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우리는 지금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의 믿음의 여정은 계속해서 믿음이 자라고 성장하는 직선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의 신앙의 여정은 오르기도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다시 올라가기도 하고, 또 무너지기도 하는 곡선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부르심 앞에서는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기근 앞에서는 애굽으로 내려갔고, 갈등 앞에서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봤고 승리 이후에는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다시 아브람을 붙드셨습니다 아브람의 신앙의 여정 속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브람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람과 언약을 채결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채결하시며, 아브람을 인내와 기다림 가운데 있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고 계셨던 일은 결과를 붙들고 사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사는 아브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얻어야 안심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안심하는 아브람으로 그의 존재를 옮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시간이 계속 되었습니다. 3절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줍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이 말을 다시 하면, 10년간 아이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 “10년”이라는 시간이 크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다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이 지났다”는 이 말 한 문장만 들어도 “하나님은 왜 이렇게 늦게 일하시지?”, “내 기도응답도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건가?”,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 응답을 바라고 기도하고 있는 문제가 크면 클 수록 더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기다림이 지속되면 하나님께 실망할까봐!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기대했다가 무너지면 더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를 멈추기 위해서 기도도 멈춥니다. 기도를 하면 기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다림은 참으로 고된 훈련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가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이 내 삶을 바꾸는 것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그 기도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관계 속에서는 사람이 변화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자리에서는 내가 변화되기를 기다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모두 기다림 위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다리는 법은 배워도 언제나 낯설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언제나 어려워 합니다.
그래서, 어느순간 기다림이 길어지면 우리는 조용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그랬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그들의 상황보다 먼저 그들의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해석이 바뀌는 과정이 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거야” 조금 지나면 이렇게 바뀝니다. “하나님이 하시겠지…” 더 지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안 하시는 것 같은데…” 그리고 결국 이렇게 결론을 냅니다. “이건 내가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는 생각의 과정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중립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믿음을 지키는 시간이 아니라 믿음이 흔들리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결과가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고, 손에 잡히는 열매가 없고, 설명할 수 있는 진행이 없으면 우리는 그 상태를 불안으로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상태를 오래 두지 못하고 반드시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대안을 합리화하며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전환문장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지점속에 있는 사래와 아브람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과 사래가 기다림 속에서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 변한 마음이 어떤 선택으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그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 보여줍니다. 저는 오늘 기다림 속에 있던 아브람과 사래의 내면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기다림 속에서 있는 아브람과 사래는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요? 어느 날,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을 꺼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갖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 제안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생각의 결론입니다. 사래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생각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왜 아직도 안주시지?,” “이렇게까지 안 되는 걸 보면,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는 것 아닐까…” 이 생각은 한 번 스치고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걸어갈 때도, 혼자 앉아 있을 때도, 아무 일 없는 순간에도 같은 생각이 조용히 반복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대신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머문 생각은 점점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진 생각은 더 이상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 ‘전제’가 됩니다. 사래는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실망도 커졌습니다.
그러자, 사래는 어느 순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이 말은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된 생각과 쌓여온 감정과 기다림에 대한 피로가 만들어낸 하나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이루지 않으신 곳을 사래는 하나님이 하지 않으신다고 바꿔 버렸습니다.
“아직”을 “아예”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거절로 해석해버립니다. 그리고 그 해석 위에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사람은 사실 위에서 선택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받아들인 해석 위에서 선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따라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생각을 따라 살아갑니다. 사래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시간표대로 일하시지 않자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립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침묵이 아니었지만,사래에게는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삶은 현실감 없는 선택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래는 자신의 여종을 통해 아들을 낳으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문화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여종은 주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그 여종이 낳은 아이 역시 주인의 자녀로 간주되었습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가진 소유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결국 내 것이 되는 그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문화가 허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매우 큰 문제가 되지만, 그 당시에는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사래는 이런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이건 틀린 게 아니다.” “다들 이렇게 하잖어.!!, “그러니, 하나님도 이해하실 꺼야” “결국 아들을 낳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괜찮다”고 합리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합리화는 양심이 흐려지는 상황에서 진행됩니다. 양심은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해석으로 희미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이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해석이 올라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잖아” “하나님도 이건 이해하실 거야” 이 해석이 반복되면 양심은 틀린 것이 아니라 설득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은 우리가 무엇을 ‘사실’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양심은 어느순간 합리화에 의해 조용해집니다. 양심은 한 번에 꺼지지 않습니다. 해석에 의해 조금씩 침묵하는 것입니다. 합리화는 우리 마음안에서 죄를 선택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설득할까요? 양심을 설득합니다.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설득당했습니다.
우리도 사래와 아브람처럼 선택의 갈림길에서 항상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는 분별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문화가 허용하는 길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사이에서 항상 씨름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방식은 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가고 있고, 무엇보다 지금 당장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세상풍조로 말했습니다. 세상풍조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풍조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은 방법보다 약속을 줍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방법은 내가 통제할 수 있지만 약속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보다 방법을 더 쉽게 붙듭니다.
기다림은 길어지고, 약속은 보이지 않고, 현실은 변하지 않을 때, 세상의 문화는 다시 답을 줍니다. “이렇게 하면 된다.”, “다들 이렇게 한다.” 여러분, 이건 단순한 제안이 아닙니다. 우리의 분별력을 흐리는 매우 설득력 있는 유혹입니다.
그렇다면 세상풍조의 문화의 방식은 다 틀린 것인가?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문화도 현실을 살아가고 문제를 푸는 지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 문화가 기준이 되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문화는 세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풍조는 지금만 봅니다. 빠르고, 효율적이고, 결과 중심적입니다. 세상의 문화는 사람 중심입니다. 이것을 피하지 못합니다. 필요와 감정과 욕망을 기준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리적이지만 동시에 하나님 없이도 돌아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듭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세상풍조는 결과로 정당화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되는 거잖아”, “문제만 해결되면 되는 거잖아” 이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매우 실용주의, 합리주의, 결과주의 가운데 답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과연 그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옳았는가?” “그 동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는가?” 여기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문화와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이 질문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문화적으로 괜찮은 것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도 괜찮은가?”
왜냐하면 세상풍조 문화는 언제나 설득력이 있게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사래의 선택은 문화적으로는 합리적이었지만 신앙적으로는 불신이었습니다. 관계적으로는 하나님을 밀어낸 선택이었습니다. 사래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입니다. 문제는 ‘열심’이 아니라 그 ‘열심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느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자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 불안에서 나온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장면을 단순한 문화 이야기로 넘기지 않습니다. 사래의 대안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 연약한 모습으로, 하나님보다 현실을 더 신뢰한 선택이며, 하나님 없이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불신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래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해석을 하면서 이 생각이 정말 맞는 것인지,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기다림이 지속되니까 사래는 정말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대답을 하실까봐” 두려워서 질문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답을 몰라서 묻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답을 들을까 봐 묻지 않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 뒤에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이 생기면 하나님께 묻는 순간 멈춰야 할 수도 있기에 질문을 피하게 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것 까지 물어야 해?”라며 질문을 회피합니다. 욕망이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빠르게 합리화됩니다. 그리고 결국, 지금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급함까지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사래의 조급함은 당대의 관습과 문화가 하나님앞에서 옳은가? 옳지 않은가? 분별하려는 생각을 멈추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풍조에 더 깊이 들어갔습니다. 사래에게 하갈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갈은 “그녀”가 아니라 “그것”처럼 취급되었습니다. 하갈의 마음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하갈의 동의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세상풍조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악한 일이었습니다. 간음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문화라는 이름으로 내 필요를 채워줄 기능으로 보았습니다. 세상풍조에서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사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사래 개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인간의 악은 언제나 개인의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 악은 자주 문화의 이름을 입었습니다. 관습의 이름을 입었습니다. 제도의 이름을 입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문화의 무서움입니다. 문화는 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자연스럽게 보이게 합니다.
사람을 이용하면서도 “현실적 선택”이라고 말하게 하고, 약한 사람을 희생시키면서도 “질서”라고 부르게 하고, 누군가의 인격을 지우면서도 “관습”이라고 포장하게 합니다. 이렇게 죄는 개인의 욕망에서 시작되지만, 문화 속에 들어가면 정당한 구조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급함은 이러한 분별을 하지 않게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조급하다가, 사래와 같은 죄를 범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문화라는 이름으로, 질서라는 이름으로, 명분이라는 이름으로,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면서, 괜찮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건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도 똑같이 살아갑니다. 연애든, 결혼이든, 직장선택이든, 관계를 맺든, 어떤 선택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미 마음이 기울었을 때는 질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선택의 모습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방향이 아니라, 조건과 안정과 환경이라는 삶의 편의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때 “내가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리인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살아낼 수 있는 환경인가” 아니면 신앙을 계속 타협하게 만드는 구조인가” 질문하거나, 분별하지 않습니다. 세상풍조의 문화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뒤쳐질 것 같은 생가이 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게 합니다. 서두릅니다. 묻지 않게 만듭니다.
왜입니까? 묻는 순간 멈춰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결정은 문화가 내립니다.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흐름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누구나, 믿음이 있어도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풍조와 문화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옆에 믿음의 동역자가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래가 흔들렸습니다. 조급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해석도 흐려졌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사래에게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도록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잖아.” “우리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을 기다려야 해.” “이 선택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 다시 물어보자.” 아브람은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람도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아주 짧게 말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이 한 문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이미 한 번 본 장면을 다시 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하와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이 말을 기억합니다. 이 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좋아 보이는 대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됩니다. 사래가 뱀과 같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가 작동하는 방식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의 해석이 앞섭니다. 기다림보다 대안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말씀보다 문화적으로 가능한 방법이 더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도 비슷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하와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말씀을 붙들지 않습니다. 그저 듣고, 먹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도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씨름하지 않습니다. 그저 듣고, 취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여러분, 죄는 언제나 큰 반역의 얼굴로만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말처럼 옵니다. 가장 현실적인 조언처럼 옵니다. 가장 합리적인 대안처럼 옵니다.
결국,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듣고 그의 여종 하갈과 동침합니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성경은 매우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아브람이 하갈을 취하자 아들이 생깁니다. 겉으로 보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기다림도 끝났고, 결과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무엇이 시작됩니까?
갈등입니다. 하갈이 임신하자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합니다. 사래는 다시 아브람을 원망합니다. “이 모든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책임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갈은 사래의 폭력으로 인해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문제를 해결하려고 조급하게 행동했던 행동과 선택은 처음에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결코 평안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을 해결하려고 시작한 관계가 오히려 더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불안을 해결하려고 서둘러 내린 선택이 평안이 아니라 갈등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안정을 위해 선택한 자리가 결국 내 신앙을 계속 타협하게 만드는 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필요 때문에 맺은 관계가 결국 서로를 소모하게 만드는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기다리지 못해, 조급하게 행동했던 아브람과 사래가 만든 비극적인 결과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사래에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로 도망친 임신한 하갈에게 가셨습니다. 그녀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임신을 한 하갈이 광야로 간다는 것은 사래의 학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줍니다. 하갈은 사래에게 학대를 당하느니, 차라리, 광야에서 강도를 만나는게 낫다는 심정으로 장막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하갈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갈을 찾아나서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녀를 찾아오셨습니다.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하나님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이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갈이 어디서 왔는지 아십니다. 왜 도망쳤는지도 아십니다. 무엇이 아팠는지도 아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묻는 이유는 하갈을 다시 한 인격으로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래와 아브람의 집에서 하갈은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고통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하갈은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듣지 않았던 하갈의 고통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다시 아브람과 사래에게 돌아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도망이 해결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갈이 있는 광야는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 생존이 불가능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지금 더 나은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더 절망적인 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갈을 돌려보내시면서 단순히 명령만 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을 주셨고, 자신을 하갈에게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하갈은 더 이상 버려진 채 돌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약속을 가진 채 돌아가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갈은 하나님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브엘라해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하갈에게만 주어진 위로가 아닙니다. 이 장면은 동시에 아브람과 사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하갈이 서 있는 광야는 우연히 생긴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광야는 아브람과 사래의 선택이 만들어낸 자리입니다. 그들의 조급함과 불신과 합리화와 사람을 사용해서 만든 자리였습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그 결과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결과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갈을 찾아가심으로 아브람과 사래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밀어낸 사람, 너희가 만든 결과 속에서 나는 일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는 실수를 없애주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상처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우리가 만든 무너진 자리에서 사람을 다시 살리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결과를 없애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결과 속에서 사람을 살리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하갈을 살리시면서, 그녀의 고통을 살피시며, 그에게 큰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시에, 하갈과 태어날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에게, 그들의 잘못된 선택과 결과가 얼마나 파급력이 큰지를 계속 기억하게 하시므로, 그들의 잘못을 되새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결과를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충분히 기도하며 결정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말씀은 혹시 이미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을 합리화 하고 있는 문제는 없는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충분히 묻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 아예 묻지 않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이 질문안에 머물기 원하십니다. “주님, 정말 이 길이 맞습니까?”, “주님 제가 혹시 합리화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을 피하지 나십시오, 이 질문을 멈추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 질문 앞에 서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조급하게 결정하지 않기 위해서, 합리화로 정당화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않기 위해서, 믿음의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합리화 하려고 할 때, 네 옆에 누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동역자는 단순히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흔들릴 때 나를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데려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기준을 바꿔버립니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 내 선택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동역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내가 흔들릴 때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흔들릴 때 “이게 정말 하나님 앞에서 맞는 선택이야?”라고 물어주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가까이 두고 있는 사람들은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아브람과 사래처럼 가장 가까운 관계일수록 영향력은 훨씬 더 큽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 인생에 더 큰 방향을 만듭니다.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나와 가까운 사람만이 아니라, 나를 가까이 두는 사람들도 질문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믿음을 붙들게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믿음과 멀어지게 하는 사람인가? 나는 누군가에게 조급함을 주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사람인가?
복음 우정 공동체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말을 더 듣고 있는가? 그리고 동시에 나는 지금 누군가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누구의 말을 더 듣느냐에 따라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없이 만든 결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고 살아가는 인생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되길 갈망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