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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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닿지 않는 약속앞에서 요구되는 믿음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창세기 19장 9-19절펼치기

9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0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1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12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13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14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15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6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17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18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개역개정

서 론

우리는 지금 아브람의 이야기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 시리즈로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같은 약속을 다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부족해서 약속을 수정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식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민수기 23장 19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하나님은 우리처럼 약속해 놓고 나중에 후회해서 취소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많아졌다고 하나님이 약속을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말씀하신 것을 끝까지 붙드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가능성 위에 서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다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를 번성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이 땅을 주겠다.”  약속이 멈추지 않습니다. “내가 하겠다, 내가 하겠다, 내가 하겠다”. 계속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 2절부터 9절까지 무려 8절이나, 하나님이 다시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이 약속은 아브람이 처음 듣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미 20년 가까이 들어온 약속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또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자,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17절과 18절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스마엘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길 원한다고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너무나 공감이 되는 아브람의 반응입니다. 아브람의 웃음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웃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자신의 현실사이에 간격이 너무 커서 나오는 웃음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짓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 크고, 내 현실은 너무 구체적이고, 내 경험은 너무 오래 쌓여 있어서 그 말씀이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머리로는 믿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반응은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브람의 반응은 와닿지 않는 약속 앞에서 나오는 우리 모두의 반응인 것입니다. 좋은 말이고, 축복의 말씀이긴 한데, 조금은 많이 추상적이고, 현실 같지는 않게 느껴지는 우리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들을 때 단순히 “좋다, 싫다”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속으로 아주 빠르게 계산합니다. “저 사람이 저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저 말이 현실성이 있을까?”, “저건 그냥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말 아닐까?” 이런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은 약속은 비교적 쉽게 믿습니다.

누가 “이번 주에 커피 한잔 사줄게요”라고 말하면 크게 의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다음에 밥 한번 먹어요”라고 말하면, 물론 안 지켜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불가능한 말처럼 들리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 약속은 우리의 현실 감각 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약속이 갑자기 커지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갑자기 “내가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사줄게요”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감사가 먼저 나오기보다 웃음이 먼저 나올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대한한공 퍼스트 클레스를 예매해 줄게” 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목사님!! 돈 훔치셨어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무시해서도 아닙니다. 약속이 너무 크기 때문에 믿음보다 현실 감각이 먼저 작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의 진심만 보지 않습니다. 약속의 크기와 약속하는 사람의 능력을 함께 봅니다. 그래서 어떤 약속은 들을수록 위로가 되지만, 어떤 약속은 들을수록 오히려 멀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너무 큰 약속은 위로가 되기 전에 먼저 의심을 불러옵니다.

약속이 커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감동보다 검증을 먼저 시작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작은 호의는 쉽게 받지만, 큰 사랑은 쉽게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고, 관계는 식고, 상황은 바뀌고, 약속은 현실 앞에서 약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큰 약속을 들으면 기뻐하기보다 방어합니다. 믿고 싶지만, 쉽게 믿지 못합니다. 기대했다가 무너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우리에게 그렇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자녀다, 너는 의롭다, 너는 거룩하다, 너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약속들은 너무 큽니다. 너무 커서 오히려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자리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지만, 그 약속이 현실처럼 와닿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브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의 마음을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크고, 현실과 맞지 않는 약속을 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식는지, 우리의 신뢰가 얼마나 빠르게 흔들리는지, 우리가 약속을 얼마나 쉽게 가볍게 만드는 존재인지, 하나님은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약속의 크기를 낮추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크게, 더 분명하게, 더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나 커서 와닿지 않는 아브람에게 명령하시는 두 가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왜 그렇게 크게 약속하시는지,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는지,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을 통해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하나님은 왜 그렇게 크게 약속하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브람에게 하신 명령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제는 “이름을 바꾸라”고 명령하십니다. 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 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10절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도, 사라로 바꾸라는 명령을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아브람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일까요?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물론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해석 차이는 있지만, 그 이름 안에 “아버지”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열국의 아버지”,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건 굉장히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현실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몇 명 있습니까? 실제로,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서 나온 아들은 없습니다. 오직, 사래의 여종을 통해 나은 이스마엘 한 명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부르십니다. 더 확장되었습니다.

“열국의 아버지”입니다. 이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이름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름과 현실이 전혀 맞지 않는다면 얼마나 어색하겠습니까? 어쩌면 아브람은 자신의 이름이 싫었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누군가가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들이 없습니다. 얼마나 이름을 바꾸고 싶어했을까요? 그런데 바뀐 이름이 아브라함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름을 바꾸는 상황을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브람이 이름을 바꾼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브람에게 와서 질문합니다. 아름을 바꾼다면서요? 그러자 아브람이 대답합니다. 네~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길 원하십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정말 잘한 일이야, 아들이 하나도 없는데 이름이 아버지면 얼마나 힘들까? 차라리 다른 멋있는 이름으로 바꾸면 좋겠어!! “라고 생각하면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웃들이 질문합니다. “어떤 이름으로 바꾸려고 하십니까?”

그런데 아브람이 말합니다. 내 이름은 이제 아브라함입니다.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아버지도 아니고, 열국의 아버지? 어쩌면, 매우 당황해서 이 말을 들은 이웃들이 서로의 얼굴을 처다보며 화들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 상황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들이 하나도 없는데, 열국의 아버지라고 자신을 소개해야 합니다.

이건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이름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아브람처럼 이름이 바뀐 한 명이 더 등장합니다. 누가 있을까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하나님은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4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게바”는 아람어이고, “베드로(Petros)”는 헬라어입니다.

둘 다 같은 뜻입니다. 반석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시몬의 모습은 이 이름과 잘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그는 열정적이지만 동시에 충동적입니다. 용감하게 나서지만 쉽게 흔들립니다. “주와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몇 시간 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반석처럼 단단해 보이기보다 파도처럼 요동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시몬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제 ‘시몬’이 아니라,“너는 베드로, 곧 반석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결과를 보고 이름을 붙입니다. 무엇이 이루어지면 그에 맞는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합격하면 합격자라고 부르고, 성공하면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부르시고, 그 다음에 이루십니다.

현실을 보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시고, 이름을 먼저 주시고 현실을 바꾸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을 잘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존재를 규정하시고, 그 다음에 그 존재가 그렇게 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반대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다른 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행동해야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다릅니다. 먼저 그렇게 부르시고, 그 다음에 그렇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여러분, 그리고 우리도 아브람과 시몬처럼 이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이라고 부르십니까? “성도”라고 부르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그러나, 우리는 “성도”라는 말을 너무 가볍게 씁니다.

예의를 갖추거나, 처음 뵐 때, “성도님”으로 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의미의 뜻은 영어로 “Saint”입니다. “거룩한 자, 성인”입니다. 여기에 앉아있는 준혁이에게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신준혁 성인님!! 굉장히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성도라고 부르셨을까요? 아닙니다.

먼저 우리를 성인으로 부르시고, 그 다음에 그렇게 살아가도록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 없게 자라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를 의인이라고 부르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의인이라고 여기시고 의롭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할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에 거룩하다 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거룩한 자라고 부르시고 거룩하게 변화시켜 가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는 아브라함이다. 너는 열국의 아버지다. 그렇게 내가 만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을 크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먼저 이름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존재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동만 고치면 사람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행동보다 더 깊은 곳에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누구라고 믿는 대로 살아갑니다. 자신을 버림받은 사람이라고 믿으면 사랑이 와도 밀어냅니다.

자신을 실패자라고 믿으면 기회가 와도 포기합니다. 자신을 죄의 종이라고 믿으면 죄 앞에서 쉽게 항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이름을 바꾸십니다. “너는 실패자가 아니다.”, “너는 죄의 종이 아니다.”, “너는 버림받은 사람이 아니다.” “너는 내 자녀다.”, “너는 성도다.”, “너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를 모른 척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가볍게 여기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행동보다 더 깊은 곳, 우리 존재의 이름을 다시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단순히 행동을 고치는 종교가 아니라, 존재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버지로 부르시면서, 한 가지 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할례’입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입니다.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할례란 무엇입니까? 할례란 남자의 성기의 앞부분의 피부를 잡아당겨 날카로운 칼로 일부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할례는 인간의 생식능력과 직결되어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도 많고, 생식 능력도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할례를 명령하신 이유는, 상징적으로, “아브람아 너의 생식능력이 아예 0이 될지라도, 너의 가능성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라 할지라도 나는 너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할 수 있다”는 의미를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몸에 새기게 하셨을까요? 아브람의 생식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계속 기억하도록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면, 매일 한 번씩, 아브람은 소변을 볼 때나, 목욕을 할 때면, 항상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브람뿐만이 아니라, 아브람의 자손들과 식솔들까지 다 받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생명으로 살아가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할례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할례처럼,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은혜를 기억하고, 몸에 새긴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로 세례와 성찬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 하면서, 성도로 부르시고, 우리를 자라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정체성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서 성도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 없게 자라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나의 현실을 실망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행하는 세례와 성찬은 단순한 예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2주에 한 번씩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쉽게 우리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우리를 위해 친히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거대한 약속을 하시고, 이름을 바꾸시고, 할례를 행하게 하신 이 사건은 오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어떠한 메세지를 주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지금의 모습으로 나를 단정짓지 말라는 메세지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너무 커보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이 부담스럽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성찰해 볼 때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예배드리고 돌아가서도 같은 죄에 넘어집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고도 사소한 말 한마디에 분노합니다.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미래 앞에서는 불안해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사람의 평가 하나에 하루 전체가 흔들립니다.

성도라고 불리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시기와 비교와 열등감과 자기연민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나아지면 성도라고 할 수 있겠지.”라고 판단합니다. “조금 더 변화되면 하나님의 자녀답다고 말할 수 있겠지.” 자기의지를 다집니다.

“언젠가 믿음이 좋아지면 그때는 그 이름이 어울리겠지.” 그래서, 지금은 아니라고 회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이름으로 지금의 나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현실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죄가 있는데 죄가 없다고 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안한데 불안하지 않다고 자기최면을 걸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현실을 정직하게 보되, 현실이 나의 최종 이름이 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실패가 나의 최종 이름은 아닙니다. 나는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흔들림이 나의 최종 이름은 아닙니다. 나는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넘어짐이 나의 최종 이름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부르신 이름이 나의 최종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정직한 질문이 생깁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성도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시고, 그 이름대로 만들어 가신다는 말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이렇게 더딥니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분들도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주님을 오래 믿었는데, 정말 변하고 있는가?” “예배도 오래 드렸고, 말씀도 많이 들었는데, 왜 아직도 마음은 이렇게 좁은걸까?” “왜 아직도 작은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왜 아직도 쉽게 불안하고, 왜 아직도 용서가 어렵고, 왜 아직도 내 안에는 오래된 죄의 습관이 남아 있는가?”

어느순간, 자신을 진단해 보면 부정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참 뜨거웠는데, 지금은 많이 식은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눈물로 기도했는데, 지금은 기도조차 무덤덤하다.” 진단합니다. “나는 더 성숙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굳어진 것 같다”고 판단합니다. 여러분, 이 질문은 믿음이 없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매우 정직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 단순히 “더 열심히 해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우리에게 더 깊은 위로를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순간에 완성품처럼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빚어 가십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시작하신 이”와 “이루실 이”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이 하셨고, 완성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중간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신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하나님이 우리를 빚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점점 더 변화되는 과정은 공장에서 물건이 찍혀 나오듯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는 농부가 나무를 기르듯 이루어집니다. 나무는 하루아침에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뿌리는 땅속에서 자랍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고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겨울에는 나무가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잎도 없고, 열매도 없고, 가지도 메말라 보입니다. 그러나 그때도 나무는 뿌리로 버팁니다. 생명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생명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어떤 변화는 눈에 보입니다. 말투가 바뀌고, 습관이 바뀌고,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런데 어떤 변화는 아주 깊은 곳에서 일어납니다. 예전 같으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을 사람이, 이제는 넘어지고도 돌아옵니다. 예전 같으면 죄를 합리화했을 사람이, 이제는 죄 때문에 아파합니다.

예전 같으면 상처받으면 끝까지 마음을 닫았을 사람이, 이제는 닫힌 마음을 두고라도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그것도 변화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너무 극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완전히 달라져야 변화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아야 변화다.” “뜨거운 감정이 계속 유지되어야 변화다.” 그런데 성경의 변화는 그렇게만 오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변화는 때로 이렇게 나타납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씨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가지고도 사랑의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작아 보이지만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속도로 우리를 바꾸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지 행동 몇 가지를 고치려는 분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깊은 뿌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빨리 성격이 바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다루십니다. 우리는 빨리 불안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안 속에서도 주님께 맡기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우리는 빨리 죄의 욕망이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 싸움 속에서 우리가 자기 의를 버리고 은혜를 붙들게 하십니다.

우리는 빨리 뜨거운 감정을 회복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감정이 식은 자리에서도 약속을 붙드는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변화가 더딘 것이 반드시 버림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 더딘 변화는 하나님이 더 깊이 일하고 계신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만큼 변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 문제에 아파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일하고 계신 증거일 수 있습니다. 죽은 마음은 죄 때문에 아파하지 않습니다. 죽은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진 것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은혜가 식은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식었을까?” 하고 아파하는 마음, “내가 왜 아직도 이 모양일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마음, “주님, 나를 다시 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 자체가 은혜의 흔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안주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시겠지” 하며 죄와 타협하지 마십시오. “나는 원래 안 변해” 하며 자신의 굳어진 마음을 정당화하지 마십시오. 은혜는 우리를 포기하게 하는 힘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노력을 없애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다시 순종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다시 회개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능력입니다. 다시 사랑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을 주셨습니다. 표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세례와 성찬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내 변화의 속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신다는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내 믿음의 온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식은 마음을 다시 살리시는 성령의 능력에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내가 얼마나 성도다워졌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를 성도라 부르시고, 그 이름대로 끝까지 만들어 가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다시 우리에게 주신 이름을 받으십시오. 성도라는 이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그 이름이 아직 어색해도 괜찮습니다. 그 이름이 내 현실보다 커 보여도 괜찮습니다. 그 이름 앞에서 “제가요?”라고 묻게 되어도 괜찮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주신 이름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 성도라 부르셨으니,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으로 끝까지 빚어 가시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날에 아름답게 완성하실 이 거대한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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