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종종 우리는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저에게 사람들은 책을 즐겨 선물했습니다. 목회자라서 그런지 책을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다른 목회자들 처럼 책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책선물은 웬만하면 좋아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면…저는 책보다 ‘도서상품권’이 훨씬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책을 보는 취향이 조금씩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되어집니다.
한 번은 누가 저에게 책을 선물해 줬습니다. 포장을 뜯어 보니 제목이 이렇게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게으름’(책 보여주기) 순간 “고마워요” 라고 말은 했지만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저 사람… 나를 게으르다고 보는 건가?” 그 짧은 생각 하나에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졌습니다.
물론, 책을 준 사람은 순수한 마음, 좋은 의도로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받는 저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저는 전혀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갈림길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전혀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이 선물은 기분 나쁜 선물이 됩니다. ‘왜 이런 책을 선물로 주지?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조금만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자신을 낮추고,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맞아, 나 요즘 좀 느슨했지… 이거 필요했네…” 이렇게 오히려 선물이 은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똑같은 책인데,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선물은 ‘모욕’이 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하는 겁니다.
여기서 저는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누군가가 아무리 좋은 선물을 줘도, 내가 나를 낮추지 않으면 그 선물을 기쁘게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이해하는 방식과도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복음이신 예수님도 그렇고,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지 않을 때 복음은 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환문장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장은 이 질문에 답하는 본문입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성탄이 은혜가 되고, 왜 어떤 사람에게는 성탄이 위협이 되는가? 왜 예수님이라는 선물은 누구에게는 위로가 되고, 누구에게는 부담이 될까요? 오늘 저는 이 질문을 가지고 마태복음 2장 안에 있는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크리스마스가 누구에게 선물이 되고, 누구에게 부담이 되는지 그리고,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신학적 함의가 무엇인지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시대 배경은 한마디로 말해 ‘폭군의 시대’입니다.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고, 분봉왕이던 헤롯은 로마가 세운 꼭두각시 왕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헤롯은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에돔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항상 자신의 정체성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폭동이 일어나거나, 자신의 혈통적인 문제를 빌미 삼아 자신의 자리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정체성 때문에,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잔인함을 서슴지 않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헤롯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이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헤롯의 마음은 요동칩니다. 헤롯은 순간적으로 두려웠습니다. 자기가 쥐고 있던 자리, 자기가 쥐고 있던 권력, 자기가 쥐고 있던 인생의 주도권이 이제 위협받기 시작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위협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헤롯은 속마음을 숨긴채 동방박사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유대인의 왕을 찾으면 꼭 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도 가서 경배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헤롯이 그 아이를 찾아내어, 죽이고 말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 떠나고, 헤롯도 왕궁에서 동방박사들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헤롯은 수소문 끝에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오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명령을 내립니다.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들을 다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이 이었습니다. 헤롯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나쁜 소식이였습니다. 헤롯에게 크리스마스는 선물이 아니라, 위협이었던 것입니다.
마태는 여기서 우리에게도 성탄의 소식이 기쁜소식이 아니라 두려운 소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겉으로 헤롯과 같이 잔인한 명령은 내리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도 이런 뿌리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받아 들이면, 나는 더 이상 ‘내 삶의 주연’이 될 수 없다는 두려움과 불편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시면…나는 의미를 잃을지도 몰라.” 이 존재적 불안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헤롯과 같은 두려움입니다. 이런 헤롯의 마음은 단지 신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로 번져 나갑니다. 가정에서도, 관계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구조 속에서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정은 사랑의 자리이지만, 동시에 내 왕좌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입니다. 부부간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자존심을 건드리면 마음속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내 방식이 옳다”는 확신으로 아이들을 푸시합니다.
친구와의 관계, 공동체 속에서도 헤롯과 같은 마음은 조용히 활동합니다. 내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솔직함을 숨깁니다. 상대가 나보다 인정 받으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먼저 사과하는 순간 ‘내가 지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누군가의 호의를 부담으로 느끼고, 도움을 받으면 빚지는 것 같아 피합니다.
우리는 관계를 사랑이 아니라 권력과 체면의 문제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헤롯의 심장박동입니다.
회사와 사회는 우리의 왕좌 본능이 극대화되는 곳입니다.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타인의 성공을 축하하지 못합니다. 실수를 인정하면 ‘권위를 잃는다’고 생각해 변명부터 합니다. 성공이 흔들리면 존재가 흔들립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사람을 조용히 밀어내고, 경쟁자를 ‘적’은 아니더라도 이겨야 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업무는 일이 아니라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이 됩니다. 헤롯의 마음이 내 마음을 지배하면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내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나아가 우리는 생각 깊은 곳에서도 이 왕좌 본능은 쉼없이 움직입니다. “내 뜻이 더 현실적이야” “내 판단이 더 정확해” “내가 통제해야 안전해.”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내 기준이 더 선하고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보다 내 뜻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가 더 많아집니다. 기도는 왕께 엎드리는 행위인데, 무의식적으로 기도를 통해 왕좌를 강화하려 합니다.
그래서 성탄 소식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면서도 동시에 불편한 소식이 됩니다. 마태는 헤롯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조용히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금 헤롯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마음 안에는 어떤 왕이 앉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냉정하게 한 가지를 더 확인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내가 왕 된 세상’, 내가 내 마음대로 주인 노릇 하는 인생은 과연 행복할까요? 내가 왕좌에 앉아서 통치한 결과, 내 주변 사람들은 평안을 누리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내 인생의 왕이 되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내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말합니다. 마태는 아주 정교하게 우리를 이런 일이 반복되는 성경의 거대한 흐름 속으로 초대합니다. 마태복음 2장을 자세히 읽어 보면, 구약의 출애굽기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왕의 모습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아기들을 죽였던 이집트의 ‘바로 왕(파라오)’과 소름 끼치도록 닮았습니다.
헤롯과 바로,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왕이 되어, 자기 힘으로 세상을 통제하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압제’였습니다. 누군가는 그들 밑에서 신음하고, 죽어가고,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마태가 이 평행 구조를 통해 우리에게 고발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시간과 상황과 상관없이 어느때나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려 할 때, 그곳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 된다. 누군가는 군림하고, 누군가는 신음하는 비극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이 ‘압제’라는 단어에서 자유로울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무서운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압제’라는 것은 단순히 힘 있는 누군가가 나를 짓누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무서움은, 우리가 압제의 ‘피해자’가 되는 동시에 언제든 누군가에게 ‘압제자’가 될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가만히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우리는 놀랍도록 교묘한 방식으로 서로를 조종하고 억압합니다.
가장 흔한 무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기분’입니다. 가족이나 연인 사이를 생각해 보세요. 꼭 소리를 질러야만 상처 주는 게 아닙니다. “그래, 너 마음대로 해라.” 하고 입을 꾹 닫아버리는 것. 그때부터 집안 공기는 싸늘하게 얼려버립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척도 안 합니다.
온 식구가 내 기분이 풀릴 때까지 내 눈치만 보게 만듭니다. 이게 뭘까요? 나의 ‘기분’을 무기로 상대방을 벌주는 것입니다. “네가 감히 내 뜻을 거슬렀어? 그럼 이 불편함을 견뎌 봐.” 이것은 내 감정으로 타인의 숨통을 조이는, 아주 은밀한 ‘정서적 압제’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신학 교수님이 이런 고백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참 인자한 분이셨는데, 스스로 이런 성찰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을 돌아보니 소름이 돋았다고 합니다. “교수인 나에게는 학생들의 성적을 매길 권한이 있는데 내가 이 학점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학생들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내 앞에서 벌벌 떠는 그 두려움을, 내가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교수님만의 이야기일까요? 직장에서 사수라는 이유로, 동아리 선배라는 이유로,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혹은 내가 사장이 아니라, 신고할 수 있다는 사원의 ‘을의 권력’을 이용해서라도 우리는 내가 가진 그 쥐꼬리만한 힘을 휘둘러 누군가를 내 입맛대로 통제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불편한 진실을 마주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상처받고 억울해했던 ‘피해자’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시에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내 결핍을 채우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쥐고 흔드는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했던 그 무시가 너무 싫어서 몸부림쳤는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그 표정으로 내 아이를, 내 후배를, 내 배우자를,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안에 ‘작은 헤롯’이 살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 지점에서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안에 헤롯의 마음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압제를 미워하면서도 어느새 압제를 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 사람, 죄를 싫어하면서도 그 죄를 끊지 못해 스스로에게 실망해 본 사람, 감정 하나 다스리지 못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짐하면서도 또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온 자신을 마주해 본 사람, 그때 비로소 이런 탄식이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아, 나는 내 인생을 구원할 수 없구나.” “내 안의 이 지독한 헤롯을 내 힘으로는 죽일 수가 없구나.” 바로 그 자리에서야 성탄은 더 이상 부담이 아니라 선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마태는 우리에게 화려한 왕궁에 앉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칼을 휘두르는 헤롯과 다른 한 사람을 주목하게합니다.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나신 예수님입니다.
결 론
마태는 우리에게 아주 급박하게 시작되는 한 장면을 보여줍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앉은채 짐을 쌀 겨를도 없이 야반도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뒤에는 헤롯의 죽음의 칼날이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헤롯이 분노하여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이 끔찍한 학살을 피해,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국경을 넘습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이집트(애굽)' 였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마태복음을 읽는 1세기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메시야가 헤롯의 칼날을 피해 도망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여기에는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의 모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군대를 불러 헤롯을 심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밤에, 짐을 싸서 도망치시는 구원자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어디로 갑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가장 치을 떨며 싫어했던 땅, 과거 노예 생활의 트라우마가 서린 '애굽(이집트)'으로 피난을 가십니다.
여러분,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주를 만드신 신이, 고작 인간 왕 하나가 무서워서 도망을 간다니요? 우리는 지금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강력한 왕'을 찾고 있는데, 정작 오신 왕은 밤중에 도망치는 '힘없는 난민'의 모습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구원입니까? 우리도 힘이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구원자를 원할까요? 우리는 아주 본능적으로 '압도적인 힘'을 상상합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회사에서 나를 괴롭히는 상사가 있다면, 그보다 훨씬 높은 회장님이 나타나서 "자네 해고야!"라고 시원하게 처리해 주길 바랍니다. 내 성격이 불같아서 문제라면,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이 임해서 하루아침에 나를 성인군자처럼 싹 개조해 주길 원합니다.
돈이 문제라면 로또 같은 기적을 바랍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성탄의 선물은 언제나 '능력'입니다. 내 초라한 현실을 단번에 뒤집어엎을 수 있는, 헤롯의 칼날을 뚝 부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슈퍼히어로를 원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이 보여주는 구원자의 모습은 우리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마태는 일부러 이 장면을 사용합니다. 이 장면이 그 어떤 강력한 능력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애굽으로 가신 사건을 밤중에 도망치는 ‘힘없는 난민’의 모습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이 그 어떤 강력한 능력보다 더 중요한 구원의 과정임을 선포했습니다.
마태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장면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말입니다.
마태가 보여주고 싶었던 구원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고통 속으로 '함께 들어오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보는 슈퍼히어로처럼 오셨다면 어땠을까요? 악당이 나타나자마자 손가락 하나로 제압하고,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셨다면 말입니다.
물론 보는 우리는 통쾌했을 겁니다. 세상 모든 뉴스가 그분의 승리를 보도하고, 누구도 감히 그분 앞을 막아서지 못했겠지요. 하지만 그랬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를 공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인생의 모든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는 '승승장구의 아이콘'이었다면, 오늘 밤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고개 숙인 우리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아마 그 완벽한 성공담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비수가 되어 꽂혔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압도적인 승리자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꺼내놓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겁니다. 승진에서 또 미끄러져 자존감이 바닥을 친 직장인도,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빚더미 때문에 숨이 턱턱 막히는 가장도, 남들 다 웃는 단톡방을 보며 혼자만 외톨이 같아 울고 있는 학생도...
그 완벽한 분 앞에서는 자신의 초라함이 더 부끄러워 숨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려한 힘' 대신 '초라한 피난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목사님, 하지만 예수님은 그때 갓난아기 아니었습니까? 아기가 무슨 세상의 비참함을 알고, 쫓겨나는 서러움을 알겠습니까?" 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그분은 말 한마디 못 하고, 혼자서는 도망칠 수도 없는 무력한 아기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충격적인 것입니다.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스스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이 애굽으로 가신 사건의 핵심은, 그분이 '아기'로서 어떤 감정을 느꼈느냐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스스로 '가장 무력한 자리'까지 내려오셨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왜 굳이 아기가 되어, 부모의 품에 안겨 허겁지겁 도망치는 신세가 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인생에서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무력한 순간'들을 함께 겪어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마치 갓난아기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오지 않습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빚더미 앞에서, 갑작스런 질병 앞에서, 깨어진 관계 앞에서 우리는 철저히 무력해집니다.
울음 터뜨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 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무력함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마태는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나의 고통을 모른 채 해결책만 던지는 신이 아니라, 스스로 가장 약한 아기가 되어, 우리의 무력함과 억울함의 한복판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그분이 오늘 여러분의 깊은 한숨과 눈물을 닦아주시기 위해, 가장 낮은 곳, 실패의 자리, 도망자의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소식, 이 소식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탄의 선물은, 손이 가득 차 있으면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을 때에만 비로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도 마음속에서 모든 걸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 같아서, 내가 붙들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 늘 긴장한 채 살아오지는 않으셨습니까? 내가 통제해야 안심이 되고, 내가 옳아야 나라는 사람이 지켜질 것 같고, 내가 강해 보여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더 몰아붙이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더 잘하라고, 더 강해지라고 요구하러 오신 분도 아닙니다. 우리가 혼자 감당하느라 지쳐버린 그 자리를 대신 지기 위해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다 잘 해내는 사람아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저는 제 인생을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벅찹니다. 이제는 예수님께 이 삶을 맡기고 싶습니다.” 이 고백이 있는 자리마다 성탄은 부담이 아니라 선물이 되고, 불안은 조금씩 쉼으로 바뀌며, 모든 걸 붙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깊은 자유가 여러분에게 기쁨을 줄 것입니다.
마태는 이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성탄의 선물로 주고 싶어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게 이 성탄의 소식을 여러분의 마음에 더디 믿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해 받아 들여, 복음의 기쁜 소식을 실제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삶이란 선물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