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우리는 지금 몇 주째, 시편 23편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말씀은 1절과 2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구절이면서, 양과 목자의 관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을 읽으면,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1절과 2절에 오래 머뭅니다. 그러다 보니, 의외로 쉽게 지나치는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 말씀을 쉽게 지나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단, 익숙하지 않습니다. ‘소생’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뜻은 대충 아는 것 같은데, 정작 이 말씀이 우리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생각하지 않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은 때로 그냥 지나쳐야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단어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찾아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소생’이라는 단어는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일단,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소생하다’라는 단어는 ‘거의 죽어가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말을 살펴보면 이 의미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여기에서 ‘소생시키다’라고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로 ‘슈브’라는 동사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아주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데, 기본적으로 ‘회복하다.’ ‘일으켜세우다.’ ‘다시 돌아오게 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회개’를 이야기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방향을 잃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생이라는 말에는 하나의 전제가 들어 있습니다.
멀쩡한 사람에게는 소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잘 서 있는 사람을 다시 일으킬 필요도 없습니다. 소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언가가 이미 힘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무언가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제자리를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왜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이렇게 고백했을까요? 도대체 다윗의 영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소생시키는 것과 목자와 양의 관계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왜 양에게 소생이 필요한지, 목자는 어떻게 양을 소생시키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신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이 말씀안으로 들어가 그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왜 다윗은 자신을 양에 빗대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고백했을까요? 목자가 양을 소생시킨다는 것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요?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양의 여러 특징을 살펴봤습니다. 양은 겁이 많습니다. 예민합니다. 흐르는 물을 쉽게 마시지 못하기도 합니다. 몸에 벌레가 붙으면, 편하게 쉬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양에게는 또 하나의 특징 하나가 있습니다. 양은 몸이 뒤집히면, 스스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양의 등이 땅에 닿고, 네 개의 다리가 허공을 향한 상태가 되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몸을 다시 일으키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양은 당황하여 몸부림 치는데, 스스로 일으킬 수 없어 더 지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렇게 있으면, 몸 안에 가스가 차고, 혈액순환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어, 중동의 날씨처럼 매우 덥다면,생명이 더 빠르게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뒤집혀 있는 양은 맹수에게도 너무나 쉬운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을 그냥 멀리서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항상 주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의 목동들은 양들의 목에 종을 달아 놓고, 번호를 적어 놓는다고 합니다. 저도 지난 월요일 가평에 수련회 답사를 다녀오면서, 양들이 있는 곳을 직접 보고 싶어서 다녀왔습니다. 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중앙아시아 사람들이었는데, 몇십 마리의 양들의 목에 조그만한 종이 달아 놓고, 표식을 해 놓았습니다.
목자가 아침, 저녁으로 하는 일은, 양들의 숫자를 세어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숫자가 맞지 않으면, 틀림없이 양이 뒤집혀 있거나, 딴 곳에 빠져 나간 양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 때부터 목자는 말을 타고, 양들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오직, 목자만이 뒤집힌 양을 다시 일어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소생시키는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소생’은 단순히 지친 양에게 조금 쉬게 해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양이 뒤집혀,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양을, 목자가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면서, 영혼의 뒤틀림으로 주저앉아, 일어날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이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인생에 영혼이 뒤틀리고, 뒤집혀 절망에 빠졌을 때는 언제 였을까요? 다윗의 인생을 살펴보면, 두 가지 경우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상황이 다윗의 영혼을 무너지게 만들었던 경우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죄가 다윗의 영혼을 무너지게 만들었던 이유입니다. 어떤 때는, 다윗이 무엇을 잘못해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때는, 자기 욕망과 욕심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한가지 이유로만 넘어지지 않습니다. 삶이 나의 영혼을 뒤흔들 때가 있고, 내가 나를 뒤흔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 두 가지 무너짐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다윗에게는 상황이 그를 무너뜨릴 때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다윗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당시, 다윗은 시글락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몇 일 떠나 있을 때, 시글락에 아말렉이 처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시글락 사람들을 때리고, 노예로 잡아가고, 집들을 불태웠습니다.
다윗과 사람들이 돌아와 그것을 보고 얼마나 슬퍼했는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무엘상 30장 4절입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사무엘서기자는 다윗이 울 기력이 없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함께했던 사람들마저, 슬픔과 분노에 빠져 다윗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다윗의 가족도 아말렉에게 사로잡혔는데, 이제는 함께했던 사람들의 원망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문제가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든 감당해 보겠는데, 어려움이 한꺼번에 겹친 것입니다. 우리들도 살면서 이러한 경험을 하거나, 주위에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압니다. 일이 힘든데, 관계까지 어려워집니다. 관계가 힘든데, 건강까지 좋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겨우 견디고 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또 생깁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 이런 생각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우리도 작은 문제라도, 회복할 틈 없이 계속 겹쳐지는 상황을 만납니다.
사람은 꼭 엄청나게 큰 사건 하나 때문에만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회복할 틈 없이 계속 견뎌 온 것 때문에 무너집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누적된 스트레스, 버텨온 마음이 있습니다. 처음에 문제 하나를 만나면, 그것을 해결하는 데 힘을 씁니다. 그러면 다음 문제를 만날 때는, 우리가 처음과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조금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또 다른 일이 생깁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씁니다. 회복되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문제 하나하나의 크기보다 그 문제들을 견딜 내가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평소라면 넘길 수 있는 말인데, 이상하게 그날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괜찮아?” 라고 한마디 물었는데, 그 순간 눈물이 터질 수도 있습니다. 그 질문이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괜찮은 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힘보다, 더 많은 것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지쳐 가면서도 자신이 지쳐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오래 버팁니다. 나무 버거운데, 누군가가 물으면, “괜찮아요.” 라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
“다들 이 정도는 사는 거지.”,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그러면서 계속 살아갑니다. 우리는 힘든 환경에도 적응해 가려는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견디기 어려웠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집니다.
그런데 익숙해진 것과 회복된 것은 다릅니다. 아픈 것이 익숙해졌다고,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계속 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상처가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아픈 상태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힘들면 “내가 왜 이것도 못 견디지?” 라고 생각합니다. 지치면 “내가 약해졌나?” 라고 생각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이것도 혼자 못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꾸 인간의 한계를 실패처럼 받아들입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몸이 멈춰야 비로소 멈춥니다.
잠을 못 자게 되고, 계속 아프게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지고,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에 감정이 무너지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내가 생각보다 많이 지쳐 있었구나.” 사실 그날 갑자기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조금씩 지쳐 왔던 것입니다. 그날은 단지 그동안 감춰져 있던 것이 드러난 날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 지치다 보면, 그 피로는 몸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영향을 주고, 결국 신앙에도 영향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몸과 영혼이 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는데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기도하려고 앉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찬양을 부르는데 입으로는 부르지만 마음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전에는 마음을 움직였던 말씀이, 어느 날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들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자신을 책망합니다. “내 믿음이 왜 이렇게 됐지?”, “내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건가?” “왜 나는 예배를 드려도 아무 느낌이 없지?”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괜찮은 척했고, 버틸 수 있는 척했고,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척하며 살아왔습니다. 몸도 지쳤고, 마음도 지쳤고, 어쩌면 영혼까지 지쳐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그동안 다윗을 지탱하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흔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이 조금 슬퍼했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울 기력이 없도록 울었다.” 완전히 소진된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양이 뒤집힌 것 처럼, 삶의 무게가 다윗의 영혼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또 다른 뒤집힘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삶의 무게가 아니었습니다. 죄가 다윗의 영혼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뒤집힌 양의 모습을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양이 균형을 잃고 뒤집혀 지는 이유는 두 가지정도 있다고 합니다. 보통 양들은 우묵하고 편안한 곳을 찾아서 그곳에 눕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중심을 잃고 자꾸 넘어지게 되는 양들은 털을 깎이 않아, 몸의 무게가 많이 나가는 양들이 자주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편안한 것을 찾는 마음, 그리고 양털이 많아 움직임이 둔해지면, 양은 넘어져 몸이 뒤집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양의 특징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스스로 넘어졌던 모습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은 스스로 언제 무너졌을까요? 모두가 전쟁에 나갔는데, 자신만 예루살렘에 남았을때입니다. 장군 요압도 전쟁터로 나갔고, 부하들도, 이스라엘 군대도 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서 기자는 마지막에 짧게 덧붙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이 장면이 보여주는 대비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전쟁터에 있고, 다윗은 왕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안정되었습니다. 군대가 있고,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가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 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삶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편안한 자리에서 다윗의 영혼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편안함을 누리고 있을 다윗이 저녁때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밧 세바입니다. 우연히 본 것 자체가 문제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본 것을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사람을 보내 알아봅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듣습니다. “그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멈추어야 할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을 보내 데려옵니다.
이 장면이 중요합니다. 편안함이 사람의 마음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편안함은 욕망을 만들지는 않지만, 욕망을 거절하는 힘을 약하게 만듭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보았을 때, 욕망이 생겼습니다. 문제는 욕망이 생겼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 욕망 앞에서 자신을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라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는데도, 그 경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편안함에 익숙해지고, 원하는 것을 실제로 얻을 힘까지 가진 다윗에게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편안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문제입니다.
편안함을 추구하려고 하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쉼도 필요하고, 안정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편안함을 추구하려고 하는 마음은 우리의 욕망의 절제 또한 약화시킵니다. 편안함의 위험은 단순히 사람을 게으르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욕망을 절제하고 견디는 힘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를 견디는 일입니다. 먹고 싶지만 조금 기다리는 것, 사고 싶지만 사지 않는 것,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 것, 내 뜻대로 하고 싶지만 상대방을 기다려 주는 것, 가질 수 있지만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멈추는 것. 이러한 절제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불편함이 따라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바로 선택하지 않으려면,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를 잠시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편안함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편해지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태, 내 욕망이 바로 충족되지 않는 상태를 견디는 일이 점점 낯설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편안함과 욕망이 만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불편한 것을 아주 빨리 없앨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조금 심심하면 휴대전화를 듭니다. 조금 배가 고프면 바로 주문합니다. 무언가 갖고 싶으면, 며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검색하고, 보고 싶은 것이 생기면 바로 보고, 사고 싶은 것이 생기면 바로 살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점점 ‘원하는데도 하지 않는 상태’에 익숙하지 않아진다는 것입니다 원하지만 기다리는 것, 갖고 싶지만 가지 않는 것, 불편하지만 그대로 견디는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 사실 인간의 성숙에는 이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편안함이 일상이 되면, 욕망이 생겼을 때 우리의 첫 번째 반응이 “이 욕망을 따라야 할까?” 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빨리 충족할 수 있을까?”가 되기 쉽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 삶에서도 아주 자주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소비가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편리함에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그것이 없는 것이 불편해집니다. 예전에는 없어도 괜찮았는데, 이제는 없으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있으면 좋겠다.”가 “이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로 바뀝니다.
욕망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편안함의 기준이 조금씩 올라간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는 그 욕망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힘까지 있었습니다. 권력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과 그 욕망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다윗의 욕망은 마음속의 욕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보내고, 밧세바를 데려오고, 결국 자신의 욕망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것이 힘이 가진 위험입니다. 힘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돈도 그렇고, 지위도 그렇고, 능력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내 안의 욕망과 힘이 만날 때입니다.
이런 다윗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어떨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렇게 답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여러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욕망은 능력이 없어서, 기회가 없어서, 상황이 허락하지 않아서 마음에만 머물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자기 자신을 너무 빨리 좋은 사람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지켜준 것이 우리의 성품이 아니라 우리에게 없었던 기회와 힘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아주 겸손하게 만드는 사실입니다. 내가 권력이 없어서 못한 것과 권력이 있어도 하지 않은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편안함은 ‘나는 이 정도는 누려도 된다.’ 고 속삭이고, 권력은 ‘나는 실제로 그것을 가질 수도 있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욕망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그럼 가져.’ 이렇게 설득합니다. 결국 다윗은 그 목소리를 따랐습니다.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데려왔습니다. 그 순간부터, 다윗은 단순히 밧세바 한 사람을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그렇게, 자기 욕망에 끌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의 영혼은 중심을 잃고 뒤집히게 된 것입니다.
결 론
그렇습니다. 다윗은 두 번이나, 다른 모습으로 무너졌습니다. 한 번은 삶의 무게 때문에 무너졌고, 또 한 번은 자기 욕망과 죄 때문에 무너졌습니다.그런데, 둘 다 다윗 스스로는 다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삶에 짓눌렸을 때도, 죄에 붙들렸을 때도,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조금 더 강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줄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삶에 무게에 짓눌려 절망 가운데 있었던 시글락에서 다윗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셨습니다. 사무엘서기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무엘상 30장 6절입니다.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절망에 빠지면, 사람의 시야가 아주 좁아집니다. 지금 보이는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통이 미래의 전체를 설명해 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는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습니다. 주저앉아 있던 사람이 다시 다음 걸음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여호와를 힘입고,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예고 없이 찾아온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은 무너진 마음을 붙드시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를 주십니다.
암을 진단받은 사람에게는, 치유를 바라면서도 내 생명이 여전히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힘이 생기게 하십니다.
경제적으로 무너진 사람에게는, 실패가 내 인생의 마지막 이름은 아니라는 소망으로 오늘 할 수 있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보는 마음을 주십니다.
영적인 침체를 걷는 사람에게는, 다시 하나님을 바라볼 믿음의 힘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나라면 견딜 수 있을까?”, “나는 아마 무너질 거야.” 이런 생각을 자주합니다.
저도 누군가의 깊은 아픔을 가까이에서 볼 때마다 그 사람의 자리에 저를 놓아 보며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자신이 없어집니다. 나는 저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 같고, 다시 살아갈 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주위에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는 소식과 간증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울고, 여전히 회복을 간절히 바라고, 여전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묻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아픔 한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그날을 살아낼 힘을 주님이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힘으로 미래의 고난을 생각하면 당연히 못 버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하나님은 그날 필요한 힘을 주십니다. 그날 필요한 믿음을 주시고, 그날 필요한 소망을 주시고, 그날을 살아낼 힘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삶의 무게에 뒤집힌 다윗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그의 시편 속에서는 그 고백들이 넘쳐납니다. 시편 138편 3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소생시키신 방법이 언제나 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삶에 짓눌려 무너졌을 때는 힘을 주셨지만, 죄에 빠져 무너졌을 때는 진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용기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단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의 잘못, 회피와 왜곡, 자기 합리화를 폭로하셨습니다. 성경은 이것도 하나님께서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방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글락에서는 다시 걸어갈 용기를 주셨고, 밧세바 사건에서는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지쳐 쓰러졌을 때는 일으켜 주셨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는 멈춰 세우셨습니다. 방법은 달랐지만 목적은 같았습니다. 다윗의 영혼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목자가 양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혼이 뒤틀려 있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어디까지가 상처이고, 어디부터가 내 욕망인지, 우리 자신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냥 너무 힘들었던 거야.”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힘듦을 이유로, 붙들지 말아야 할 것을 붙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이 분명한데도,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끝없이 정죄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영혼을 정확하게 아시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은 상처만 어루만지고 죄는 내버려 두시는 분도 아니고, 죄만 지적하시면서 우리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외면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지친 곳은 붙들어 주시고, 잘못된 곳은 돌이켜 주십니다. 울어야 할 때에는 울게 하시고, 멈춰야 할 때에는 멈추게 하시고, 다시 걸어야 할 때에는 한 걸음을 내딛게 하십니다. 이것이 목자의 손길입니다.
그리고 이 목자의 손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십자가는 고난이 오지 않는다는 약속이 아니라, 가장 깊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증거이기에 우리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딛을 용기를 얻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의 형벌과 정죄를 친히 짊어지심으로, 죄가 우리의 마지막 이름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짓눌렸을 때에도, 죄로 길을 잃었을 때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는 끝난 것이 아니다. 나를 다시 살리시는 목자가 계신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번 한 주도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뜻밖의 은혜로, 뜻밖의 기쁨으로, 우리의 교만함을 내려놓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의 여정을 회상하면서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언제나, 변함없이, 그리고, 반드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진리는 목자이신 하나님은 무너져 있는 우리의 영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찾아내어 소생 시키시는 분임을 믿고, 이번 한 주도 내 힘으로 버티려 하지 말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순간순간, 간구하며, 기도하며, 주님이 내 영혼에 힘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감사하는 한 주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