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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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현실(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누가복음 17장 1-10절펼치기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개역개정

서 론

오늘은 2025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이 시점에서 오늘 저는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는 주제를 꺼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 관대함에 대한 주제입니다. 용서에 대한 설교는 인기가 없습니다. 위로와 소망에 대한 메세지는 ‘아멘’소리가 절로 커지지만, ‘용서하라’는  말 앞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지고 입술이 굳어지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우리는 참 이상하게도 이 문제 앞에서 만큼은 발걸음이 무거워집니다. 머리로는 압니다. '풀어야지, 사과해야지, 용서해야지...' 하지만 정작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혹은 "세월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마음으로만 미안해 하면 됐지"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는 ‘용서 관대함'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마음속으로 이렇게 선을 긋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저는 살면서 누구와 크게 싸운 적도 없고, 원수진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평화주의자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중에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거나, 법정 소송을 불사하며 싸우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의 관계는 매끄럽고, 교회 안에서의 표정은 온화하며, 가정은 조용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지점은 폭발하는 화산이 아니라, 우리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싸늘한 냉기’입니다. 평소엔 잘 웃다가도, 유독 그 사람이 말할 때만 묘하게 굳어지는 입꼬리. 누군가 그를 칭찬하면 "아, 그렇지..."라고 영혼 없이 대답하면서 은근슬쩍 깍아내리는 그 한마디.

단체 카톡방에서 다른 사람의 글에는 이모티콘까지 써가며 반응하면서, 그 사람의 글만 못 본 척 스크롤을 휙 넘겨버리는 '선택적 무시’. "에이, 농담이야 농담, 왜 정색을 하고 그래?"라며 웃어 넘기지만, 사실 그 속에는 예전 상대방의 실수를 끄집어내 콕 찌르려는 의도. 이런 '경직된 친절', '정중한 무관심', '뼈 있는 농담'들...

우리는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히지만, 사실 상대방은 다 느끼고 있는데, 그것을 알면서도 마음 속에 그어놓은 그 차가운 선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이러한 ‘잔잔한 혐오’들이야말로 우리 영혼에 덕지덕지 엉겨 붙어 영적인 동맥경화를 일으키는 주범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전환문장

내 마음속에 아주 미세하게 그어놓은 그 사소한 앙금들이 사실은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일 수도 있다는 생각, 인정하기 불편하지만 아픈 진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훨씬 더 자주, 그리고 아주 집요하게 ‘용서와 관대함’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7장 1절에서 10절 말씀은 얼핏보기에 이 본문의 이야기들이 서로 상관없이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심하게 읽는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가 ‘용서’ 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2025년 마지막 주일, 용서의 현실은 어떠한지, 용서의 방법은 무엇인지, 용서의 태도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먼저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아주 현실적이고도 냉정한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현실을 인식시키셨습니다. 제자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할 수 있고, 실족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공동체에도 상처 없는 관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헌신이 넘쳐야 할 제자 공동체를 향해 주님은 너희 사이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없을 수는 없으나'라는 말은 원어로 보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함께 모여 사는 동안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실망시키지 않고 사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의 현실’은 무엇보다 우리의 정직하지 못한 내면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특별히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미성숙하다고 여기는 요즘 세대안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왠지 내가 ‘지는 것’ 같고,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쿨한 척’이라는 갑옷을 입습니다. 싫은데 좋은 척, 불편한데 아무렇지 않은 척, 상처받았는데 대범한 척 연기합니다. 문제는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 사람을 차단해 버립니다. 소위 말하는 ‘조용한 손절’을 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내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투명 인간 취급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가면 쓴 관계’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그 세련된 가면을 벗으라고 도전하십니다. "상처받지 않은 척, 쿨한 척 연기하지 마라. 너희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직한 인정이 없으면, 우리는 영원히 '성격 좋은 위선자'로 남을 뿐, 진정한 화해자로 거듭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렇습니다.주님은 우리가 ‘상처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을 깨고, 우리의 연약하고 죄성이 많은 현실을 직시하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깊은 늪에 빠지는 이유중 하나가 있다면 바로 ‘기대’와 ‘현실’의 괴리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교회니까, 가족이니까, 믿는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니까 나에게 상처 주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그만한 상처도 크게 보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려고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찌를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가까울수록 더 아프게 찌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나를 실족하게 하지 못합니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신과 나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거리를 두는 것은 그리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슬픈현실은 더 좋아질 마음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서의 첫걸음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서로 상처를 줄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슬픈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독특하고도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3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스스로 조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도대체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일까요?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말조심, 행동 조심하라는 뜻일까요?

문맥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포인트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3절과 4절은 연결되 있는데, 문맥으로 보면,  예수님은 용서해야 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제자들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 ‘조심해라’라는 말은 누구한테 합니까?

가해자한테 합니다. “너, 친구 때리지 않게 조심해”, “너, 말 함부로 하지 않게 조심해.” 이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뉘양스는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에게 오히려 “너 스스로를 조심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상처를 받았을 때 그것을 용서하지 않고 마음속에 아닌척, 괜찮은 척, 하지만 마음에 독을 품고 있는 것은 결국 내 인생을 더 크게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음의 파괴력은 생각보다 훨씬 교묘하고 넓습니다. 이것이 용서의 현실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그 화살이 그 사람에게만 날아갈까요? 아닙니다. 그 화살은 돌고 돌아 결국 내 주변의 다른 관계들까지 엉망으로 만듭니다.

예를들어 보겠습니다. 단순히 예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모의 잘못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합시다. 그럼 부모하고의 관계만 망가지는 게 아닙니다. 부모를 비롯한 모든 권위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분들은 권위 있는 자리에 있는 어떤 사람이 도와주려고 할 때 근본적으로 거부감이 들겁니다.

또 다른 예를들어, 내가 어떤 친구에게 크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됩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그 친구를 손절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또 다른 친구를 어색하게 대합니다.

그뿐일까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옆에 있는 직원이 큰 실수를 해서 금전적인 손해를 입혔다고 상상해 봅시다. 물론 속 쓰리고, 따끔하게 지적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 직원을 마음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미운털’을 꽉 박아두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부터는 내 눈에 ‘의심’이라는 필터가 씌워집니다.

그 직원뿐만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다른 직원들까지 삐딱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 친구도 딴짓하고 있는 거 아니야?” 하며 의심하게 됩니다.

반대로 직장인 여러분, 우리를 힘들게 하는 상사 때문에 밤잠 설친 적 있으시죠? 하지만 그 상사를 향한 미움을 해결하지 않은 채, “에이, 더러워서 그만둔다” 하고 이직하면 끝날까요? 신기하게도 그 미움은 내 짐가방 속에 고스란히 담겨서 다음 직장까지 따라옵니다. 새 직장에서 만난 정말 좋은 상사가 업무적으로 필요한 피드백을 줘도, 내 마음이 꼬여 있으니 그걸 ‘공격’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사람도 나 무시하네?” 하며 혼자 상처받고 방어벽을 치게 되는 거죠. 어디를 가도 예민함이 가중됩니다. 스트레스가 커집니다.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고 있는 건, 상대방을 벌주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의 방에 나 스스로를 가두고 고립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토록 용서를 강조하신 이유는, 우리가 미움 속에 갇혀 외톨이가 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 말씀하셨다고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것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현실에서 건져내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냉철하지만 사랑이 담긴 ‘용서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용서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엄청난 명령을 주십니다. 4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어렵게 이야기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계속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표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제자들은 그들의 인격과 성품으로는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즉각 깨달았습니다. 내 인격, 내 도덕성, 내 의지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하루에 일곱 번은커녕, 단 한 번도 온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용서가 참으로 힘듭니다. 우리가 용서하기 힘든 이유중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죄된 본성이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과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철저히 왜곡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거짓말을 하고, 배신을 했습니다.

그 순간 우리 마음속에서는 무서운 작업이 시작됩니다. 상대방의 존재 전체를 지워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를 단지 ‘거짓말쟁이’, ‘배신자’라는 이름으로 각인시키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고, 성실한 직장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 상처를 준 순간, 그 모든 입체적인 모습은 사라집니다.

오직 나에게 잘못한 그 '악한 특징' 하나만을 10배, 20배로 확대하여 그 사람 전체를 규정해 버립니다. 반대로, 나 자신을 대할 때는 어떻습니까? 내가 남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나는 본래 거짓말쟁이야”라고 자책합니까? 아닙니다. "나는 원래 정직한 사람인데, 이번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어.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우리는 기가 막히게 ‘전체적인 정황’을 고려하여 나를 변호합니다. 나는 늘 '정상참작'의 대상이 됩니다. 타인이 욕을 하면 "저런 인격 파탄자!"라고 비난하지만, 내가 욕을 하면 "오죽하면 내가 그랬겠어? 그럴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어"라고 합리화합니다. 신학자 미로슬라프 볼프는 인간의 이 이중적인 죄성을 날카롭게 통찰했습니다.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원수를 인류 공동체로부터 배제하여 '괴물'로 만들고, 동시에 나 자신을 죄인의 공동체로부터 배제하여 '의인'인 척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적나라한 실존입니다. 남은 괴물로 만들고 나는 천사로 포장하는 이 본성을 가지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진정한 용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절규한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런 명령앞에, 그들은 믿음을 더해달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합니다. 보통 용서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한 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사랑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해요!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용서와 사랑은 낯설지 않는데, 용서와 믿음은 낯설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용서와 믿음이 무슨 상관이기에 그들은 믿음을 구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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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말은 ”못 하겠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싫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 "믿음이 부족해서 지금은 안 되겠네요" 라고 핑계를 대는 뉘앙스도 섞여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생각보다 훨씬 더 엄청난 감정적 에너지가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핑계 섞인 고백을 통해서, 용서의 진짜 비밀을 가르쳐주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의 입술에서 나온 그 말이 정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용서는 감정의 문제를 넘어, 철저히 ‘믿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10절까지 보면,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에는 왜 용서에 믿음이 필요한지, 그리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말해주기 위한 비유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종이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종들은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1세기 고대 근동을 연구하는 학자에 의하면 그 당시 종들 중에는 전쟁 포로로 잡혀와 짐승처럼 취급받는 노예가 있었는가 하면, 주인과 깊은 신뢰 관계를 맺고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청지기’ 같은 종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종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는 밭에서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에게 “수고했다, 어서 쉬어라”라고 말하는 대신, “내 먹을 것을 준비해달라.”라고 명령합니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갑질’처럼 보일 수 있고, 불합리한 노동 착취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종의 반응입니다. 그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고백이 나올까요? 이 종이 자존감이 없어서일까요? 주인의 폭력이 무서워서일까요? 아닙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노동의 강도’가 아니라 ‘관계의 깊이’에 있습니다. 이 종은 자신이 본래 어떤 존재였는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거나, 평생 갚지 못할 빚더미에 앉아 노예로 팔려 갈 위기에 처했던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자신을 거두어주고, 먹여주고, 생명을 이어가게 해 준 주인의 은혜가 너무나 컸던 것입니다. 그에게 주인을 위해 밥상을 차리는 일, 밭에서 일하는 수고는 ‘억지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이를 향한 ‘당연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가 100이라면, 지금 겪는 수고는 1도 되지 않음을 알기에, 그는 주인에게 대우받으려 하기보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가 누군가를 용서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혹시 너희가 받은 용서의 크기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니?라는 말씀을 비유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은 내 인격의 훌륭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랑과 용서를 깨달을 때 비로소 용서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감당할 수 없는 큰 빚을 진 자들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말씀하실 때, 자신이 감당할 십자가를 생각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1-2절을 말씀하실 때, 더욱 그러셨습니다. 1절에 보면 주님은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경고하셨습니다.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을 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죄의 대가가 그만큼 처참하다는 뜻입니다. 회개 없는 죄의 결말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깊은 바다, 영원히 홀로 남겨지는 고독의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무시무시한 경고를 정죄하며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구약성경 미가서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마가서 7장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약속하신 놀라운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가서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던지셨습니까? 예수님은 그 약속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내가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의 연자맷돌을 자신의 목에 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빠져야 했던 저주와 진노의 바다, 죽음의 깊은 바다로 우리 대신 뛰어드셨습니다. 그분이 그 차가운 심판의 바다에 빠지셨기에, 우리는 건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기 힘드냐? 하지만 기억해라. 너희가 받아야 할 그 끔찍한 심판을 내가 대신 받았다. 너희가 탕감받은 빚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정말로 믿는다면, 너희가 형제에게 베풀어야 할 용서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용서하기 힘든 대상앞에서, 내가 받은 용서와 관대함에 비하면 내가 베풀어야 할 용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회복될 때, 비로소 우리는 억지가 아닌 진심으로 형제를 용납할 수 있게 된다는 주님의 비유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 론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와 관대함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보이며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완벽한 용서의 기술이 아닙니다. 상처가 전혀 없는 성숙함도 아닙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래도 용서의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려는 작은 믿음이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 뿌리처럼 깊이 박혀 있던 상처들, 서로 얽히고 설켜 있던 감정들, 오해와 지레짐작으로 굳어버린 왜곡된 시선들까지도 주님의 손에 맡겨질 때,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용서와 화해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같이 읽어봅시다. 6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주님이 용서와 화해, 관대한 마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고, 아직 마음이 다 풀리지 않아도, 감정이 따라오지 않아도, 주님 말씀 앞에서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용서의 여정 가운데 있는 태도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용서와 관대함을 거부하는 이유중 하나는 상처가 커서가 아니라, 정의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기 싫기 때문입니다. 내가 용서하고 관대해지면, 그 사람이 그냥 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용서하고 관대해지만 이 억울함이 증명되지 않는 것 같고, 내가 붙들고 있던 마지막 무기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과 공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용서는 정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용서하지 않음은, 내가 하나님보다 더 공의로울 수 있다고 믿는 교만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아주 불편한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합니다. “나는 관대한 사람인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관대한 사람인가?” 우리는 나에게 유익한 사람에게는 관대합니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는 관대합니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한 사람,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 사람, 나의 기대를 무너뜨린 사람 앞에서는 관대함이 갑자기 멈춥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유익했을 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외면하고, 거부했을 때 그때 이미 십자가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선택적이지 않았습니다. 조건이 없었습니다. 기회가 여러 번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가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여러분 마음에 한 사람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이름을 부르기 싫은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굳어지는 사람. 주님은 오늘 그 사람을 당장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참아주었는데, 너도 오늘 그 사람을 내 손에 한 번 맡겨볼 수 없겠니?”

사랑하는 여러분, 용서는 상대를 풀어주는 일이 아니라 내 손에 쥐고 있던 판결문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의 선택적 관대함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그 차별없는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이 끝내어 지게 되고, 이 예배당을 나설 때, 우리의 가정으로, 우리의 일터로, 우리의 관계 속으로, 교회안에 지체들에게 관대함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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