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우리는 지난 5 주 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이라는 제목으로 창세기를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여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정말 이루어질 것인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붙들었지만, 때로는 두려워했고, 기다림에 지쳤고, 하나님의 침묵을 거절로 오해했고, 때로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반복해서 같은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창세기 18장에 이르면 드디어 그 약속이 현실이 되기 직전까지 옵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25년 동안 기다려 온 약속이 성취되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흐름이 다르게 전개 됩니다. 지금까지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어 온 분들이 계시다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본문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우리는“드디어 이제 곧 이삭이 태어나겠구나” 생각하지만, 이삭이 태어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삭은 21장에 가서야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새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대화의 주제가 바뀝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소돔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오늘 본문 20절입니다. “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여기서 우리는 잠시 멈추게 됩니다. “왜 갑자기 소돔 이야기지?”낯설게 느껴집니다. “이삭의 출생 이야기 한가운데 왜 심판 이야기가 나오는지”궁금해집니다.
마치 한창 기쁜 소식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뉴스 속보가 끼어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논리적 흐름이 끊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 이삭의 이야기의 흐름 속에 소돔의 심판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사실 이 장면은 흐름이 끊긴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며 세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었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세상에 복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단지 아들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세상을 복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점에, 다시한 번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주시는 이유를 점검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종착지가 아니라 복의 통로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하나님이 왜 우리를 다른 사람보다 먼저 부르셨는지 깨닫게 됩니다.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복음을 듣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은혜을 알게 하시며, 믿지 않는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셨을까요? 단지 우리 마음이 평안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붙드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입니다.하나님은 우리만 복음을 누리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끼리만, 이 복된 소식을 감격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개척한 이유도 복음의 은혜를 먼저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10절에 보면 이렇게 말해줍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긍휼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이 점에서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우리의 부르심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종착지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도 은혜의 종착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며, 동시에 은혜를 흘려보내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바로 그 자리에 섭니다. 자기 아들의 문제만 붙드는 사람이 아니라, 소돔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 가정의 약속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심판 아래 있는 도시를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복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부르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그는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 했을까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떠한 도전을 가져다 줄까요?!! 여러분과 함께 오늘 본문안으로 들어가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부르셨을까요?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특별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먼저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매우 친밀한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으로 볼 때에, 전혀 이뻐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잘못을 한 것 같은데, 하나님은 매우 그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보이십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성적표에 대한 반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완벽해서 가까이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가까이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까이 하심이, 의무와 결심이 아니라 사랑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못해 가까이하신 것이 아니라, 기꺼이 가까이하셨습니다. 사랑은 상대가 기대에 부응할 때만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와 부족함을 모두 알고도, 여전히 곁에 있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의 실수를 다 알면서도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듯,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지, 무엇을 사랑하시는지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멀리서 지켜보는 관객으로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생각해 보면,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만 보입니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가까워지면 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하고, 그 사람이 아파하는 것을 함께 아파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지 기도를 많이 하거나 성경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점점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 제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라고만 기도했다면, 이제는 “하나님,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전에는 내 계획이 관심사였다면, 점점 하나님의 관심사가 내 관심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 맺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심사가 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우리의 삶의 방향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갔더니, 하나님이 마음 쓰시는 일들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이런 것입니다. 저는 아내랑 결혼했습니다. 아내와 결혼했더니 아내의 친구와 가족들이 나의 친구가 되고 나의 가족이 됩니다. 아내를 사랑해서 관계을 맺었더니, 아내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부르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실 사람이 ‘부르심’이라는 것만 알아도 삶이 매우 여유로워집니다. 싱크대에 설거지가 쌓여 있습니다. 솔직히 설거지 자체가 그렇게 매력적인 일은 아닙니다. 접시를 닦는 행위가 저를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누가 좀 해 줬으면 좋겠다”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해야겠다”는 일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아 있으니 그 사람과 관련된 필요가 자연스럽게 나의 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세상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됩니다. 아름다운 ‘꽃밭’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한때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찾아가 보니, 꽃은 꺾여 있고, 잡초가 무성하고, 여기저기 쓰레기가 널려 있습니다.
예전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정원은 완전히 망가져 있는 겁니다. 그 꽃밭과 아무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잠시 안타까워하다가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꽃밭을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다릅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원래 이곳은 이렇지 않았는데.”, “다시 아름답게 회복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안타까움과 함께 회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생깁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으로 말합니다. 비전은 새로운 창조를 말하거나,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아름다움과 지금의 무너진 현실을 동시에 보면서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회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쓰레기를 줍고, 누군가는 잡초를 뽑고, 누군가는 꺾인 꽃을 다시 세우고, 누군가는 새 꽃을 심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같은 정원을 바라보지만, 맡게 되는 역할은 다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습니다.
“이 꽃밭을 다시 살리고 싶은 이 마음이 내 열심만은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마음에 주신 마음이구나.”이것을 반복해서 재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회복하기 원하시는 세상을 보는 것이고, 사명은 그 회복을 위해 내가 감당할 역할을 찾는 것이며, 소명은 그 모든 마음과 역할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죄악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실상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도시를 심판하겠다는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신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곧 심판을 앞둔 소돔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비전이라고 하면 밝은 미래, 아름다운 가능성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비전은 그것보다 깊습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아름다움과 지금 무너진 현실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모르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 도시에 가득한 폭력과 교만, 약한 자들의 신음과 억눌린 자들의 부르짖음을 이미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현실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단지 “곧 소돔을 심판할 것이다”라는 정보를 알려 주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시는지 드러내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대화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새롭게 알아 갑니다. 아브라함이 알게 된 하나님은 악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묻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왜 심판하십니까? 정말 사랑한다면 그냥 용서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면 답이 보입니다.
우리는 악을 보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존재를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악을 보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존재를 과연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역으로 이런 질문도 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폭행당하는 장면을 본 경찰이 “저는 누구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무관심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랑은 악을 보고도 침묵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울음 앞에서 중립을 지키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은 반드시 행동합니다. 사실 우리도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보면 정의가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거짓과 폭력을 보면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의의 기준이 나를 향할 때입니다. 남의 죄에는 정의를 원하면서, 내 죄 앞에서는 긍휼을 원합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원합니다. 단, 그 정의가 나를 심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불편한 이유는 하나님이 너무 엄격해 보여서가 아닙니다.
그 심판의 기준 앞에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대화를 통해 하나님이 악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성급하게 심판하시는 분도 아니셨습니다. 21절입니다.“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이 표현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하나님은 내려가셔야만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소돔의 죄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르셔서 확인하러 가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조차 신중하고 공의롭게 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법정에서도 죄가 분명해 보여도 곧바로 판결하지 않습니다.
증거를 확인하고, 진술을 듣고, 절차를 거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의는 결과뿐 아니라 과정에서도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소돔을 대하실 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가볍게 넘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죄인을 함부로 다루지도 않으십니다. 심판받아 마땅한 도시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악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심판을 즐기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긍휼 베풀 이유를 찾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분노만 가득한 분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긍휼을 기뻐하시는 분임을 보았기에,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도시를 위해 중보합니다. 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이 표현은 단순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심판주 앞에 서서 유죄가 분명한 도시를 대신하여 긍휼을 구하는 중보자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자기 문제만 붙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히 무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판결은 내려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상황은 너무 분명했습니다.
소돔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말씀하셨다면, 이미 마음을 정하신 것이 아닐까?” “내가 지금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해도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이 정도로 망가진 상황에 대해 긍휼을 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도 비슷한 순간이 있습니다.
반복해서 같은 죄를 짓는 사람을 볼 때, 관계가 완전히 무너진 것처럼 느껴질 때, 사회가 너무 깊이 병든 것처럼 보일 때. 그때 우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건 이미 늦은 것 아닐까?”, “이 사람은 정말 변할 수 있을까?” “하나님도 이제는 포기하신 것 아닐까?” 생각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아마 그런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묻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만약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아브라함의 예상을 넘어섭니다. “내가 그 50명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 전체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 아브라함은 깨닫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심판할 근거보다, 용서할 근거를 먼저 찾으시는 분이시구나.” 그래서 아브라함은 용기를 얻습니다. “그렇다면 45명은 어떻습니까?” “내가 45명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 전체를 용서하겠다”고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의 질문은 계속됩니다. 하나님, 40명은요? 30명은요? 20명, 아니, 심지어 10명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마치 시험하는 것 처럼 물어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내가 용서하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질문이 계속될수록, 아브라함은 숫자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의 깊이를 더욱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의인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면 들수록, 하나님의 자비는 점점 더 크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소돔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지만, 기도가 깊어질수록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배우고 있었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멸망보다 긍휼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무너뜨릴 이유보다 살릴 근거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점점 그 도시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아브라함은 10명에서 멈추었을까요? 아브라함은 50명에서 시작해 10명까지 내려갑니다. 그리고 갑자기 멈춥니다.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여기서 멈췄을까?” “주님, 의인 한 사람 때문에라도 온 도시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끝내 나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10명에서 멈추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쩌면 아브람의 조카 롯의 가족들을 생각하며 10명을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나은 사람일 뿐, 절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숫자를 줄이면, 줄일 수록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앞에 내세울 의인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중요한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가 죄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끝까지 실행할 완전한 의인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결 론
그래서, 결국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10명에서 멈추었다는 메세지로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은 더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소돔 안에 내세울 만한 의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18장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남깁니다. “정말 의인 한 사람이 있으면, 수 많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복음의 중심을 묻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한 사람의 의로움이 수많은 사람의 죄를 덮을 수 있을까요? 정말 한 사람의 순종이 수많은 사람의 불순종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정말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죽으신 한 분의 죽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죄까지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마음속으로 질문합니다. “정말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가요?” 이 질문을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에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가 많은 사람들의 죄를 덮고도 남을 만큼 그 분의 의로움심은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와 같은 성경에 보게 되면 우리의 죄의 크기를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크기를 먼저 말합니다. 우리의 죄가 산처럼 높아 보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은 그 산을 덮고도 남는 바다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한 방울의 먹물이 물 한 컵은 쉽게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먹물 한 방울은 끝없는 바다를 더럽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의로움이 바로 이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죄보다 훨씬 크고 넓고 깊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우리 모두의 죄를 덮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의가 단지 한 인간이 평생 쌓아 올린 도덕적 성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신 완전한 순종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우리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달이 크게 보입니다. 하지만 해가 떠오르는 순간, 달빛은 더 이상 빛을 잃습니다. 달빛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태양의 빛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도 분명 현실입니다. 때로는 죄책감이 짙은 어두운 밤처럼 우리 마음을 덮습니다. “나는 너무 멀리 왔다.”, “같은 죄를 너무 오래 반복했다.”, “하나님도 이제는 지치셨을 것이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의 죄가 작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밤이 버틸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의가 비추면 우리의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는 기쁜 소식을 말해줍니다. 밤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빛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크고 강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덮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면 한 사람이 처형당한 사건처럼 보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른 모든 죽음과 본질적으로 다른 이유는, 그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누구신가에 있습니다. 그분은 단지 선한 사람이 아니셨습니다. 도덕적으로 뛰어난 종교 지도자도 아니셨습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완전한 인간이셨을 뿐 아니라,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 인간의 안타까운 죽음이 아니라, 무한한 가치와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의 이들이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순종은 더 완전하고,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보다 예수님의 피는 더 강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 억지로 눈감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참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완전히 의롭다고 선언하실 충분한 근거를 가지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온전히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8장이 남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그렇다. 의인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안에서 의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지만, 그 자신도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명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도, 의인 한 사람이 친히 되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으로 그 긍휼을 이루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도시를 완전히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을 완전히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끝까지 하나님 앞에 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깊이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 문제만 붙들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하나님 앞에 서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를 위해 내 앞에 서겠느냐?” 하나님은 이 은혜를 알게 된 우리를 중보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동안 예배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지체일 수 있습니다. 삶이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진 친구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지쳐 있는 지체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문제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사람일 수 있습니다.
복음에 아직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웃이나 직장 동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은 많이 했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이미 희망을 접어 버린 바로 여러분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 한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보기도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믿으며 하나님 앞에 그 이름을 다시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한 사람을 떠오르게 하신다면, 그 이름을 붙들고 다시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 이름이 여러분이라도 좋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개인만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전체를 그 자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이음교회를 세상과 거리를 두는 공동체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복음을 깊이 경험한 사람은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끝까지 붙들린 사람은 누군가의 이름을 끝까지 하나님 앞에 붙듭니다.
우리 안에 머문 은혜는 멈추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를 향해 흘러갑니다. 복음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멈추지 않고, 기도와 우정과 사랑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흘러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