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살아가는 믿음

이지열은혜이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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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읽는 묵상

사라는 웃었습니다. 이번에는 의심의 웃음이 아니라, 오래 참아 온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조심스러운 웃음이었습니다.

기다림은 끝났고, 약속은 생각이 아니라 몸이 되었고, 말씀은 이야기에서 아이가 되었습니다. 백 세의 아브라함과 구십의 사라는 “말씀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팔에 안고 웃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은 웃음으로 시작해 눈물로 흘러갑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집 안의 공기는 묘하게 식어 갑니다. 이삭이 웃고, 이스마엘이 장난치고, 사라는 그 장면을 기쁨이 아니라 위협으로 읽습니다. 약속이 이루어졌지만 마음은 아직 쉬지 못한 것입니다.

사라는 말합니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세요.” 이 말이 불편한 이유는 사라가 너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우리와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받은 것을 불안으로 지키려는 마음.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 손으로 관리하려는 마음. 아브라함은 괴로워합니다.

믿음의 조상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로 서지 못한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멈춰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라의 말을 들으라.”

이 말은 모든 것이 옳다는 뜻이 아니라, 이 복잡한 선택 위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정제된 동기 위에서만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미성숙, 정리되지 않은 감정, 어설픈 결정 위에서도 하나님은 길을 내십니다. 광야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물은 떨어지고, 아이의 울음은 커지고, 하갈은 더 이상 보지 못해 아이를 덤불 아래 두고 돌아서 버립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이의 울음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내가 아이의 소리를 들었다.”

이삭을 통해 약속을 이어 가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지워버리지 않으십니다. 언약의 중심은 이삭이지만, 자비의 시야는 그보다 훨씬 넓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더 이상 볼 수 없는 자리에서 하갈의 눈을 여십니다. 새로운 우물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거기 있었던 우물을 보게 하십니다.

창세기 21장은 조용히 우리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도 혹시 그 약속을 두려움으로 조절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혹시 누군가의 울음을 보지 않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이 본문 앞에 서서, 우리는 설명보다 질문을 안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묵상과 성찰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맡겼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모를 실패를 대비해 마음속에 안전장치를 하나 더 달아 둡니다. 믿음과 관리의 차이는 행동보다 손의 힘에서 드러납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두려움으로 관리하고 있는가?

돌이켜보면 우리의 인생에는 기도가 충분하지도, 감정이 정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내린 선택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선택들이 곧 하나님의 역사가 멈췄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그 선택 위에서도 하나님이 일하셨음을 인정할 수 있는가?

광야의 울음은 대개 너무 크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불편해서 외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나쳐 온 자리에서도 여전히 보고 계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애써 듣지 않으려 했던 소리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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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열은혜이음교회

은혜이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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