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내가 붙든 이삭,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창세기 22장 1-12절펼치기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개역개정

서 론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 시리즈 마지막 시간입니다. 돌이켜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기다림의 여정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기다린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위해 무려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웃음을 주셨습니다. 드디어 창세기 21장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단순히 아이를 얻은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눈물로 기다렸던 인생에, 하나님이 마침내 웃음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의 기다림의 여정 전체가 담긴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말씀을 처음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명령을 하실까?” 궁금해집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결정적인 순간에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미리 다른 숫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왜 이러한 명령을 내리셨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중요한 단서를 미리 알려줍니다.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여기에 중요한 두 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첫 번째 단어는 ‘시험’이라는 단어이고, 두 번째 중요한 단어는 ‘그 일 후에’라는 단어입니다.

이 두 단어를 살펴볼 때,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시험은 어떤 단어일까요? 영어로, Test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시험에는 테스트가 있고, 템테이션이 있습니다. 시험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이지만, 유혹(템테이션)은 인간의 욕심과 사단의 미혹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유혹으로 시험에 들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테스트하십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일 후에”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뜬금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난 25년의 믿음의 여정의 끝에 주어진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갑자기 무리한 요구를 하신 장면이 아니라, 충분히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있는 상황속에서 주어진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이 생식능력이 아예 0이 되고, 그의 가능성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아들을 얻은 뒤에 주어진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이삭을 기적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고 있을 때 주어진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몰라서 확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디에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다시 점검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평소에는 자기 믿음을 잘 모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위기 앞에 섰을 때, 내가 무엇으로 살아왔는지가 드러납니다. 시험은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전환문장

저는 오늘 여러분과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왜 하나님은 이삭을 가지고 시험하셨는지, 그리고 이 시험에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모습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하나님은 왜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시험을 하셨을까요?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단순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인생의 의미였습니다. 존재의 회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바라보는 곳은 단순히 아들을 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부를 때, 한 단어, 한 단어, 천천히 덧붙이면서 아브라함의 마음 한가운데를 정확히 짚어 내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 세 번이나, 아브라함의 아들을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반복의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단순한 자녀가 아니었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단지 “소중한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의미와 희망이 응축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삭을 요구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아들을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요구하심으로,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지만, 어느순간 아브라함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많은 부분 선한 것들이 많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상이 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들이 우상이 됩니다. 좋은 것이 우상이 되는 이유는 ‘지나치게’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나쁜 것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대부분 성공, 사랑, 가족, 재물 다 좋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이것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없으면 안 되는 것”으로 바꿔 버립니다. 돈은 원래 삶을 위한 수단입니다. 관계는 삶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입니다. 성공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돈이 삶의 이유가 되고 관계가 존재의 의미가 되고, 성공이 나의 정체성이 됩니다. 우상은 나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하나님 자리까지 끌어올린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좋은 것들이 지나치게 우리에게 중요해 질 때, 두 가지 면에서 매우 위험해집니다. 먼저는 지속적으로 그것을 얻지 못하면 깊은 좌절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다 해도 결국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마음을 경험합니다. 많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것만 이루면 괜찮아질 거야.”, “저것만 가지면 내 인생이 달라질 거야.”

“저것만 얻으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거야.”생각합니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면, 꿈꾸던 직장에 들어가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면,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그때 비로소 내 삶이 완성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순간 만큼은 정말 그렇게 느껴집니다. 이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있습니다. 너무 기쁩니다. 어쩔 때는 마침내 내가 찾던 의미를 얻은 것 같고, 드디어 내 존재가 증명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놀라울 만큼 익숙한 깨달음이 찾아옵니다. “결국 나는 여전히 나구나.” 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환경은 달라졌습니다. 명함은 바뀌었습니다. 통장 잔고도 늘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의 허전함은 생각보다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던  불안은 그대로이고, 인정받고 싶은 갈증도 여전하며, 비교하는 습관도 사라지지 않았고,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겉으로는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 내면의 문제는 생각보다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상당히 좌절을 많이 합니다.

내 삶의 조건은 달라졌지만, 내 영혼의 상태는 그대로인 상태에 실망합니다. 손에 쥔 것은 많아졌지만, 마음은 기대만큼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패배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내가 필요했던 것은 상황의 변화만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였구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어떤 성취나 관계에 삶의 의미를 걸 때 반복해서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삶의 중심에 두기 시작하면, 결국 우리는 그것에게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착취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창세기 22장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통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읽으며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소중한 아들을 요구하셨을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가?”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단순히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신으로 삼는 모든 것들이 결국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신 것은, 모든 우상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으로 삼는 모든 우상들은 우리에게 ‘이삭’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고대 종교들은 실제로 장자를 요구했습니다. 풍요를 얻기 위해, 안전을 얻기 위해, 신의 호의를 얻기 위해 아이를 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야만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의 우상숭배 이야기를 읽으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참 끔찍하다.” “어떻게 자기 자녀를 신에게 바칠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정직하게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형태만 달라졌을 뿐 본질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제단 위에 올려놓지는 않습니다. 대신 훨씬 더 세련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방식으로 우리의 ‘이삭’을 조금씩 바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성공이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수입, 더 안정된 미래를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서고 밤늦게 돌아옵니다.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것은 가족을 위한 책임감에서 출발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가족을 위해 시작했던 일이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자녀에게 좋은 환경은 제공하지만, 정작 그 아이의 영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아이가 하나님을 믿는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마음속에 어떤 두려움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이야기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사랑합니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신전 앞에서 자녀의 영혼이 조용히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이삭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더 붙드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요구합니다. 청년들에게는 취업이 이삭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예배를 미루고, 기도를 줄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합격이 곧 내 가치처럼 느껴지고, 결과에 따라 존재 전체가 흔들립니다. 그러다 보면 미래를 준비한다는 이름 아래 현재의 영혼이 점점 메말라 갑니다. 취업이라는 신전 앞에 믿음의 평안이 조용히 희생될 수 있습니다.

직장인에게는 승진과 인정이 이삭이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인정받기 위해 양심을 타협하고, 가족보다 일을 우선하고, 사람을 경쟁자로 보기 시작합니다. 상사의 평가 하나에 하루가 무너지고, 성과가 곧 자신의 존재 가치처럼 느껴집니다. 인정이라는 신전 앞에 정직과 관계와 쉼이 조용히 희생될 수 있습니다.

사업하는 분들에게는 매출과 확장이 이삭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고 싶어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숫자가 마음의 평안을 결정합니다. 매출이 떨어지면 존재 전체가 흔들리고, 쉬는 시간에도 계속 일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사람보다 성과가 더 중요해지기 시작합니다.

매출이라는 신전 앞에 안식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조용히 희생될 수 있습니다.

사역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보다 사역의 열매가 더 중요해 질 수 있습니다. 설교 준비는 열심히 하는데 정작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성도들의 반응과 평가에 마음이 흔들리고, 교회가 잘 되어야만, 내 존재 가치가 증명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목회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역의 성공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가족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름 아래 뒤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사역이라는 신전 앞에 가정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조용히 희생될 수 있습니다.

연애와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만 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 “결혼만 하면 안정될 것 같아.” 그 기대가 하나님보다 커지는 순간, 사랑은 선물이 아니라 구원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상대에게 내 외로움과 불안과 공허함까지 책임져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자유보다 집착이 커지고, 감사보다 두려움이 커집니다.

사랑이라는 신전 앞에, 자유와 건강한 사랑이 조용히 희생될 수 있습니다. 결국 우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것만 바치면 너를 만족시켜 주겠다.” 하지만 하나님 아닌 모든 신전은 끝없이 우리의 이삭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우상은 대개 악한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아주 좋은 것의 얼굴로 찾아옵니다. 가족, 성공, 사랑, 사역, 인정, 안정등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질 때입니다. 좋은 것이 최고의 것이 되는 순간, 그것은 우리를 살리는 선물이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는 신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우상은 결국 같은 말을 합니다. “이삭을 내놓으라”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도 한동안 어떤 목표에 몰두하느라 신앙이 뒤로 밀려난 분이 있을 것입니다. 취업일 수도 있고, 성공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예배를 미루고, 기도를 줄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뒤로 미뤘다면, 지금 여러분은 단지 바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진 어떤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드렸던 시간과 마음과 신뢰를 다른 것에게 바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이삭에게 바치고 있었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뒤로 미루고 있습니까?”

무엇을 얻기 위해 예배를 희생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붙들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음을 다른 곳에 바치고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브라함은 순종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하고 모리아 산으로 이삭과 종들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이 있던 곳에서 삼 일정도 걸어서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삼 일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생각하고 씨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삼일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장자였던 이삭을 원하셨다면, 아브라함에게는 삼일이 아니라 바로지금, ‘즉시’순종할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에게 큰 결단을 요구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삼 일 동안 걷게 하셨습니다. 감정적이지 않게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충분히, 지금까지 하나님과 함께 걸어온 모든 길을 회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삼 일길을 걸으며 모리아산으로 갔을까요? 먼저 아브라함은 ‘장자를 바치라’는 명령을 묵상했을 것입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아들을 바쳐라”가 아닙니다. “독자” 곧 “장자”를 바치라는 명령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아들을 바치라”는 말과 “장자를 바치라”는 말이 크게 다르게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 근동 세계에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장자는 단순히 첫째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가문의 미래였고,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갈 존재였고, 재산과 언약을 이어받을 상속자였으며, 가족 전체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자연스럽게 자기 마음의 깊은 곳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이삭을 잃는다는 생각만으로 그의 삼 저체가 무너지는 것 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으로 걸어가면서 이삭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브라함은 하나님보다 이삭이 자신의 마음에 더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이 자기가 알던 다른 신들과 전혀 다른 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수없이 흔들렸습니다. 기근 앞에서 약속보다 현실을 붙들었고, 두려움 때문에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고, 하갈을 통해 자기 방식으로 약속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계속 찾아오시고, 약속을 반복하시고, 언약으로 신실하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는 삼일 길을 걸어가면서 “이삭을 통해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깊은 긴장이 생겼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되었고, 그러나,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단 한 번도 취소된 적이 없었다는 확신,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언약을 붙들었습니다. 이 세가지의 생각속에서 아브라함은 마음 속에서 점점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약속을 이루실 것”이라는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내게 장자를 요구하신다 해도, 그분은 약속을 깨뜨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라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삼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산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알게 된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성품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방법을 몰랐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과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흔들리는 여정속에서 배우게 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 둘만 산을 오릅니다. 이삭은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어깨에 짊어집니다. 산길을 오르던 중, 이삭이 조용히 묻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소망의 기대를 담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제물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거짓말입니다.하나님의 제물은 이미 이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지정하신 장소에 도착합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결박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 속에는 한 아버지의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듭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부르십니다. 이름을 두 번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긴급함과 사랑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어쩌면, 그 순간, 칼은 멈추고, 눈물은 터지고, 삼 일 동안 짓눌렀던 모든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숫양 한 마리가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 숫양은 우연히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몰랐습니다. 이삭도 몰랐습니다. 삼 일 동안 걸어갈 때도 몰랐습니다. 칼을 들고 있을 때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릅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 여러분, 이것이 창세기 22장의 핵심입니다.

결 론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숫양으로 이렇게 극적으로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하필 마지막 순간에, 준비하신 숫양을 보이셨을까요? 단순히 아브라함을 위기에서 건져내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시험하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한 번, 그의 인생 전체가 사실은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한 번, 가슴 깊이 새기게 하시기 위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삭으로 미래의 안전을 추구하고, 안심하려 하며, 불안을 잠재우려고 하는 아브라함에게 이미 준비하신 숫양을 통해서  이미 붙들려 있는 아브라함의 인생을 다시 똑바로 보게 하시는 섭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에서 비롯된 우상은, 단순히 “붙들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두려우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붙듭니다. 불안한 사람에게 “붙들지 마”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한 답이 아닙니다. 염려하는 사람에게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도 충분한 위로가 아닙니다.

두려움에 붙잡힌 사람에게 “우상을 버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잠잠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단순히 욕심의 문제가 아니라, 안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붙든 이것을 놓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우리는 돈을 붙듭니다. 관계를 붙듭니다. 사람의 인정을 붙듭니다.

성공을 붙듭니다. 성과를 붙듭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선물조차 하나님보다 더 세게 붙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확실히 깨닫게 하셨습니다.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의 두려움보다 하나님의 준비하심이 먼저 있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어야 우상을 밀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불안과 염려, 두려움이 몰려올 때 마다, 다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미 준비하신 은혜가 우리를 살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내가 통제해서 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드시기 때문에 유지되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고,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길을 예비하고 계셨고, 우리가 무너질 것 같았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인생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때는 실패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하나님이 더 큰 무너짐을 막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떨어진 회사 때문에 울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곳에 가지 않았기에 지켜진 인생이 있었고, 끝난 관계 때문에 무너졌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관계가 계속되었다면 더 깊이 상처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늦어지는 인생이 답답해서 조급했는데, 돌아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길만 준비하신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갈 사람 자체를 빚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늘 지금 당장 이해하려고 합니다. 왜 기다리게 하시는지, 왜 막으시는지, 왜 늦어지는지 설명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설명보다 먼저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도 모리아산을 올라갈 때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산 위에 올라가 보니 자신보다 먼저 숫양을 준비하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겨우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가 얼마나 완벽하게 준비했는가”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미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숫양을 이미 준비하셔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확신하게 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통해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확신하게 하실까요?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는 깊은 복선을 깔고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훗날 성경은,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장소를 “모리아 산”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 언덕 근처에서,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리아산에서부터, 훗날 골고다에서 이루실 구원을 미리 보여 주고 계셨습니다. 모리아산에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골고다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삭은 번제의 나무를 지고 산을 올라갔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나무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이삭은 죽음의 자리까지 갔지만, 마지막 순간 살아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숫양을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골고다에서는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에수님이모리아산의 숫양이 가리키고 있던 참된 어린양이셨기 때문입니다. 모리아산의 숫양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그러나 골고다의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최종적인 여호와 이레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무너지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어린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다른 것을 붙들 것을 아시고,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를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불안 속에서 살아갈 것을 아시고, 하나님은 이미 자기 아들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우상을 붙들어 내 인생을 통제하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보다 먼저 일하시는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보다 앞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지 못해도 준비하고 계시고, 이해하지 못해도 붙들고 계시고, 흔들리는 순간에도 약속을 놓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너무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붙들며 살지 마십시오. 이미 어린양을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도 끝까지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 여호와 이레의 은혜가 미래 때문에 불안한 마음 위에, 무언가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 위에,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며 살아가는 지친 영혼 위에,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붙들고 살아가던 우리의 마음 위에, 오늘 깊이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

댓글을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