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지난주에 이어 아브람의 이야기를 보고자 합니다. 아브람의 신앙의 여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상황만 보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브람은 자기의 계산으로 자기 안전을 확보하려 했지만, 아내 사래를 빼앗길 뻔 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람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를 건져 내셨고, 그가 망쳐 놓은 자리에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네게브는 가나안 남부 지역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그는 망한 채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부하게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가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잘하면 무엇인가를 얻고, 잘못하면 무엇인가를 잃는 이런 흐름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고, 실패하면 대가를 치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인과응보’의 구조로 이해하는 데 익숙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구조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내가 잘하면 괜찮을 거고, 내가 잘못하면 손해를 보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3장은 그 익숙한 구조를 깨버립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여기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잘못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보다 더 큰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잘못된 선택조차 하나님의 손 안에서는 결론이 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아브람이 받은 은혜가 우리가 받은 은혜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올바른 삶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성취가 우리의 실력만으로 설명이 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선택과 관계를 망치는 죄들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만큼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인생을 너무 간단하게 해석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설명되지 않는 보호가 있었고, 설명되지 않는 만남이 있었고, 설명되지 않는 타이밍이 있었고, 설명되지 않는 회복이 있었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사건들이 우리 인생 곳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감사의 재료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욕심의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예배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자기 존재를 부풀리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전환문장
오늘 본문은 은혜를 받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아브람과 롯이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부유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로 인해 서로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떨어지게 되어,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되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왜 같은 은혜를 받았지만,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그 갈림길에서 아브람과 롯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했을까요? 오늘 저는 아브람과 롯의 선택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먼저,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람과 롯은 모두 부유해졌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평안이 아니라 갈등이 시작됩니다. 역설적이기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7절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아브람과 롯이 함께 가난할 때는 그냥 버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풍족지니까 그들 안에 진짜 중심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부유해 졌을 때, 그들안에 숨어 있던 욕망과 두려움, 자기중심성이 표면으로 올라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주신 부유함이 그들에게 갈등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소와 양과 같은 가축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양이 많으면 땅이 필요하고, 소가 많으면 물이 필요하고, 종이 많으면 관리가 필요합니다. 부유해질수록 더 넓은 공간과 더 많은 자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과 롯이 함께 부유해졌다는 것은 단순히 “좋아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함께 갈등할 조건도 함께 커졌다는 뜻입니다.
7절에 보니까 같은 땅에 가나안 사람도 있었고, 브리스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같은 공간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람과 그들 사이의 충돌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유독,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서만 갈등이 반복됩니다. 이건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땅이 부족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관계가 이미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싸운 것입니다.
본문은 자세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암시합니다.
롯과 아브람의 내면에 서로에 대한 섭섭함, 불만, 긴장, 비교의식이 있었을 가능성입니다. 먼저 롯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롯은 지금까지 아브람을 따라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부유해진 것도 아브람 덕분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도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거느리게 되고, 영향력이 생겼습니다. 그 때, 마음에 미묘한 비교와 갈등의 조짐이 스멀스멀 올라 오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은 어떠했을까요? 지금까지 누가 롯을 데리고 다녔습니까? 아브람입니다. 누가 이 여정을 시작했습니까? 아브람입니다. 롯이 여기까지 온 것도, 롯이 부유해진 것도, 결국은 아브람 때문입니다. 갈등이 일어나는 것 자체에 아브람은 불편해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누가 더 차지할 것인가, 누가 먼저 선택할 것인가, 누가 더 유리한 자리를 가질 것인가, 누가 더 크게 될 것인가!!
이런 긴장과 갈등사이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요의 은혜가 자동적으로 감사하고 양보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풍요는 그들 마음 안에 이미 있던 욕망을 증폭시켰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가 비교의 재료로 쓰였고, 자기 확장의 도구로 만들었고, 자아를 부풀리는 근거로 사용한 것입니다. 문제는 은혜로 주신 부유함이 아니라 부유함을 다루는 아브람과 롯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은혜는 은혜로 남아있지 않고, 은혜를 받은 우리의 마음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신 은혜는 자동적으로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해도, 타락한 인간은 그것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착각의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람과 롯에게 주어진 풍요는 하나님의 호의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내면을 드러내는 시험의 장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고, 관계를 주시고, 직업을 주시고 돈을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영향력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 자체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 그 사람을 더 하나님께 엎드리게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자기 교만의 수단이 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와 복은 그 자체로 완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부요함은 우리의 진짜 마음의 방향을 드러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구하고, 복을 구하는 우리의 간구를 잘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로 요구합니다. 길을 열어 달라고, 관계를 회복시켜 달라고, 재정을 채워 달라고, 좋은 기회를 달라고, 사역의 열매를 달라고, 건강을 달라고, 평안을 달라고 이 모든 간구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하고, 성경적이며,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간구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무엇을 받을 것인가”는 진지하게 구하지만, “그것을 받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는 거의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구할 때 은혜의 내용은 고민하지만, 은혜를 사용할 우리의 마음은 잘 고민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것을 받으면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갈 것인지, 아니면 이것을 붙들고 하나님 없이도 괜찮아질 것인지, 그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람과 롯에게 주신 부유함은 단순히 “복을 받았다”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해부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장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서도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시고 훈련시키십니다.
아브람과 롯의 갈등으로 인해 그들은 더이상 같이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떠나야 했습니다. 갈등이 더욱 폭팔하기 전에 반드시 해결책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긴장 속에서 아브람은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아브람은 더이상 싸우기 싫었습니다. 다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람은 룻과 그의 식솔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9절입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은 당시 문화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제안입니다. 고대 사회는 연장자 중심 사회였습니다. 게다가 이 여정 전체를 주도해 온 사람은 아브람입니다.
롯이 여기까지 온 것도 아브람 덕분이고, 롯이 부유해진 것도 아브람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나는 이쪽을 택하겠다. 너는 저쪽으로 가라.” 이렇게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훨씬 자연스럽고 사회적으로도 정당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먼저 고르게 했습니다.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넘깁니다.
여기서부터, 아브람과 롯, 롯과 아브람은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서로 다른 길로 가게 되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롯은 어떤 땅을 선택했을까요? 왜 그 땅을 선택했을까요?
먼저 롯은 땅을 먼저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롯은 기뻤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어디로 가야 할 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땅은 물이 넉넉했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애굽 땅 같다는 표현은 나일강이 흐르는 애굽처럼 환경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곳처럼 보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롯이 본 것은 한마디로 “더 잘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더 부유해질 수 있는 곳, 더 안정될 수 있는 곳, 더 성공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롯은 “여호와의 동산 같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지리적 설명이 아닙니다. 신학적인 표현이고, 의도된 문장입니다. 여호와의 동산은 에덴을 뜻합니다. 에덴은 어떤 곳입니까? 이상적인 곳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불안이 없는 곳입니다.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리입니다.
롯은 마치 요단 평야가 ‘에덴처럼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내가 더이상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 느낌. 저기로 가면 나도 이제 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가능성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롯은 단순히 좋은 땅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땅에서 자기 삶의 안정과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왜 이게 잘못입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하는 저도 여기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꼭 나쁜 길을 택해서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좋아 보이는 길에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틀린 선택이 아니라, 너무 맞는 선택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어떻습니까? 아브람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롯에게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제안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땅을 확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잡으려 하지 않았고, 먼저 차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성경은 아브람이 “어디를 선택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롯은 눈을 들어 보고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이 보여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아브람은 땅을 고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의 방향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보라.”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눈을 들어 보라고 한 땅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리 좋은 땅이 아닙니다. 변수가 많은 땅입니다. 안전성이 확보 된 땅이 아닙니다.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성경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신명기 11장 11절과 12절입니다.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가나안 땅은 비를 잘 흡수땅입니다. 그런데, 오직 비가 내려야 좋은 땅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비를 내려 주셔야지만 좋은 땅이 유지될 수 있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면 좋은 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으면 황무지가 되는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하는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한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믿어야만 좋은 땅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땅입니다. 이른비와 늦은비를 내려주신다는 믿음의 눈으로 봐야만 젓과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미 좋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앞으로 좋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어야 펼쳐지는 땅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주어진 땅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비가 내려 촉촉한 땅도 아닙니다. 아브람에게 주겠다는 미래입니다. 약속입니다. 불확실성이 큽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두려움과 공포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미래의 약속을 좋게 받아 들이는 것 같지만, 사실, 매우 불안해 하고, 매우 공포스럽게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깊이 관계 맺지 않아도 그냥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안전장치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뜻하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 하나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흔들립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 관계를 선택할 때, 미래를 결정할 때, 기도도 하고, 하나님 뜻도 묻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보다 조건이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자신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했습니다.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은 드러난 약속이 아니라, 드러낼 약속입니다. 문제는 이 약속이 우리에게는 충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다른 안전장치를 찾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두 사람의 선택이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마음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롯의 선택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롯의 선택은 눈에 보이는 안정과 유리함을 붙드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현실적이고, 충분히 합리적이고, 충분히 이해 가능한 선택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아브람의 선택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의 선택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쪽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길에도 염려가 있고, 불안이 있고, 공포심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보장을 내려놓고 보이지 않는 약속을 붙든다는 것은, 말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우리 안에는 롯도 있고, 아브람도 있습니다. 안정을 붙들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3장은 단순히 롯과 아브람을 비교해 평가하는 본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두 방향을 드러내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결 론
이렇게 아브람의 마음과 롯의 마음, 두 마음을 다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창세기 13장은 새로운 시각을 열어줍니다. 지난 주 설교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굳이 아브람과 롯을 비교하지 않아도 아브람은 이미 롯의 마음을 이해할 만큼 롯과 같은 선택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람이 창세기 13장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는 보여지는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갔던 아브람이, 창세기 13장에서는 보여지는 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서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가지고 창세기 12장과 13장을 비교해서 읽어 보면 분명히 알려주는 행동 하나가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우리에게 두 번이나 반복해서 보여주므로 그것을 주목하게 합니다. 창세기 13장에는 창세기 12장에 없는 특이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제단을 쌓는 아브람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아브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처음으로 벧엘과 아이사이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있는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시한 번 헤브론에서 제단을 쌓는 아브람을 보여줍니다. 18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창세기 기자는 아브람과 롯의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제단 쌓는 아브람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이 눈에 보이는 더 유리한 선택, 더 좋은 조건, 더 안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몰려오는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마음의 중심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지 제단을 쌓는 아브람을 통해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상태에서 선택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인생이 예배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기자가 예배하는 아브람의 모습을 비춰주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문제와 상황과 환경의 크기는 내 안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고백하는 하나님과 현실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크기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배 때는 하나님이 크지만, 현실 앞에서는 작아집니다. 유혹 앞에서는 더 작아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문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 안에서 무엇이 더 큰가입니다.
사람이 커지면 하나님은 작아지고, 하나님이 커지면 사람은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크게 보이게 하는 제단을 쌓는 아브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배는 단순히 종교적 의식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더 선명하게, 더 깊이, 더 크게 알게 해주는 의식입니다. 예배가 살아 있는 사람은 선택을 다르게 합니다. 조건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절대화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전부라고 믿지 않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예배하느냐의 문제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예배하는 것을 중심으로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예배하면 모든 선택이 돈 중심으로 정렬됩니다. 안정감을 예배하면 모든 선택이 안전을 향해 기울어집니다. 인정과 성공을 예배하면 그 기준이 모든 판단을 지배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예배하고 있는 대상이 선택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선택을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더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더 기도하고 결정하라는 수준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를 예배하고 있는가. 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더 나은 선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시 하나님으로 여기는 예배하는 자리로 돌아가, 나의 고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더 안정적인 길을 찾습니다. 나를 지켜 줄 것을 붙듭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게 했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오면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예전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이 나의 안전이라고 아는데, 몸은 여전히 다른 것을 붙듭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충분하다고 고백하는데, 마음은 계속 다른 것을 더 찾습니다. 믿음은 바뀌었는데, 반응은 아직 바뀌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 관성과 계속해서 싸우고 씨름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싸울까요? 예배로 싸웁니다.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을 더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열심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이라면, 십자가를 바라보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끝까지 붙드신 분이 누구인지를 보여 줍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이 다시 가장 크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선택의 순간에 있습니까? 어떻게 지혜로운 선택인지 고민하고 있습니까? 간절히 주님을 사모하며 예배하십시오. 예배를 통해서 감춰져 있는 주님의 뜻이 아닌, 이미 드러난 주님의 뜻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정말 그렇게 해보십시오. 상황과 조건과 환경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의지해야 하는 쪽으로 정하게 될것입니다. 믿음이 사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일 것입니다. 정말 주님이 필요한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문제는 선택이 아닙니다. 예배입니다. 예배자로 사십시오. 예배의 자리를 귀하게 여기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매일의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 주님을 기뻐하는 길로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주님으로 부터 부어지는 놀라운 동행하심의 역사가 여러분과 우리 모두의 삶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