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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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는 양을 쉬게 합니다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시편 23장 2절펼치기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개역개정

서 론

지난주부터 시편 23편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양에게는 목자가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양의 특징과 다윗의 삶과 연결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 목자가 어떻게 실제로 양을 돌보는지를 말해줍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두 장소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푸른 풀밭입니다. 또 하나는 쉴 만한 물가입니다. 푸른 풀밭은 양들이 먹는 곳입니다. 살아갈 것을 얻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쉴 만한 물가는 양들이 긴장을 풀고 머무는 자리입니다. 다윗은 목자이신 하나님이 양에게 살아갈 양식과 살아가면서 누릴 안식을 함께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은 다윗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양식과 안식을 주셨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인 것입니다.

전환문장

그런데 오늘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조금 흥미로운 표현이 나옵니다. 다윗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셨다”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양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양이 언제 눕는지 알았습니다. 왜 쉽게 눕지 못하는지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이 되어야 비로소 긴장을 풀고 쉴 수 있는지도 알았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오늘 본문을 단순히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으로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해서 양은 왜 좋은 풀밭이 있어도, 쉽게 눕지 못하는지, 그리고 다윗은 왜 하나님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로 고백했는지,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는 무엇인지, 시편 23편 2절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먼저, 다윗은 하나님을 푸른 풀밭에 누이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했습니다. 양을 누이게 하는 것이 목자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굳이 목자가 양을 누인다고 표현했을까요? 만약에, 피곤하면 양이 알아서 누우면 되지 않습니까? 좋은 풀밭이 있고, 먹을 것도 있습니다. 그냥 먹고 편하게 누우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양은 단순히 풀밭이 있다고 해서 쉴 수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양은 주변의 위험에 매우 민감한 동물입니다. 양을 키워 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양이 생각보다 쉽게 눕지 않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몸을 내려놓고 긴장을 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필립 켈러가 쓴 『양과 목자』라는 책을 보면 양의 이런 특징을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양은 배가 고프면 눕지 않습니다. 목이 말라도 눕지 않습니다. 해충 때문에 몸이 불편해도 쉽게 눕지 않습니다. 주변에 긴장이 있으면 몸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양은 굉장히 예민합니다. 환경이 조금만 불편해도 쉽게 눕지 않습니다.

이처럼 양은 상황에 굉장히 민감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양이 풀밭에 편안히 누워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은 괜찮다.”이런 뜻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망칠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 주변을 살피지 않아도 되고, 계속 위험을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목자의 돌봄 안에서 긴장을 내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다윗은 양을 바라보면서 자기 인생을 많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인생 자체가 마음 편히 누워 있을 수 있는 인생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들판에서 양을 지켰습니다. 사자와 곰의 위험을 경험했습니다. 골리앗과 싸운 이후에는 사울 왕의 질투를 받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광야와 굴을 전전하며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왕이 된 뒤에는 모든 것이 편안해 졌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신경 써야 할 것은 많아졌습니다. 어쩌면 왕좌는 사람을 안전하게 만드는 자리이기 전에, 지켜야 할 것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을 때는 잃을 것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면 왕위를 지켜야 합니다.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사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사람이 나를 배신하지 않을지도 살펴야 합니다. 어제까지 내 편이었던 사람이 내일도 내 편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권력이 커질수록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경계해야 할 것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편안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더 예민해질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자신의 삶에서 깊이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쫓고 있는 사울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상 26장을 보면 사울왕은 다윗 한 사람을 잡기 위해 군사 삼천 명이나 데리고 나옵니다. 사울은 그렇게 군대가 강력해도 잠을 청하려고 할 때, 군대 한가운데 누워 잡니다.  장군 아브넬이 곁에 있습니다. 자기를 지켜 줄 것들이 사방에 있습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합니다.

머리맡에는 창이 꽂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점점 더 쉬지 못했습니다. 삼천 명의 군인이 있어도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지켜 줄 것을 많이 가진다고 해서, 반드시 안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다니엘서 2장에 보면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 바벨론을 다스렸던 느부갓네살이 등장합니다. 사울이 한 나라의 왕이었다면,  느부갓네살은 당시 세계를 움직일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었는데, 그는 꿈 하나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서 2장 1절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왕위에 있은 지 이 년에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지라.”

참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자기 마음의 불안까지는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가라.” 그러면 갑니다. “오라.” 그러면 옵니다. “이 일을 하라.” 그러면 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게는 “이제 그만 걱정하고 자라.”이렇게 명령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도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모습은 오늘 우리와도 참 많이 닮았습니다. 우리도 몸이 피곤하다고 해서, 그냥 쉬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몸은 침대에 있는데, 마음은 회사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과 밥을 먹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다음 주 일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밤에 불을 끄고 누웠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때부터 정신이 더 또렷해질 때가 있습니다.

“내일 이것 해야 되는데.”, “아까 그 말을 괜히 했나?”, “다음 달은 어떻게 하지?” 몸은 누웠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아직 경계근무 중입니다. 양처럼 예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그렇게 예민한 것일까요?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위험에 대한 예민함이 있습니다. 특별히 미래가 위협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내 직장은 계속 괜찮을까?”, “이 수입으로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회사가 계속 안전할까?”, “나는 앞으로도 계속 필요한 사람일까?”

이 질문들이 힘든 이유는, 전혀 터무니없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에게 예민합니다 사람의 표정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부터 관계가 피곤해집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표정을 계속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처음에 사울은 다윗을 좋아했습니다. 가까이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제는 가까이 챙겨주던 사람이 오늘은 얼굴이 달라져 창을 던집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다윗도 사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충성해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살아가면서 누군가는 나를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관계의 문제가 항상 내 잘못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상처 때문에, 그 사람의 두려움 때문에, 그 사람의 질투 때문에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관계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까지 책임지려고 합니다.  그러면 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굉장히 예민합니다. 사실 우리를 가장 많이 지치게 하는 사람이 때로는 자기 자신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보이지 않는 기준표가 있습니다. “나는 이 정도는 해야 해.” 특별히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일수록 이 기준이 높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생활에서도 나타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말씀을 잘 읽은 날은, 조금 괜찮은 그리스도인처럼 느껴집니다. 반대로 기도를 못 하고 죄를 지으면 곧바로 하나님께 가기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정죄합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 그러다 보면 세상에서는 “나는 성과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교회에서는 “나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마음이 어디에서도 쉬지 못합니다. 인생 전체를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판정 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미래에 예민합니다. 사람에게 예민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예민합니다. 그래서 양처럼 쉽게 눕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예민함 끝에는 공통적으로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통제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굉장히 불편해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미래를 알고 싶어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왜 대처하고 싶습니까? 안심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을 세웁니다. 저축합니다. 보험을 듭니다. 건강을 관리합니다. 자녀를 위해 준비합니다. 다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그것이 우리의 안식의 조건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충분히 준비하면 나는 안전할 거야, 안심할꺼야”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통제하려는 사람은 준비를 끝낼 수 없습니다. 하나를 준비하면 또 하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위험을 막고 나면, 아직 막지 못한 다른 위험이 눈에 들어옵니다. 돈을 모으면 건강이 걱정됩니다. 건강을 챙기면 자녀가 걱정됩니다. 자녀 문제를 정리하면 노후가 걱정됩니다.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하나가 나타납니다.

왜 그렇습니까?완벽하게 안전한 상태라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모아도 모든 위험을 막을 수 없습니다. 건강관리를 아무리 잘해도 미래의 모든 병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할수록 마음은 더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모든 것이 어느 정도 내 통제 안에 들어와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예민해서 쉽게 눕지 못하는 양을 목자는 어떻게 누이는 것일까요? 목자는 양에게 “그냥 편하게 누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양이 누울 수 있도록 먹을 것을 마련하고, 물을 찾게 하고, 위험을 살피고, 양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지켜 줍니다. 양이 자신을 설득해서 눕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의 돌봄을 경험하면서 눕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자기 인생에서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시편 3편을 보면 표제에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아들이 반역했습니다. 자기가 왕으로 있던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쳐야 했습니다. 누가 내 편인지 모릅니다. 누가 나를 배신할지도 모릅니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잠들기 어려운 밤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3편 5절에서 다윗이 놀라운 말을 합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놀라운 것은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역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도망 중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누웠습니다. 왜입니까?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이 지금도 자신을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뢰입니다. 신뢰는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자기 마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붙들고 있지 않아도, 나를 붙드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은 모든 상황이 내 통제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의 돌봄을 믿기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 붙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모든 것이 정리되어야 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이 결과만 나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만 확실하면.” 그때는 좀 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안식은 그런 안식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누운다는 것은 모든 상황이 자기 뜻대로 정리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붙들고 있지 않아도, 나를 붙드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뢰는 다윗을 무책임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망쳐야 할 때 도망쳤고,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다만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결과까지 붙들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같은 압살롬의 반역을 기록한 사무엘하 15장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사무엘하 15장을 보면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반역의 세력이 커지자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왕위를 회복할 수 있을지, 이 반역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함께 도망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옵니다. 언약궤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아주 중요한 상징 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는 다윗에게 이것만큼은 곁에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무엘하 15장 25절과 26절입니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다윗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다시 나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고,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태도였습니다. 이 장면은 다윗이 어디에서 마음의 쉼을 얻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분으로 붙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마저, 자기 안전을 위한 부적처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했지만, 결과까지 자기 손에 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시 왕이 되어야만 합니다.”, “반드시 예루살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결과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다른말로 하면, 주님, 결과는 주님께 맡기겠습니다. 이것이 안식을 주시는 목자를 믿던 다윗의 태도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는 어떻습니까? 예를들어 만야게 취업을 준비한다면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면접이 끝난 뒤에도 계속 그 장면을 되돌려 보고, 면접관의 표정을 해석하고, “이번에 안 되면 어떡하지?”를 반복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는데, 마음은 계속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과까지 내가 붙들고 있어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원하는 것 같지만, 그 결과를 통해 ‘안심’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결과만 나오면 이제 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텐데.” “여기까지만 올라가면 조금은 편해질 텐데.” 그래서 우리는 계속 무엇인가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조금 더 안정된 자리, 조금 더 많은 돈, 조금 더 확실한 관계, 조금 더 분명한 미래를 가지면 그때는 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많이 확보해서 마침내 ‘안심’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양식과 안식을 모두 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둘을 함께 누리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식’을 얻기 위해 ‘양식’을 포기합니다. 책임지면 힘들 것 같고, 도전하면 실패할 것 같아서 아예 부담을 피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양식’을 충분히 확보하면 ‘안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벌고, 조금 더 준비하고, 조금 더 안전해지면 그때는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식 없는 양식은 소진이 되고, 양식 없는 안식은 회피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양식’을 더 확보해서 얻고 싶은 것은 엄밀히 말하면 ‘안식’이라기보다 ‘안심’에 가깝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 “이 정도면 위험하지 않겠다.”, “이만큼 준비했으니 별일 없겠지.” 이것이 ‘안심’입니다. 안심은 상황이 괜찮아져서 마음이 놓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은 다릅니다. 안식은 상황이 다 정리되지 않았어도 나를 붙드시는 목자가 계시기에 마음을 놓는 것입니다.

안심은 말합니다. “이 정도면 안전하니까 괜찮아.” 그러나, 안식은 말합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남아 있지만, 내가 그것까지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어!, 목자이신 하나님이 계시니까.” 고백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식만 많이 쌓아 주셔서 안심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내일을 그분께 맡길 수 있는 안식도 함께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여기며, 그가 푸른 풀밭 위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결 론

그렇습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이 먹이시고, 누이시는 것을 경험하며 그분 안에서 깊은 안식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을 혼자 붙들고 살지 않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목자이신 하나님께 맡기며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의 삶으로 돌아오면, 그렇게 사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말씀은 알겠는데, 마음은 여전히 결과를 붙들고 있습니다. 맡겨야 한다는 것도 아는데,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면, 불안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마음에는 “정말 내가 맡겨도 괜찮을까?” 이런 질문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맡김이 무엇인지 몰라서 못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더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을 정말 그렇게까지 믿어도 되는가?” 이 질문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끝까지 붙들고 싶어 하는 씨름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여전히 자기 안에서 믿음 없음과 싸웁니다. “정말 하나님께 맡겨도 괜찮을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돌보실까?” 이 질문은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의 질문이라기보다, 하나님을 믿고 싶기 때문에 더 깊이 씨름하는 사람의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이런 마음을 아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염려하는지를 아주 현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굉장히 실제적인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더하셨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아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밤에 마음을 놓지 못하는지도 아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씨름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속에 사도바울은 “정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도 되는지?”에 대한 답변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다같이 “로마서 8장 32절을 읽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멘~

바울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십자가로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성자 예수님까지 주신 하나님이 이제 와서 우리를 버려두시는 일은 결코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불안할 때 가장 깊이 묻는 질문도 어쩌면 이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돌보실까?”, “내 인생도 정말 하나님께 맡겨도 될까?” “내가 손을 놓으면 정말 괜찮을까?” 바울은 우리의 상황을 보여주며, 안심시키지 않습니다. “앞으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대신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이미 너를 위해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셨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이라면, 너희의 삶에 정말 필요한 것을 모르시거나, 너희를 버려 두시는 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 안에는 자기 백성을 외면하고 버려두는 성품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그런 성품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선하지 않은 분이 되실 수 없고, 갑자기 신실하지 않은 분이 되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과 다르게 행동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라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밤에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통장에 여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일이 여전히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직 이 상황의 답은 모르지만, 나를 붙드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는 안다.”

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성자 예수님을 내어 주신 그 하나님이라면 아직 내일을 다 알지 못해도 오늘 밤 누울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질문에 즉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도 될 답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먹이시는 목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조금 나누어 주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손에 붙들려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를 믿는 사람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첫 번째로, 목자이신 하나님의 돌봄을 믿으며 안심’하기 위해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을 조금 멈추어 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안하면 자꾸 확인합니다. 휴대폰을 한 번 더 보고, 이미 끝난 일을 다시 생각하고,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미리 계산합니다.

여러분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붙잡는 대신에, 목자의 음성을 듣기 위한 노력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아침에 10분이라도, 말씀 한 구절을 천천히 묵상해 보십시오. 불안이 올라오는 저녁에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찬양 한 곡을 들으며, 조용히 걸어 보아도 좋습니다. 마음속에서 같은 걱정을 반복하기보다, 좋은 경건서적 몇 페이지를 읽으며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특별히 잠들기 전에는 스마트폰을 조금 멀리 두어 보십시오. 참된 안식을 위해, 우리의 삶에 익숙한 것들을 저항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항해야 할 모습들을 작성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기도하며 진지한 태도로 삶을 대해 봅시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이 충만해 질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이 있다면, 목자이신 하나님의 돌봄을 믿으며 관계에서도 ‘안식’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때문에 참 많이 지칩니다. 관계의 안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미안한 것이 있다면 먼저 사과해 보십시오. 서운한 것이 있다면 마음에 쌓아두지 말고 정중하게 말해 보십시오.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답을 주기 전에 끝까지 들어보십시오. 궁금한 것이 있다면, 혼자 추측하지 말고 상냥하게 물어보십시오. 이런 작은 노력들이 부부간에, 동료간에, 공동체간에, 관계에 안식을 만들어 갑니다. 회피해서 얻는 편안함이 아닌, 사랑으로 한 걸음 나아가며 만드는 평안을 위해 노력하는 은혜이음교회 성도님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가 있다면,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누군가에게 목자의 돌봄을 전하며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최근에 『오디세이』를 보면서 마음에 남았던 장면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자기 앞에 찾아온 낯선 사람과 걸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신이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보다 훨씬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작고 연약한 사람에게 베푼 사랑을 “내게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한 주, 한 사람의 필요를 실제로 살펴보십시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조용히 도와주십시오. 혼자 아이를 돌보느라 지친 사람이 있다면, 잠시라도 손을 보태 주십시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 있다면, 밥을 사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아픈 사람이 있다면, 안부 연락을 해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목자가 나를 먹이신다는 믿음은 결국 다른 사람을 먹이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분의 돌봄이 닿도록 작은 손길이 되어 준다면, 어쩌면 어떤 사람은 우리의 말보다, 따뜻한 밥 한 끼에서, 먼저 건넨 연락 한 통에서, 조용히 내민 작은 도움에서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으셨구나.” 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서로의 필요를 돌아볼 때 우리 공동체 안에도 푸른 풀밭이 생기고, 누군가가 잠시라도 마음을 누일 수 있는 자리가 생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신 선한 목자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은 자꾸 뒤처지지 않는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면 넘어진 사람은 뒤에 남고, 길을 잃은 사람은 자기 힘으로 다시 찾아와야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낙오된 한 사람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찾으러 가셨습니다. 다시 길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도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이 뒤처졌을 때 “왜 못 따라오지?”라고 말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한 사람이 다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끝까지 곁에 있어 주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왜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안식이 될까요? 아흔아홉 마리도 그것을 보면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도 언젠가 넘어질 수 있다. 나도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그때도 이 공동체는 나를 버려두지 않겠구나.” 바로 그 믿음이 우리에게 안심을 주고, 마음을 누일 수 있는 안식을 줍니다. 목자께 받은 양식을 서로 나누고, 뒤처진 사람을 기다려 주고, 넘어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며, 길을 잃은 한 사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공동체.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는 양식을 나누며 안심하고, 안심하기 때문에 비로소 안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은혜이음교회가 그런 목자의 마음이 남아 있는 공동체, 누구라도 다시 돌아와 마음을 누일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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