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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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과 불안 위에 세워지는 믿음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창세기 15장 1-9절 · 창세기 15장 17절펼치기
창세기 15장 1-9절

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8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창세기 15장 17절

17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개역개정

서 론

우리는 지금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된 이 여정은 한 사람의 위대한 신앙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서 치열하게 씨름하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보이는 현실에 따라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롯과 아브람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롯에게 땅을 고를 선택권을 주었던 아브람의 믿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조카 롯이 전쟁에 휘말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끌려갔다는 소식입니다.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이미 잘 정리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롯은 떠났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정리했다고 생각한 문제가 다시 돌아오고, 지나갔다고 여긴 일들이 다시 우리의 삶을 흔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우리의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잘 흘러가던 삶이 한순간에 방향을 바꾸기도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통제할 수 있는 삶을 원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름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불안합니다. 내가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도 그랬습니다. 아브람은 움직여야 했습니다. 자신의 사람들 300여 명을 이끌고 롯을 구하러 나갑니다. 그리고 이깁니다. 분명한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더욱 자신감이 충만해져야 하는데, 그는 두려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한 가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은 점점 흔들림이 사라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현실 앞에서 계속해서 마음이 반응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도 여전히 기분이 ‘불안’해 질 수 있고, 승리가 있고, 은혜가 있고, 주님이 하셨다는 확신이 들어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은혜의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은혜를 끝까지 확신하며 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브람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환문장

저는 오늘 여러분과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찾아온 의심과 두려움을 주제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 아브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경험했는데도 그 확신이 오래가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의심과 두려움이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의심과 불안 사이에 서 있는 아브람의 이야기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먼저, 아브람은 롯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둡니다. 작은 가문이 연합군을 무너뜨린 사건입니다.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승리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겼지만,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실패하면 두렵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우리는 성공 이후에도 더 깊은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승리는 안전을 가져온 승리가 아니라 더 큰 위험을 불러온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작은 가문입니다. 그런데 연합군을 건드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보복의 가능성입니다. 스스로 두려워했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원래 전쟁을 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양을 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쟁을 이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닙니다. 자기 그릇보다 큰 자리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어떤 프로젝트를 성공하거나, 좋은 결과를 맞이 하게 되면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환호합니다. 해낸 사람으로 축하해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하와 칭찬이 점점 두려움을 몰고 옵니다. 어느순간 “다음에도 내가 이렇게 승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계속 잘해야 하는 사람으로 나를 밀어 넣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이런 부담감이 밀려 오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이 구조를 더 강하게 만듭니다. 성과, 결과, 이력, 평판이 올라가면 갈수록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듭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순간은 단순한 실패다 아니라 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우승하기 전보다 우승한 이후가 더 힘듭니다. 정상에 올라가는 것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도전자가 아니라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두려움의 구조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잘 되어도 두렵고, 이겨도 두렵고, 인정받아도 두렵습니다.

자기 자랑이 두려운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자신이 그 다음 똑같은 상황이 와도, 결과를 낼 것이란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 뒤에는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의지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좋을텐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이런 은혜가 안올 것 같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 두려워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시 자기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은혜는 기쁨이 아니라 부담이 됩니다. “다음에도 이 은혜가 올까”이렇게 생각이 흘러갑니다. 역설적이게도 은혜는 어느순간 두려움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인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방패다, 내가 너의 상급이라’는 말씀도 아브람에게 주셨습니다. 위로와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소망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충격적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람은 두려워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의심했을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자신이 작은 가문이라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음에 이런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안들자,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이 두려움으로 크게 작동했습니다.

사실, 아브람은 롯을 구해내기 위해서 나아갔을 때, 한 가지 기대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롯이 돌아와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롯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포로가 되었고, 인생이 무너졌습니다. 이번에 구해주면 돌아오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문맥의 흐름을 보게 되면 아브람은 현실적인 생각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직 자식이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롯이 자신의 후계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아브람에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시 소돔으로 돌아갑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붙들고 있던 ‘현실적인 미래’가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에게는 큰 민족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이 아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을 주목해 보십시오. 은혜로 승리한 결과가 아브람에게 두려움을 가중시켰고,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현실적인 대안으로 롯을 생각했는데, 롯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롯이 돌아오지 않자, 이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서, 다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했습니다. 그가 바로 엘리에셀이었습니다. 3절입니다. “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이런 생각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의심이 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두려움은 대안을 마련하게 하지만, 대안을 마련하는 가운데, 감정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실망감이 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이해는 했지만, 감정은 그렇게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감정은 이성의 결론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해해서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느껴지는 것에 따라 흔들립니다. 아브람이 그랬습니다. 이성은 믿어집니다. 그런데 감정은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의사가 검사결과를 말합니다.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이 결과를 들으면 머리로는 괜찮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다른 생각이 올라옵니다. “혹시 다른 곳에 이상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이성은 이미 결론을 내렸는데 감정은 그 결론을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흔들립니다.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의심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정말 내 현실 뒤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감정이 흔들렸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의심이었습니다. 이렇게 감정이 따라가지 않는 이유는 어느순간 의심은 내가 그 약속에 적합한 존재인지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더 이상 “하나님이 하실까?”만 묻지 않습니다. 이제 이렇게 묻습니다. “나는 가능한가?” 내 나이, 내 몸, 지금까지 안 된 시간들, 눈앞의 상황이 점점 지금 같은 조건에서 정말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재해석합니다.

사람은 기대했던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자신의 상황을 더욱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도, 기다림이 길어지면 하나님의 약속 자체보다 지금까지 안 된 역사를 더 크게 해석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길을 여실 수는 있겠죠. 그런데 제 나이에 취업이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주실 수는 있겠죠. 그런데 저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바꾸실 수는 있겠죠. 그런데 저는 수없이 다짐했다가 또 무너진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이를 주실 수는 있겠죠. 그런데 제 몸, 우리의 상황, 지나온 시간을 보면 이제는 기대하는 것 자체가 더 아픕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잘못된 언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잘 믿고 싶기 때문에 생기는 언어입니다. 자기 의심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지만, 그 약속을 받아들일 만큼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약속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내 조건’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 밑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내 조건이 더 크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의심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람의 의심 앞에서 그를 밀어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가까이 오십니다. “왜 아직도 의심하느냐” “더 믿어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끌어 올리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기면 하나님이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심이 좋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어 아브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람을 데리고 장막 밖으로 나가십니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을 보게 하십니다. 아브람은 그동안 자신의 작은 가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의 보복을 생각하고 있었고, 아들이 없는 현실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시선을 멈추게 하시고 하늘을 보게 하십니다. 뭇 별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답답합니다.

왜 하나님은 별을 보여주셨을까? 그냥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더 좋았을텐데. 이런 의문점이 있습니다. 왜, 언제 되는지, 어떻게 되는지, 왜 명확하게 알려주시지 않으실까요? 그것이 의심을 더 빨리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람의 의심의 문제는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너에게 아이가 태어날꺼야, 이렇게 시간을 알려 주셨다해도 결국 다시 이 질문으로 돌아올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도 가능한가?” 왜냐하면 조건은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보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설명을 들으면 안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준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설명도 결국 의심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래의 정보를 주지 않으십니다. 대신 기준을 바꾸십니다. 아브람이 보고 있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을 보게 하십니다. 뭇 별을 보게 하십니다. 이건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선언입니다. “이것은 너의 조건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이건 내가 하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상황을 먼저 바꾸지 않으시고 상황을 해석하는 기준을 하나님으로 바꾸십니다. 그래야 아브람이 다시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아셨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아브람도 뭇별을 보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롭게 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다시 흔들린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가 더 확신할 수 있도록 언약을 채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언약식에 사용 될 짐슴들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쪼개어 마주 놓게 하셨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낯섭니다.

짐승을 둘 로 쪼개어 나두는 것은 문화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는 매우 익숙한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당시 언약은 두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짐승을 쪼개 놓고, 언약 당사자들이 그 사이를 지나갑니다. 이 의식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이 의식은 두 당사자가 누구는 먼저 언약을 깨면, “이 짐슴처럼 되어도 좋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언약은 좋은 마음, 아름다운 감정, 막연한 약속이 아닙니다. 고대 근동의 언약은 언제나 죽음의 책임을 건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는 방식이고대 근동의 언약식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은 언약을 맺으시려는 순간 아브람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십니다. 이 잠은 단순한 피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상태, 아브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브람은 두 사람이 걸어가야 하는 그 자리를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지나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화로와 타는 휏불이 쪼개진 짐승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혼자 그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당시 기준으로 보면 매우 이상한 장면입니다. 왜 하나님이 혼자 지나가셨을까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이 언약식을 혼자, 걸어가시므로 이 약속이 깨지면 내가 책임지겠다. 내가 대신 찢어지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건 단순한 약속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거신 책임 선언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 언약에 단 한 걸음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가 지켜야 할 조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언약은 “함께 이루자”는 약속이 아니라 “내가 다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불안과 의심사이에 서 있던 아브람에게 말씀과 언약으로 그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결 론

그렇다면, 구체적인 시간과 계획을 말씀하지 않고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신 것 처럼 하나님은 왜 불안과 의심 사이에 서있는 아브람에게 언약이라는 답을 주셨을까요? 아브람은 분명히 아들을 원했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곧바로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을 앞당기지도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왜 생명을 거신 약속으로 그에게 대답하셨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단순히 ‘아들’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계셨던 일은 아브람의 상황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아브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결과를 붙들고 사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아브람으로 자라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얻어야 안심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안심하는 아브람으로 그의 존재를 옮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가능성을 계산하던 아브람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아브람으로 만들어 가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만약 아들을 바로 주셨다면 아브람은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여전히 ‘결과’에 묶인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것을 붙들기 시작합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 앞에서 다시 흔들리고 의심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단순히 결과를 주시는 대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십니다. 신뢰의 자리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언약에 자신을 묶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은 언약은 단순히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 관계는 내가 책임진다”는 선언이셨습니다. 아브람의 인생의 결과뿐이 아니라, 너와 나의 관계까지 내가 책임진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불안과 의심 사이에 서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이유입니다.

어쩌면,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도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믿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질문하고 싶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왜 아직입니까? 주님!! 예수님을 믿는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정말 변화될 수 있을까요? 우리 가족이 예수님을 믿는 날이 올까요? 이 무너진 마음이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묻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답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마치 아브람에게는 쪼개신 짐승 사이로 하나님이 혼자 지나가신 것 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홀로 십자가에서 몸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셨던 그 언약의 방식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이루신 사건입니다. 아브람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약속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책임지신”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한 사랑의 표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언약의 완성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은 이미 책임지시고 계신 하나님의 언약아래에 살아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말해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과 의심이 올라올 때마다,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별을 바라보는 것 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직접 못박히신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는 그 의심들 사이에서, “그 일은 너희가 책임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신 일이라고 말해줍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미래의 염려와 걱정들 사이에서 미래는 너희가 이루어야 할 책임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책임지기로 결정하신 약속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실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과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책임지신 하나님 위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숨죽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셨기 때문에 오늘을 걸어가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될까 안 될까에 붙들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에 붙들린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이 길어져도, 실망이 찾아와도, 의심이 올라와도, 다시 고개를 들어 하나님이 보여주신 별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십자가의 증거를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불안과 의심 사이에 있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교회가 개척된지 일년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불안도 있었고, 의심도 있었고, 수없이 흔들렸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의 확신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은혜이음 공동체는 우리의 확신 위에 세워진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책임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약속을 믿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와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의심이 와도 돌아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책임지신 길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가 사람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서서 앞으로의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이 복음이 우리 성도들의 실제가 되어, 이미 책임지신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경험하며, 간증하며 살아가는 모든 은혜이음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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