가 기다리고, 밀린 업무가 쌓여 있고, 풀어야 할 문제들이 우리를 먼저 맞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월요일을 '해야 할 일이 많은 날'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연보를 말하고, 동역자를 말하고, 방문 계획을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행정 이야기 같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할 때 대부분 계획을 세웁니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루가 끝날 무렵 우리의 마음을 가장 많이 지치게 한 것은 '일의 양'이 아니라 마음이 향했던 방향인 경우가 많습니다. 출근길에 들은 한마디. 휴대폰으로 본 글 하나. 비교하게 만든 SNS. 서운했던 말
출근 준비를 하며 휴대폰을 듭니다. 말씀을 먼저 읽었는데도,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있습니다. 읽지 않은 메시지, 밀린 업무, 오늘 해결해야 할 문제들…. 우리의 시선은 너무 쉽게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어쩌면 우리는 말씀을 몰라서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씀보다 더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계획을 세웁니다. 오늘 해야 할 일, 앞으로의 진로, 가정의 미래, 사업의 방향, 관계의 선택까지. 계획이 많아서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 불안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 붙잡으려 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미래도, 결과도,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시편 2편은 이
아침은 당연하게 찾아오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알람이 우리를 깨운다고 생각하지만, 다윗은 다르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셨다." 이 고백은 단순히 잠을 잘 잤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편 3편은 가장 평안한 밤에 기록된 시가 아니라, 가장 불안한 밤에 기록된 시입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고, 가까운 사람들이 등을 돌렸고, 사람들은 "이제 하
월요일 아침이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번 주를 계산합니다. 이번 주에 처리해야 할 업무, 다가오는 회의, 끝나지 않은 프로젝트, 취업을 위한 면접, 발표를 앞둔 대학원 과제, 매출과 계약을 걱정하는 사업의 현실…. 우리의 기도도 어느새 비슷해집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 주만 잘 넘기게 해 주세요." "이 일만 끝나면 편안해질 것
출근길, 학교, 직장, 가정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은 힘든 일보다 오해받는 일입니다. 열심히 했는데 인정받지 못할 때, 사실이 아닌 말이 더 빨리 퍼질 때, 정직하게 일한 사람이 손해 보고, 편법을 쓴 사람이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두 가지 유혹을 받습니다. '나도 똑같이 해야 하나?' '어차피 정직하게 살아도 소용없는
출근길에는 휴대폰을 보고, 회의에서는 일정표를 보고, 하루를 마칠 때는 해야 할 일들을 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무언가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입니다. 다윗은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지만 그는 별의 개수를 세지 않습니다. 별을 만든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오늘도 우리
우리는 생각보다 결과보다 속도를 더 믿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살아도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보고, 성실한 사람보다 요령 있는 사람이 더 빨리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 마음에는 같은 질문이 찾아옵니다. "정말 하나님은 일하고 계신 걸까?" 시편 9편도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놀랍게도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
우리는 흔히 악을 거창하게 생각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이고, 법을 어기는 것만 악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시편 10편이 보여 주는 악의 시작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대놓고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힘과 계산을 더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속 악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우리는 월요일 아침만 되면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밀린 업무, 해결되지 않은 관계, 이번 주 안에 끝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웁니다. 학생은 과제와 시험을 생각하고, 직장인은 회의와 실적을 떠올립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계약과 매출을 걱정하고, 누군가는 또 한 주를 버텨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종종 이렇게 시
출근길에 누군가 “요즘 어떠세요?”라고 물으면 우리는 습관처럼 대답합니다. “괜찮아요.” 사실은 괜찮지 않은데도 그렇습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있어도, 마음 한편이 무너지고 있어도 우리는 쉽게 속내를 꺼내지 않습니다. 괜히 약해 보일까 봐, 부족해 보일까 봐,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냥 “괜찮다”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직장인들은 안정을 원하지만, 회사는 안정 대신 성과를 요구합니다. 청년들은 미래를 준비하지만, 준비할수록 오히려 더 불안해집니다. 열심히 살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막상 하나를 이루면 또 다른 걱정이 찾아옵니다. 취업을 하면 이직을 고민하고, 결혼을 하면 가정을 걱정하고, 자리를 잡으면 뒤처질까 두려워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분명 예전보다 많은 것을 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평소처럼 돌아갈 때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알람 소리에 일어나고, 급히 씻고 집을 나섭니다. 출근길 지하철은 여전히 붐비고, 학교와 회사에서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습니다. 하루 종일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이 되면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옵니다. 문제는 이런 일상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잘 살아
월요일 아침이 되면 우리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확인합니다. 밀린 연락을 정리하고, 일정을 점검하며, 이번 주에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결과를 생각합니다. 하루를 잘 시작한다는 것은 대개 더 많이 준비하고, 더 빠르게 움직이며, 실수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포도원의 크기나 울타리의 높이를 보지 않으십니다. 땅을 얼마나 정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부족한 것부터 확인합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연락,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사람, 노력한 만큼 따라오지 않는 결과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을 향한 마음도 어느새 계산적으로 변합니다. “하나님, 이것까지 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만큼 기도했는데, 왜 아직 그대로입니까?”
수요일쯤 되면 마음에도 피로가 쌓입니다. 월요일에는 분명 불편하게 느껴졌던 일도, 며칠이 지나면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을 날카롭게 해 놓고도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그래”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도 “내가 사람을 좀 정확히 보는 편이야”라고 여깁니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도 “더 효율적인 때를 기다리는 중이야”라고 설명
우리는 삶이 무너질 때보다, 나를 지탱하던 것이 사라질 때 더 크게 흔들립니다. 늘 곁에 있을 것 같았던 사람이 떠나고, 안정적이라 믿었던 일에 문제가 생기고, 계획대로 진행되던 일이 갑자기 멈추면 마음속에서는 현실보다 더 큰 문장이 만들어집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이것마저 무너지면 정말 끝인데….” “앞으로는 전부 잘못될 것 같아.” 사람은 현재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도 매일같이 거대한 연합군이 몰려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 불황과 물가 상승, 언제 내 자리를 위협할지 모르는 AI와 기술의 급변,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등입니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위협적인 뉴스들은 우리의 마음을 "숲이 바람에 흔들리듯" 요동치게 만듭니다.
사람은 무언가 무너지면 본능적으로 복구부터 생각합니다. 업무에서 실수하면 더 촘촘한 계획표를 만들고, 관계가 틀어지면 더 적절한 말을 준비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지출을 줄이고 수입을 늘릴 방법을 찾으며, 신앙이 메말랐다고 느끼면 새로운 책이나 강의를 찾아봅니다. 물론 이런 노력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 몰두한 나머지,
화요일쯤 되면 한 주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미뤄 두었던 일을 처리하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수습하며, 사람들의 요구에 대응합니다. 그렇게 하루를 버티다 보면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올라옵니다. ‘결국 내가 정신 차려야 일이 돌아간다.’ ‘내가 아니었으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판단을 잘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오늘
사람은 자신을 아프게 한 것보다, 그것이 언젠가는 자신을 살려 줄 것이라는 기대에서 더 오래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를 소진시킨 직장을 미워하면서도 그 직장에서 인정받아야 비로소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마음을 함부로 대했던 사람에게 실망하면서도 그 사람이 언젠가 나의 진심을 알아주면 지금까지 받은 상처가 모두 취소될 것처럼 기다립니다.
불안할수록 사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더 강하게 붙듭니다. 계획을 더 촘촘하게 세우고,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며,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삶이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통제하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쉽게 지칩니다. 모든 일이 내가 예상한 대로 움직여야 안심할 수 있고, 작은 변수 하나에도 평
7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달을 마무리할 때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삶을 결산합니다. 계획했던 일을 얼마나 이루었는지, 관계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기도한 문제는 해결되었는지 돌아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한 달 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보다 가장 마음 아팠던 한 장면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번의 실수로 “나는 역시 안 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우리는 마음속에 하나의 조건을 정해 놓고 살아갑니다.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검사 결과만 괜찮으면 더는 걱정하지 않을 거야.” “이 사람과의 문제만 해결되면 다시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경제적인 형편만 조금 나아지면 하나님도 더 잘 섬길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막상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평안이 찾아오기보다 다른 걱정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방향보다 속도를 먼저 높입니다. 관계가 흔들리면 더 많은 말을 쏟아 내고, 일이 불안해지면 더 촘촘한 계획을 세우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당장의 손해를 피할 방법부터 찾습니다. 교회와 사역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사람의 반응과 숫자를 확인하며 마음을 붙듭니다. 가만히 있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 빨
사람은 불안할수록 누군가의 손을 잡습니다. 문제는 손을 잡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손에 구원자의 역할까지 맡기는 것입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위협 앞에서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혼자서는 불안했지만 둘이 힘을 합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함께 강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메섹은 무너진 성읍이
앗수르의 위협이 가까워지자 유다는 구스와 애굽을 바라보았습니다. 두 나라는 강하고 풍요로웠으며, 사람도 자원도 많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조건만 놓고 보면 의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우리도 불안해지면 비슷해집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만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초조해집니다. 그래서 통장의 잔고, 영향력 있는 사
사람은 잘못한 사실보다 잘못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더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기보다 감추고, 마음이 무너지면 도움을 구하기보다 괜찮은 척합니다. 직장에서는 능력 있는 사람처럼, 가정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교회에서는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 합니다.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은 실제 힘보다 때로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일만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처럼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사업이 어려워진 사람은 장사가 잘되던 때를 생각하고, 관계가 틀어진 사람은 아무 일 없었던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몸이 아프면 건강했던 일상이 얼마나 귀했는지 뒤늦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회복을 종종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계속될 것’이라는 전제 위에 놓고 살아갑니다. 직장이 내년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지금의 관계가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고, 건강도 어느 정도는 유지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통장에 있는 돈, 내가 쌓은 경력, 사람들에게 얻은 신뢰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불안할수록 사람은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안전장치를 더
오늘 본문은 조금 이상합니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을 노래합니다.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그런데 그 찬양을 듣던 이사야는 갑자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찬양을 들었으면 힘이 나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믿고 있다면 조금 더 담대해야 할 것 같은데, 이사야
제목 : 더 이상 나를 증명하며 살지 않아도 됩니다 본문 | 고린도후서 5장 14–21절 개역개정 14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불안해지면 사람은 가만히 있기가 어렵습니다. 무언가를 알아봐야 하고, 누구에게라도 물어봐야 하고, 빨리 결론을 내려야 마음이 조금 놓입니다. 취업이 막히면 채용 사이트를 계속 새로고침하고, 돈이 부족하면 머릿속으로 몇 달 뒤까지 계산하고, 관계가 흔들리면 상대의 말 한마디를 계속 해석합니다. 자녀의 문제가 생기면 가장 좋은 방법부터 찾고, 사업과 사역이 뜻
금요일 아침이 되면 묘한 마음이 듭니다. 한 주를 꽤 열심히 살았는데도 끝내지 못한 일들이 더 먼저 보입니다. 답을 기다리는 연락, 해결되지 않은 관계, 진전이 없는 일, 여전히 같은 기도제목. 그래서 우리는 자꾸 ‘아직’이라는 시간을 실패처럼 해석합니다. “왜 아직도 이렇지?” “왜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지?” 그런데 오늘 본문은 기다림에 대해
월요일 아침이 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번 주를 안전하게 만들고 싶어집니다. 일정을 정리하고, 해야 할 일을 계산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예상합니다.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일이 있으면 마음은 금세 분주해집니다. “이 일이 잘 풀릴까?” “이번 주에는 별일 없겠지?” “내가 준비한 대로 흘러가야 하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실 좋은 결과만이 아니라 ‘흔들리지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이사야 34:16 화요일쯤 되면 현실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월요일의 다짐보다 이번 주에 실제로 감당해야 할 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밀려 있는 업무, 예상하지 못한 연락, 사람의 평가와 말 한마디,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일정과 관계. 그래서 우리는 자꾸 눈앞에서 가장 힘
수요일쯤 되면 마음이 조금 정직해집니다. 월요일에는 새롭게 시작할 힘이 있었고, 금요일에는 끝이 보인다는 기대가 있지만, 수요일에는 지금 내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가 보입니다.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남아 있고, 기다리던 소식은 오지 않고, 노력한 만큼 달라진 것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상하리만큼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판단합니다. 열매가
이사야 36:1–22 랍사게의 말이 무서운 이유는 모든 말이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실제로 약했고, 앗수르는 실제로 강했습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이렇게 찾아옵니다. 사실 하나를 붙잡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결론까지 만들어 냅니다. “지금 형편이 어렵다.” 그래서 “앞으로도 안 될 것이다.” “내 힘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도울 수
“히스기야가 사자들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것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이사야 37:14 금요일이 되면 한 주의 일들이 조금씩 판결문처럼 읽힐 때가 있습니다. 이번 주에도 해결하지 못한 일, 기대만큼 나오지 않은 결과, 사람에게 들었던 말,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나 자신. 산헤립의 편지에도 거짓말만 적혀 있지는 않았습니다. 앗수르
비가 많이 오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길은 평소보다 더디고, 마음은 평소보다 먼저 서두릅니다. 이런 날에는 무엇을 이루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느냐가 더 중요할지 모릅니다. 이사야 39장의 히스기야는 뜻밖의 자리에서 무너집니다. 병들었을 때가 아닙니다. 병에서 나은 뒤였습니다. 죽음을 앞두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회복되고,
사사기는 뜻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한 시대를 이끌던 지도자가 사라졌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불분명합니다. 그때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전략회의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삿 1:1)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이 한 문장이 중요한 이유는 사사기의 마지막 문장과
사사기 1장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버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부정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한 군데에서 멈추었습니다. “여기는 철 병거가 있으니까.”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런데 신앙은 의외로 큰 결심보다 이런 작은 예외들에서 방향이 달라집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싫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많
사람은 한 번 크게 무너져서 자기 자리를 잃기보다 조금씩 밀리면서 자리를 내어줍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기도가 밀리고, 사람들의 요구가 커지면 내 마음은 뒤로 밀리고, 계속되는 현실에 치이다 보면 어느 순간 중요한 것이 가장자리로 가 있습니다. 단 지파도 그랬습니다. 아모리 사람들이 그들을 산지로 몰아넣었고 평지로 내려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문제는 산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원인을 계산합니다. 시간이 부족했는지, 사람이 문제였는지, 계획이 허술했는지 따져 봅니다. 그런데 사사기 2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보고 있던 문제와 전혀 다른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의 실패를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을 보셨습니다. 사람은 결과를 보고 원인을 찾지만, 하나님은 방향을 보고 결과를
월요일이 되면 다시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잘해야 하고, 더 버텨야 하고, 더 많은 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3장은 묻습니다. 정말 문제는 내가 약한 것일까요? 이스라엘은 강한 에글론에게 열여덟 해 동안 눌려 살았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에글론이 강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이 작아진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사사기 4장은 불편한 한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또.’ 우리도 이 단어가 싫습니다. 또 화를 냈습니다. 또 미뤘습니다. 또 같은 생각에 붙잡혔습니다. 또 하나님보다 현실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한두 번의 실패보다 반복되는 실패가 사람을 더 절망하게 합니다. “나는 왜 아직도 이럴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시스라는 전쟁에서 패하자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으로 달려갑니다. 야엘의 장막이었습니다. 야빈과 헤벨의 집 사이에는 평화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시스라는 그곳만큼은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곳에서 그의 인생이 끝납니다. 사람은 위기가 오면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마음이 불
“르우벤 자손 가운데 마음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 어찌하여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듣는가” 르우벤에게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오히려 그들에게 “큰 결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고민도 깊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여전히 양의 우리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꽤 불편합니다. 우리도 무엇이 옳
금요일이 되면 우리는 자꾸 한 주의 결과를 확인합니다. 잘된 일은 무엇인지, 끝내지 못한 일은 무엇인지, 내가 기대했던 것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셈합니다. 사사기 5장에는 서로 다른 두 여인의 기다림이 나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이 왜 돌아오지 않는지 불안해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안심시킵니다. “아마 전리품을 나누느라 늦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
월요일이 되면 우리는 한 주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고 싶습니다. 이 일이 잘될지, 내 선택이 맞는지, 조금만 더 분명해지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드온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계속 표징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가장 먼저 하신 일은 확신을 더 주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게 하셨습니다. 기드온
보통 일이 잘 안 풀리면 자원을 더 투입합니다. 사람이 부족하면 사람을 더 뽑고, 돈이 부족하면 예산을 늘리고, 불안하면 정보를 더 모읍니다. 이과적으로 말하면 성공 확률을 높이려면 유효한 변수를 추가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 7장의 하나님은 이상합니다. 전쟁을 앞두고 군사를 늘리시는 것이 아니라 줄이십니다. 32,000명에서 10,000명. 그리고 다시
기드온은 적진에서 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미디안 병사의 꿈 속에서 작은 보리떡 하나가 장막을 무너뜨립니다. 그 말을 들은 기드온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작전을 세우는 것도, 사람들을 모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배했습니다. 아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미디안은 여전히 강했고, 기드온에게는 300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고 나니 같은
기드온은 참 묘합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거칠게 따질 때는 자신을 낮추며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냅니다. 그런데 조금 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자신을 돕지 않자 그는 분노합니다. 그리고 결국 세바와 살문나 앞에서는 형제의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까지 드러냅니다.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지혜가 나오고, 어떤 순간에는 상처가 나옵니다. 우리도
기드온은 왕이 되라는 제안을 거절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정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후의 삶은 묘합니다. 금 귀고리를 받고, 왕이 입던 옷과 장식을 취하고, 많은 아내와 칠십 명의 아들을 두고,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 ‘내 아버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를 좋아해서 함께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필요해서 손을 잡았습니다. 아비멜렉은 왕이 되기 위해 세겜이 필요했고, 세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비멜렉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관계는 쉽게 시작됐고, 더 쉽게 무너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관계에도 이런 마음이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나를 인정해 주어서, 내 편이 되어
아비멜렉은 죽음을 앞두고도 자신의 죄보다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걱정했습니다. 맷돌에 맞아 치명상을 입은 순간에도 그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여자가 그를 죽였다”는 말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무너지는 순간에도 체면을 붙들 수 있습니다. 마음은 이미 지쳤는데 괜찮은 척하고, 관계는 틀어졌는데 아무 일 없는 척하고, 잘못을 인정하기
우리는 힘들어지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내가 원하는 삶으로 돌아가고, 불편해지면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하십시오.” 이 말은 체념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
마노아의 아내에게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녀가 가장 가능성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도 종종 희망이 생겨야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가능성이 보여야 다시 힘을 냅니다. 하지만 성경의 소망은 반대입니다. 가능성이 있어서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
마노아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자신의 이름을 ‘기묘’, 곧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크기 안에 넣으려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언제 끝나는지,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마음을
삼손은 보고, 마음에 들었고,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처럼 밀어붙였습니다. 우리도 종종 그렇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마음의 크기를 하나님의 뜻의 크기로 착각합니다. 일이 풀리기까지 하면 더 쉽게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으니까 된 것 아닐까?” 그러나 오늘 본문은 조금 불편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우
우리는 자주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보이면 움츠러들고, 실패하면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반대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만 골라 쓰시는 분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을 붙드시고 그 부족함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삼손은 강했지만 성숙하지 못했고,
삼손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문 문짝을 뽑아 산 위까지 메고 갈 만큼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적을 이길 힘은 있었지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힘은 없었습니다. 가사에서는 기생을 찾아가고, 이후에는 들릴라를 사랑합니다. 들릴라가 자신의 힘의 비밀을 집요하게 캐묻는데도 삼손은 그 관계에서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삼손의
사람은 무엇인가를 사랑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무엇인가에 자기 존재를 걸고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금으로 만든 신상 앞에 절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주 평범한 것들에 마음을 걸고 살아갑니다. 오늘 누군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카톡에 왜 답이 늦는지, 내가 한 말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번 일에
사사기 19장은 아주 불편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이 말은 단순히 정치적으로 왕이 없었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던 시대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왕이 사라진 삶의 문제는 단지 예배를 덜 드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마음에서 밀려나면, 결국
우리는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름의 기대를 품습니다. 오늘은 별다른 문제가 없기를, 만나는 사람들이 친절하기를, 계획한 일들이 무리 없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루는 기대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뜻밖의 오해를 낳기도 하고, 옳다고 생각한 선택이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레위인도
월요일 아침이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지난주에 끝내지 못한 일도 있고, 이번 주에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들었던 불편한 말 한마디가 주말을 지나서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자꾸 떠올리게 되고,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혼자 되풀이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수록 멈추기가
우리는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입니다. 이미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큰소리쳤다는 이유로, 이제 와서 잘못을 인정하면 그동안의 수고가 모두 헛수고가 될 것 같아 쉽게 돌아서지 못합니다. 직장에서는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기보다 그 판단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고, 관계에
살다 보면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길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걱정해서 건넨 말이 부담이 되고, 도움이 되고 싶어서 나선 일이 오히려 상대의 선택을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을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마음
야고보는 시험을 만났을 때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고통스러운 일이 어떻게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야고보는 시험 자체가 기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통해 믿음의 인내가 만들어지고, 그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게 한다고 말합니다(2–4절).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면 자신도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
우리는 힘든 일을 겪을 때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조금만 더 버텨 보자.” 그런데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 마음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상황을 견디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원망하고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남들은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 조급해지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를 더 지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