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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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시편 51장 10-17절펼치기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공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개역개정

서 론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성도들은 회개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시작할 때 회개기도를 드립니다. 대표기도 속에서도 회개기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회개라는 단어를 더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자주 사용되는 단어일 수록, 정확하게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회개를 이야기하지만, 과연 회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 것일까요?,  회개는 하나님께 용납받기 위한 조건일까요? 회개는 죄책감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요? 아니면, 회개는 후회하면서 삶을 바꾸겠다고 결심하는 것일까요?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방식으로 회개를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를 벌을 피하기 위한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를 자기반성과 자기비난 정도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기 위해 먼저 고백해야 할 순서정도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회개가 너무 익숙합니다. 습관처럼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삶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백은 있는데, 변화는 없습니다. 입술은 하나님께 향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 회개는 너무 무겁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죄책감에 짓눌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 자신을 정죄합니다. 어떤 분들은 회개할 때마다 죄를 짓는 자기 자신에게 더 화가 나기도 합니다. "나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일까?”, ”하나님도 이제는 지치셨을 것 같은데.” 그러다 보면 회개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시간이 되어 버립니다.

회개할수록 자유가 아니라 부담을 느낍니다. 회개할수록 하나님보다 자신의 실패에 더 집중합니다.

한 사람은 회개를 너무 가볍게 만들어 버리고, 다른 한 사람은 회개를 너무 무겁게 만들어 버립니다. 한 사람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른 한 사람은 죄보다 자기 자신을 더 크게 바라봅니다. 한 사람은 죄를 보지 못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은혜를 보지 못합니다. 한 사람은 회개 없이 살고, 다른 한 사람은 복음 없이 회개합니다.

전환문장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이런 모습과 다릅니다. 성경의 회개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고, 죄책감에 짓눌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회개를 통해 사람이 살아난다고 말합니다. 회개를 통해 반복해서 짓던 죄에서 벗어난다고 말합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회개를 통해 잃어버린 기쁨이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평생 회개를 해도 여전히 죄책감에 묶여 살아갈까요? 반대로 왜 어떤 사람은 회개를 통해 자유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복음의 기쁨을 더 깊이 누리게 될까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무엇이 문제 일까요?

어쩌면 그 이유는 우리가 회개를 너무 오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고는 들었지만, 정작 회개가 무엇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회개는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회개는 무엇을 향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복음을 아는 사람은 결국 회개를 사랑하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시편 51편에 기록된 다윗의 회개기도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참된 회개의 길이 무엇인지 함께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우리의 회개는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요? 시편 51편의 표제어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시,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다윗은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다윗 인생의 가장 어두운 장면입니다. 그런데, 사실 더 충격적인 것은 죄를 지은 것 자체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시편을 기록한 예배자입니다. 골리앗 앞에서 믿음으로 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죄를 짓고도 곧바로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죄를 덮습니다. 숨깁니다. 합리화합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윗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여러분, 우리는 흔히 죄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죄짓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죄의 가장 무서운 능력은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정당화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설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회개의 가장 큰 장애물은 죄 자체가 아닙니다. 죄를 숨기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보다 죄를 인정할 때에 더 아플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인정하는 순간, 문제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보다 진실을 더 두려워합니다. 죄보다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많은 양을 가진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손님이 찾아오자 자기 양은 잡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하나밖에 없는 어린 암양을 빼앗아 잡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분노합니다. "그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나단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나단이 말합니다. “왕이여, 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다윗은 처음에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그동안은 밧세바를 보았습니다. 상황을 보았습니다. 환경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직면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온 고백이 바로 시편 51편 3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이 말은 단순히 "제가 죄인입니다.” 라는 말이 아닙니다. 드디어 도망치는 것을 멈췄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변명을 멈췄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합리화를 멈췄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시작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바로 정직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앞에서, 더 이상 숨지 않는 것입니다. 더 이상 변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합리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 안에문제가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 비로소 회개는 시작됩니다.

진정한 회개는 두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먼저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수평적으로는 사람에게 책임을 집니다. “하나님, 제가 그 사람에게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성경적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갈수록, 내가 사람에게 지은 죄도 더 분명하게 보게 합니다.

다윗은 다윗은 자기 죄를 축소하지 않았고, 죄의 크기를 줄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의 형량을 낮춰 달라고 협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더 깊이 들어갑니다. “내 죄과를 아오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단순한 자신의 욕심과 탐욕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서부터 떠난 것이 문제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을 아프게 했다는 마음까지 깊이 들어갔습니다. 다윗은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그는 이제 단순히 "내가 간음했구나.”, "내가 살인했구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를 지었구나!” 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밧세바에게, 우리아에게,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그 죄의 무게를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짜 회개입니다.

나의 죄로 상처를 준 것에 깊은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진짜회개는 상대방에게 아품을 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때문에 정말로 힘들었겠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회개가 이 아픔까지 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를 정직하게 인정한 이유와 동기가 자기 중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후회는 하는데, 회개로 나아가지 않는 모습이 우리 가운데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고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이유는, 우리가 연약해서만은 아닙니다.

회개로 나아가지 않고, 후회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후회를 회개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음란물의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또 넘어졌습니다. 괴롭습니다. 자책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눈물도 흘립니다. 그런데 정말 무엇이 괴로운 것일까요? 죄가 괴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또 실패한 자기 자신이 괴로운 것일까요?

하나님을 슬프게 한 것이 괴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생각했던 '괜찮은 그리스도인'의 이미지가 무너진 것이 괴로운 것일까요? 후자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후회입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의 문제와 싸웁니다. 화를 냈습니다.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상대방의 아픔 때문에 회개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관계가 불편해진 것이 싫은 것일까요? 내가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이 괴로운 것일까요?

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반복적으로 폭행했습니다. 결국 아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이혼을 결심했습니다. 남편은 무너졌습니다. 울었습니다.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회개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몇 달 동안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눈물이 거짓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남편의 그 때의 눈물은 진심이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괴로웠을 것입니다. 정말 후회했을 것입니다. 정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심과 회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우리는 진심이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고 말합니다. 우리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자기중심적입니다. 그 남편은 무엇 때문에 울었을까요? 아내가 아파서 울었을까요? 아내의 상처 때문에 울었을까요?, 아내를 사랑해서 울었을까요?

아니면 아내를 잃을까 봐 울었을까요?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회는 내가 잃게 될 것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내가 무너뜨린 관계를 슬퍼합니다. 후회는 "내 인생이 망하게 생겼다.” 를 슬퍼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아프게 했다.” 를 슬퍼합니다. 그래서 후회는 눈물이 있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심에 여전히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를 지어도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들키지도 않습니다. 손해도 없습니다. 체면도 잃지 않습니다. 관계도 깨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죄를 슬퍼할까요? 여기가 회개와 후회가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심지어 회개할 때조차도 자기중심적일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데도, 기도를 하는데도 자기중심적일 수 있습니다. 회개는 관계의 깨어짐을 슬퍼합니다. 후회는 결과를 슬퍼합니다. 후회는 환경이 바뀌면 사라집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계속됩니다. 후회는 문제 해결이 목적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11장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시는 아버지처럼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진영 끝의 천막에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다급해집니다.

그리고 민수기 11장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런데 여러분. 이 장면을 조금 천천히 보십시오. 백성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습니다. 모세를 찾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도할 수 없어서 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보다 불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불이 무섭습니다. 죄를 지은 것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징계가 괴롭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 삶이 불편해진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려고 모세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든 불을 끄고 싶었습니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넘기고 싶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면 우리도 비슷하게 회개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될 때는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관계가 괜찮을 때는 기도가 잘 안 나옵니다. 건강할 때는 회개가 잘 안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원에 가게 됩니다. 관계가 무너집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집니다. 취업이 안 되고, 자녀 문제가 생깁니다.

그때 갑자기 하나님을 찾습니다. 기도합니다. 금식합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 하나님 때문에 울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문제가 생겨서 울고 있는 것입니까?

생각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나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중심에 하나님은 없고, 여전히 내 문제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를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찾아온 고통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슬퍼한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를 슬퍼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회개의 가장 큰 적은 죄가 아닙니다. 죄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자기중심성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의 깊이가 고통의 깊이에 비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크다고 기도가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크다고 회개가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양심이 죽어 있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죄를 짓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아주 작은 죄에도 마음이 무너집니다.

왜 그럴까요? 회개의 깊이는 죄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고 회개의 깊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사실 지금까지 살펴본 회개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회개는 오히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죄가 훨씬 깊고, 하나님을 떠난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합니다. 만약 사람이 자기 죄를 이렇게 깊이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절망하고, 하나님을 피하고, 숨고 싶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정죄에 머물러 버립니다. 자신의 실패를 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절망에 머물러 버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소서” 그의 기도에 담대함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본 사람의 기도인데 소망이 있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본 사람의 기도인데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자신의 추악함을 본 사람의 기도인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다윗은 자신의 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실패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자비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회는 사람을 숨게 만듭니다. 그러나 회개는 사람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죄를 짓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숨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인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다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면 이것이 회개의 가장 신비로운 부분입니다. 회개는 죄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은혜도 보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추악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만약 죄만 본다면 사람은 절망합니다. 만약 은혜만 말한다면 사람은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의 회개는 이 둘을 함께 보게 합니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죄인입니다.그러나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있습니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실패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다윗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댑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갑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가장 먼저 그 분의 언약을 생각했습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그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헤세드를 구했습니다.

다윗은 "제가 회개를 잘했으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에 그는 담대히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의 회개의 근거는 자신의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회개를 오해합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회개를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더 용서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우리가 드리는 회개기도가 완전할까요?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을까요? 오늘 지은 죄를 전부 알고 있을까요? 잊어버린 죄는 없을까요? 모르는 죄는 없을까요? 숨겨진 죄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회개한 죄만 용서받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끝입니다.왜냐하면 우리는 회개하지 못한 죄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이유는 우리가 회개를 잘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참회가 충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눈물이 진실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연쇄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법정에 섰습니다. 그는 재판 내내 울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깊이 후회했습니다. 잘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눈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고백이 너무 진실해서 판사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판사가 말합니다. "당신이 진심으로 뉘우치니 무죄입니다.”

여러분. 그 판사는 어떤 판사입니까? 불의한 판사입니다. 죄를 슬퍼하는 것과 죄값을 치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눈물이 죄값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후회가 정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요구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죄를 그냥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는 죽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만족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죄값을 치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회개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속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전의 죄만 십자가로 용서받고, 구원받은 후의 죄는 회개로 용서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구원받기 전의 죄도, 구원받은 후의 죄도, 과거의 죄도, 현재의 죄도, 미래의 죄도, 모두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습니다. 예수님은 과거만 속죄하신 것이 아닙니다. 현재도 속죄하셨습니다.

미래도 속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바로 여기서 진짜 회개가 시작됩니다. 회개는 용서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용서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사랑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없애기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방향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시편 51편의 내용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누가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를 통해, 회개가 무엇인지 시편 51편의 메세지를 이야기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나옵니다.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고 집을 떠납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죄의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보다가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스스로 정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본 다윗의 고백과 정확하게 같은 고백입니다. 둘째 아들은, 어떠한 죄의 값도 받겠다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매우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어떻게 말해야 할까?  많이 고심했을 것입니다.

그는 걱정도 많이 했지만, 진정한 참회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는데, 거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끝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도, 똑같이,  저 멀리 투벅투벅 걸어오는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둘 다 직감적으로 아버지인지, 아들인지, 알았차렸습니다. 아들은, 긴장했습니다. 아들은 멀리서 뛰어 오시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잘못을 구해야 할지, 용서를 구해야 할지,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도 지평선 멀리 걸어오는 한 사람이 자신의 아들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려온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기쁨과 애통함을 가지고 둘째 아들의 얼굴을 보며 뛰어갔습니다. 그러자, 아들에게 자백할 겨를 조차 주지 않고, 아들을 끌어 안아버렸습니다.

아버지가 껴안자, 아들은 한 없이 울었습니다. 아들은 아낌없는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용기를 내어 회개와 참회를 표현하기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성경은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회개가 아버지의 사랑을 유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아버지의 사랑이 회개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시편 51편에 나오는 다윗의 회개처럼, 둘째 아들의 회개로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회개하면 정말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우리는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많이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회개했습니다. 결심했으며,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또 넘어졌습니다. 또 같은 죄, 분노, 비교, 음란, 염려, 교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안 변하는 사람인가 보다.”

패배주의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전히 회개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혜의 통로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회개가 단순히 행동을 고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내가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죄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같은 죄를 반복할까요? 의지가 약해서만이 아닙니다. 훈련이 부족해서만이 아닙니다. 그 죄를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주는 만족을 여전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죄의 뿌리에는 사랑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히 "이 죄를 끊어야지.” 라고 결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이것을 더 사랑했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나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구나.”를 다시 보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런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셨구나.” 를 다시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사랑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돈보다, 인정보다, 성공보다, 죄가 주는 쾌락보다, 하나님이 더 크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는 단순히 죄를 끊는 행위가 아닙니다. 더 큰 사랑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더 큰 기쁨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더 큰 만족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결심을 한다고 해서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이 바뀌면 변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은 결국 회개를 사랑하게 됩니다. 회개할 때마다 "나는 생각보다 더 큰 죄인이구나.” 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구나."를 발견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구나.” 를 발견합니다. "나는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형벌이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회개는 부담이 아닙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만납니다. 십자가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용납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숨지 말고 돌아오너라. 내가 이미 너를 위해 값을 지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회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회개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회개할 때마다 죄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실패자의 마지막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매일 누리는 은혜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회개할 수 없는 삶에서 회개할 수 있는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돌아오기 시작할 때, 먼저 달려와 우리를 끌어안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앞으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다시 복음을 재발견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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