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우리는 지금 ‘습관의 은혜’라는 주제 아래 설교 시리즈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익숙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도의 습관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후회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회개의 습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로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말씀묵상의 습관’입니다.
말씀묵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신앙생활의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신앙생활 전체를 움직이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좋은 설교를 듣고, 은혜로운 콘텐츠를 접하는 것으로 말씀을 잘 듣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좋은 설교와 강의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많이 듣는 것과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듣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습니다. 메모할 수도 있고, 아멘으로 화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삶은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듣는 것으로 끝나는 순간, 소비하는 콘텐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속이기 시작합니다. 예를들어, 용서에 대한 설교를 듣고 “정말 은혜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용서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삶의 방식은 여전히 불안과 걱정에 지배됩니다. 정직에 대한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손해가 예상되는 순간에는 쉽게 타협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이미 순종했다고 착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자기기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을 거울을 보고 돌아서자마자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사람에 비유합니다. 거울은 얼굴에 묻은 것을 보여 주지만, 씻어 주지는 않습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죄와 욕망을 비추어 줍니다.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교에 감동받는 것은 변화의 시작일 수는 있지만, 변화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소비하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눈앞의 현실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끊임없이 씨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욕망과 충돌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두려움과 충돌합니다. 말씀은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말씀은 언제나 선택을 요구합니다. 결국 신앙은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에 반응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평소 마음에 가장 깊이 새겨 둔 것에 반응합니다. 두려움이 찾아오면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이 드러납니다. 유혹이 찾아오면 평소 사랑하던 것이 드러납니다. 손해를 볼 상황에 놓이면 평소 믿고 의지하던 것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을 듣기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기자는 세 가지를 하지 않기 위해 두 가지를 힘쓰는 사람을 복있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의인이라 말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즐거워하고 묵상해야 할까요? 인생의 수많은 순간 속에서 무엇이 바른 길인지, 무엇이 불의한 길인지, 무엇이 멸망으로 가는 길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즐거워하고, 씨름하며, 말씀을 삶 속에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인의 꾀는 점점 죄인의 길로 이어지고, 결국 오만한 자의 자리에 우리를 앉게 합니다. 악인의 꾀는 생각에 머물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로 이어집니다. 죄인의 길은 결국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만듭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는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인 진리로 바꾸어 놓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원래 이렇게 해야 한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말합니다. 죄는 언제나 점진적입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처럼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습니다.
전환문장
오늘 본문은 바로 이 과정을 보여 줍니다. 악인의 꾀에서 죄인의 길로 들어서고, 마침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아합과 이세벨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 아합이 어떻게 더 악인이 되어 가는지를 살펴보면서, 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습관이 중요한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 론
우리가 살펴볼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는 열왕기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는 단순한 역사책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왜 무너졌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그래서 열왕기 기자는 수많은 왕들 가운데 아합의 이야기를 가장 길게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아합의 이야기를 보면, 한 사람의 욕망이 어떻게 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지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역사를 승리한 사람의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은 권력자의 업적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을 기록합니다. 세상은 왕의 앞모습을 기록하지만, 성경은 왕의 뒷모습을 기록합니다. 사람들 모두에게는 앞모습과 뒷모습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모습과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을 때의 모습은 다릅니다.
왕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합은 매우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탁월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뛰어났습니다.그가 가진 권력을 통해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한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상은 아합을 성공한 왕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합을 악한 왕이라고 평가합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통치를 했지만, 그의 내면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만큼 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어쩌면“권력자의 숨겨진 뒷모습.”이렇게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의 감춰진 내면을 비추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아합왕의 악인의 꾀는 무엇 일까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스르엘이라는 지역에서 시작됩니다. 그곳에는 아합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왕은 궁전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가지 계획을 세웁니다. 왕궁 가까이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땅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봇의 포도원이었습니다. 아합은 나봇을 불러 이렇게 제안합니다. 2절입니다. “아합이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포도원이 내 왕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채소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네가 좋게 여기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아합은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매우 합리적인 제안을 합니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싫으면 충분한 돈을 주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꽤 괜찮은 제안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나봇에게는 인생의 기회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하면 금싸라기 땅이 된 것입니다. 왕궁 옆에 있는 땅이니, 그 가치가 얼마나 올라 가겠습니까?
인접성의 원리에 따르면 이제 나봇은 부자가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라면 어떻겠습니까? 솔깃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나봇은 이 매력적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나봇은 아합에게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이 포도원은 단순한 땅이 아니라 조상의 유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봇에게 포도원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이었습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였습니다. 그 안에는 조상들의 삶이 담겨 있었고, 가족의 기억이 담겨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업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팔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땅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5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나봇은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크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에 저는 팔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은 결코 쉬운 고백이 아닙니다. 보이는 권력을 뒤로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크게 여길 때만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눈앞의 큰 이익을 포기하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소중히 여길 때만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돈보다 말씀이 더 가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매우 흥미로운 대조가 나타납니다. 나봇은 계속해서 “내 조상의 유산”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끝까지 “포도원”이라고 말합니다. 나봇에게 포도원은 유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에게 포도원은 재산이었습니다. 나봇에게는 기억과 의미가 담긴 땅이었지만, 아합에게는 사고팔 수 있는 부동산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했습니다. 아합왕 마음에는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이것이 아합의 가치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두 사람의 가치관을 선명하게 대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게 되자 아합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4절입니다.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 하므로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 여러분, 이 모습이 얼마나 풍자적입니까?
마치 백화점에서 장난감을 사 달라고 떼쓰다가 거절당한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습니다. 왕이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아합의 모습은 단순히 유치한 모습이 아닙니다. 매우 교묘하고 계산적인 행동입니다. 아합은 알고 있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이 강제로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아합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근심과 분노를 사람들에게 드러냅니다. 그것을 가장 먼저 그것을 본 사람이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왕궁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어쩌면 아합은 바로 그것을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대신 피를 묻혀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인의 모습, 악인의 꾀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척하지만, 뒤에서는 다른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런 모습은 아합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숨어 있습니다. 악인의 꾀란 무엇입니까? 악인의 꾀는 단순히 나쁜 생각이 아닙니다. 이익을 따라가는 생각입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마음입니다. 악인의 꾀에는 절대적인 말씀의 기준이 없습니다. 대신에 자신의 좋고 싫음, 탐심과 욕심이 선악의 기준이 됩니다.
인간의 꾀는 언제나 자기의 이익과 유익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지혜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고난과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기준이 자신의 이익과 유익이기 때문에 어제의 기준과 오늘의 기준이 다릅니다. 아침에 한 말과 저녁에 하는 말이 다릅니다. 인간의 꾀는 내 마음의 욕망에 따라 끊임없이 바뀝니다.
결국 악인의 꾀란 자신의 욕망이 기준이 되는 인생입니다. 악인의 꾀를 따라가는 사람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꾀는 대부분 자기 합리화라는 겹겹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그 이야기를 듣고, 이세벨이 움직입니다. 악인의 꾀가 죄인의 길에 드러서는 순간입니다. 악인의 꾀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계산이라면, 죄인의 길은 그 욕망과 계산을 따라 실제로 걸어가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의 길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한 번 실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길로 갈 것인가, 저 길로 갈 것인가”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마음의 방향을 정했다는 뜻입니다. 악인의 꾀를 따를 때는 아직 마음속에 씨름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될까?”, “이 길이 맞을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그러나 죄인의 길에 서게 되면 그 질문이 점점 사라집니다.
죄는 처음에는 우리를 흔들지만, 반복되면 우리를 굳어지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죄가 나중에는 익숙해집니다. 처음에는 찔렸던 양심이 나중에는 무뎌집니다. 처음에는 두려웠던 타협이 나중에는 삶의 방식이 됩니다. 그래서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사람보다 죄인의 길에 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가 더 어렵습니다.
악인의 꾀는 아직 생각의 자리에서 싸우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죄인의 길은 이미 그 생각을 따라 걷기 시작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악인의 꾀에서 죄인의 길로 들어서게 될까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길을 함께 걷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혼자 판단하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영향을 받습니다. 직장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친구들의 생각에 영향을 받습니다. 책과 대중매체와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받습니다.
죄인의 길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너만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잖아.” “다들 이렇게 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이렇게 하는데, 이 길이 그렇게 나쁜 길은 아닐 거야.” 사람은 혼자 죄를 지을 때보다 함께 죄를 지을 때,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낍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나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동의가 진리가 아닌데도, 우리는 다수가 동의하면 마음이 놓입니다. 많은 사람이 걷는 길이 생명의 길이 아닌데도, 우리는 사람이 많으면 안전하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남들도 다 이렇게 한다”는 말은 죄인의 길에서 가장 강력한 합리화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 일이 일어납니다. 아합의 모습을 본 이세벨은 말합니다. “내가 왕을 위해 하겠습니다.” 아합은 바로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아합은 이세벨을 이용해 죄인의 길로 드러섰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세벨의 방법입니다. 이세벨은 대놓고 포도원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힘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합법적인 절차를 이용했습니다. 이것이 악의 교묘함입니다. 악은 언제나 불법의 얼굴로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법과 절차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이세벨은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를 씁니다. 왕의 인장을 찍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이스르엘의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보냅니다. 그 편지에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먼저 이세벨은 금식을 선포하라고 명령합니다. 금식은 원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죄를 회개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공동체 안에 큰 죄가 있거나 재앙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은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이 거룩한 행위를 이용합니다.
마치 이스르엘 성읍 안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만한 큰 죄가 발생한 것처럼 분위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다음 이세벨은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히라고 합니다. 이것은 나봇을 존중하기 위해 높이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공개적인 자리로 끌어내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다시 말해 나봇을 공동체 앞에 세우고,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죄인으로 몰아가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그리고 이세벨은 불량자 두 사람을 세우라고 명령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확정될 수 없었습니다. 두세 사람의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율법의 형식을 빌립니다. 두 명의 증인을 세웁니다. 그러나 그 증언은 진실이 아니라 조작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모욕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저주한 죄는 신성모독이었고, 왕을 저주한 죄는 반역으로 몰릴 수 있는 중대한 죄였습니다. 결국 이세벨은 나봇을 개인 간의 토지 분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왕을 대적한 죄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여기서 이세벨의 계획은 매우 치밀합니다. 그녀는 나봇의 포도원을 직접 빼앗지 않았습니다.
먼저 나봇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이 된 나봇을 처형하게 했습니다. 그 후에 죽은 사람의 땅을 왕이 차지하게 만든 것입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단순히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먼저 진실이 빼앗겼습니다. 그다음 공동체의 양심이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생명과 기업이 빼앗긴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 장로들과 귀족들은 나봇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봇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거짓으로 하나님과 왕을 저주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침묵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의 생사여탈권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아합과 이세벨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봇을 희생시키면 자신들의 평안과 기득권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사람을 보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 모습을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 결정적인 이유로 말합니다. 거짓을 거짓인 줄 알면서도 침묵하는 것. 불의를 불의인 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죄였습니다.
장로들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짓에 동참했습니다. 결국 죄 없는 나봇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말씀이 우리 중심에 놓여 있지 않으면 쉽게 무너집니다. 우리는 객관적인 진실을 알고 있어도 쉽게 집단의 논리에 휩쓸립니다. 다수가 옳다고 말하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따라갑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말을 하면, 그 흐름을 거부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은 다수에게서 벗어나는 순간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들과 귀족들은 사람들을 계속 몰아갑니다. “나봇은 죄인이다.” “빨리 처리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립니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나봇은 죄인으로 둔갑합니다. 진실보다 분위기가 앞서고, 사실보다 여론이 앞서는 공동체는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인의 길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게 됩니다. 죄인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사람은 또 다른 꾀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유익과 입장에 따라 죄의 기준을 바꾸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죄를 정당화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죄는 우리의 행동만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판단 기준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쉽게 저지르는 죄에 대해서는 관대해지고, 자신이 저지르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엄격해집니다. 예를들어, 탈세하는 사람은 탈세 정도는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폭력은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폭력을 쉽게 저지르는 사람은 폭력은 사소한 문제라고 여기면서, 도둑질은 매우 심각한 죄라고 말합니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훔친 것은 적은 것이고 생계형 범죄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하면서, 거액의 뇌물을 받은 정치인은 더 나쁘다고 주장합니다.
죄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속입니다. 저마다 자기 입장과 자기 편의에 맞추어 마음속으로 죄의 기준을 바꾸게 만듭니다. 내가 하는 것은 사정입니다. 남이 하는 것은 죄입니다. 내가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남이 하는 것은 악입니다. 내가 하는 것은 현실입니다. 남이 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길에 선 사람의 모습입니다. 죄인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판단하지 않고, 자기 편의와 자기 유익으로 죄를 판단합니다. 그래서 죄인의 길에 선 사람은 점점 더 돌아오기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죄를 죄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불의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선택을 계속 합리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우리에게 찔리는 말씀이 될 때, 우리는 악인의 꾀와 죄인의 길에서 돌이키는 과정 속에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세벨은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왜 거짓을 꾸며 내면서까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으려 했을까요? 오늘 본문 7절이 그 이유를 보여 줍니다. 이세벨은 아합왕의 모습에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고 있긴 한겁니까? 이런 뉘양스로 말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왕이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왕이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할 수 있습니까?” “권력을 가지고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왕입니까?” 이세벨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세벨에게 권력이란 섬김의 도구가 아니라 지배의 도구였습니다. 그녀는 왕권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왕의 권위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의 생명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나봇의 억울함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이 원하는 것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만한 자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권력을 더 크게 보고, 한 사람의 생명보다 자신의 자리를 더 크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거짓을 말하고 루머를 퍼뜨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부분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자리와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진실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을 선택합니다. 사람들은 사실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철저하게 선동하고 이용하여 조종하려고 합니다. 이 시대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거짓뉴스가 많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99%의 거짓 속에 1%의 진실만 섞여 있어도 쉽게 속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증거보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선택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진실보다 욕망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악입니다. 그 악이 바로 아합과 이세벨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악의 씨앗은 우리 안에도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단순히 과거의 비극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지 아합과 이세벨을 비난하기 위해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탐심과 욕망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가 무서운 이유는 처음부터 무서운 얼굴로 찾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찾아옵니다. 그 다음에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리가 됩니다. 한 번의 생각이 반복되면 습관이 됩니다. 반복된 습관은 삶의 방향이 됩니다. 그리고 굳어진 방향은 세계관이 됩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만한 자의 자리입니다.
결 론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의 죄를 모르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아합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고 해서 속으신 것도 아닙니다. 합법적인 절차 뒤에 숨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즉각적인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시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거짓 증인들에게 먼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장로들과 귀족들에게 먼저 찾아가지도 않으셨습니다. 이세벨에게 먼저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에게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왜입니까?
아합이 가장 큰 책임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아합을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21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이 말씀은 단순한 심판의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죄를 정확하게 직면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합은 자신의 손으로 나봇을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죽였다.” 아합은 법과 절차 뒤에 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마음의 동기를 드러내십니다. 아합은 다른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책임을 결코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과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합법적인 절차 뒤에 숨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죄를 드러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죄인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들을 귀가 없을 때에도 말씀을 들리게 하십니다. 양심이 무뎌졌을 때에도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죄인의 길을 오래 걸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보아라.”, "네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보아라.”
이것이 아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돌이킬 수 있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양심을 찌를 때가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죄인의 길에서 돌이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엘리야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말씀이 들린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말씀 앞에서 마음이 찔린다는 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립 1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한 것은 사람의 능력도, 화려한 프로그램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 말씀은 우리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길을 잃을 때 말씀은 방향이 되어 주었습니다. 두려울 때 말씀은 소망이 되어 주었습니다. 넘어질 때 말씀은 다시 일어설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신앙에서 멀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 주셨으며, 서로의 삶을 말씀으로 붙드는 공동체로 우리를 세워 주셨습니다.
앞으로의 1년도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을 가감 없이 선포하게 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에 기쁨으로 반응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 깊은 곳까지 스며들수록 우리의 걸음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말씀이 우리의 걸음을 바꾸고, 말씀이 우리의 공동체를 세워 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은혜이음교회와 함께 써 내려가실 다음 이야기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은혜이음교회가 악인의 꾀를 분별하고, 죄인의 길에서 멈추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일어나,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