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숨고 싶은 자리에 계신 예수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요한복음 4장 3-14절펼치기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개역개정

서 론

오늘 본문에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정오는 지금으로 말하면 낮 12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태양은 뜨겁습니다. 정오는 사람들이 밖에 나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에는 밭일도 멈추고, 길도 조용해집니다. 그래서 여인들은 낯시간을 피해서 아침과 저녁에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우물가는 단순히 물을 긷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마을의 여인들이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집안 이야기가 오가는 곳이었습니다. 아이들 이야기, 남편 이야기, 마을 소식이 오가는 자리였습니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불평하고, 누군가는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우물가는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물가는 여러 소문이 퍼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누가 결혼했는지, 누가 싸웠는지, 누가 실패했는지,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그래서 우물가는 따뜻한 자리이면서도 때로는 눈치를 보게 되는 자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편안한 자리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피하고 싶은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사람들이 모이는 시간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정오에 오전 12시, 한낯에 나왔습니다. 정오는 사람이 없는 시간, 시선이 없는 시간, 말이 오가지 않는 시간이었습니다. 왜 이시간에 나왔을까요? 사람을 피하고  시선을 피하고 질문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수군거림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사람들이 묻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다섯 번의 결혼. 지금 함께 사는 남자. 실패한 관계들. 남겨진 상처들이 그렇습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그녀도 아침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느 날 대화가 멈추는 순간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속삭임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시간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없는 시간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오를 선택했습니다. 이건 단순한 생활 습관이 아닙니다. 사람을 피해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녀는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시선을 피해 숨으러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시선이 불편해지면 사람을 피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좀 쉬고 싶다”는 마음으로 거리를 둡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마음속에서 다른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겪고 나면 기억보다 해석이 먼저 자라기 시작합니다. 누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는 점점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대신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커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저 사람도 내 이야기를 들었겠지.” 그래서 우리는 과하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웃으면 “혹시 내 이야기 하는 건가?” 생각하고 그리고 누군가 잠깐 말을 멈추면 “내가 들어와서 그런 건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표정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속에서는 이미 판단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움츠러들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려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이렇게 생각합니다.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 “괜히 사람 만나서 마음 쓰지 말자.”, “적당한 거리에서 지내는 게 좋다.” 그리고 관계에 쓸 에너지를 몇 명에게만 몰입하게 되는 모습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어느순간 조용히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납니다. 모임에 가던 사람은 점점 덜 나가기 시작하고, 말이 많던 사람은 점점 말을 줄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혼자 있는 시간을 선택합니다.

사실 이것은 이 여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지면 우리도 안나갑니다. 사람은 상처를 입으면 숨습니다. 실패를 경험하면 조용해집니다. 부끄러운 기억이 생기면 사람들의 세선을 피합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마음속에는 하나씩 ‘숨겨 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조용해지면 다시 떠오르는 관계들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도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부분은 계속 덮어 둡니다. 괜찮은 척하면서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조용한 순간이 오면 문득, 믄득 떠오릅니다.

내가 했던 실패한 선택들, 아직도 마음에서 끝나지 않은 어떤 관계들,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배도 드립니다. 찬양도 합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영역은 조용히 닫아 둡니다. “주님, 여기는 건드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이야기는 그냥 넘어가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께 전부를 열어 드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예수님을 모십니다. 폴 트립이라는 영성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편집한다.”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이 말은 우리가 완전히 다른 인생을 꾸며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짓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기보다, 불편한 진실을 편집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영상을 편집하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어떤 장면은 남기고 어떤 장면은 조용히 삭제합니다. 기억도 편집합니다. 내가 상처받은 장면은 선명하게 남기고 내가 상처 준 장면은 흐리게 만듭니다. 이야기도 편집합니다. 내 실패는 상황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내 잘못은 어쩔 수 없었다고 정리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살아온 삶의 그대로가 아니라 내가 견딜 수 있는 버전의 이야기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조금 덜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남습니다. 나는 조금 덜 부끄러운 사람으로 남습니다. 나는 조금 덜 죄인인 사람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편집하면서 우리의 진짜 마음을 숨깁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이렇게 숨기고 싶은 과거와 상처,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져서, 숨고 있는 수가성의 한 여인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해진 한 여인의 마음을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 숨고 싶어하는 수가성의 한 여인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먼저 오늘 본문이 주목하는 시작점은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정오에 물을 길러 나오는 여인을 찾아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입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이 문장은 짧지만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구절입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반드시 사마리아를 지나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피해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같은 민족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배경을 조금 알아야 합니다.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합니다. 그때 앗수르는 혼열정책을 사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순수혈통을 없에므로, 그들을 앗수르의 문화를 흡수하려고 했습니다. 이 혼열정책으로 생겨난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는 수치였고, 민족을 배반하고 타협한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식사하지도 않았고 같은 그릇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길을 일부러 지나가십니다.  그 여인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피하는 길을 예수님은 일부러 가십니다. 그리고 요한은 한 가지 정보를 더 이야기해 줍니다. 예수님이 피곤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갈증이 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물 곁에 앉아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쉬고 계시던 그 자리로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거십니다. “내게 물을 좀 달라.”

당시 유대인 남자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말을 거십니다. 예수님은 왜 말을 거셨을까요? 먼저는 목이 마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서였을요? 아닙니다. 그녀의 과거를 캐묻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녀와의 관계를 여셨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혹시 시간 좀 괜찮아요?” “커피 한 잔 할래요?, 우리 원투원해요” 이 말의 목적은 사실 커피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물을 좀 달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나는 네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사람들이 너를 피할지라도 나는 너를 피하지 않는다.” 이런 속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닫혀있는 사람, 시선이 불편해서 자기 해석이 강화된 사람, 관계가 힘들어 숨어 있는 사람들이 동굴에서 나올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관심을 가지고 찾아가 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이 다시 열리기 시작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 중 하나는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경험입니다.

숨고 있는 사람이 동굴에서 나올 수 있게 하는 시작은 누군가가 그를 피하지 않고 찾아가는 데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일까요? 왜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것이 사람의 삶에 중요한 변화의 시작이 되는 것일까요? 사람의 가장 깊은 상처가 대부분 같은 자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움츠러 들기 시작하는 이유는 대부분 ‘관계 속에서 경험한 상처’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했던 경험, 누군가에게 무시당했던 경험,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경험. 그 경험이 쌓이면 사람은 숨습니다. 사람을 피합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말을 거십니다. “내게 물을 좀 달라.” 이 순간 그 여인의 삶에 작은 균열이 생깁니다. 사람은 설교로 먼저 치유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찾아감으로 치유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열리는 시작은 누군가가 나를 고치려고 할 때가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피하지 않을 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열리는 시작은 누군가가 나를 판단하지 않고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줄 때입니다. 사람은 누군가 앞에서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는 순간 마음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과거를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관계를 여셨습니다. “내게 물을 좀 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마음이 닫혀있는 그 여인과 대화하셨을까요? 사람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기 전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건드리면 사람은 더 깊이 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서툽니다. 누군가의 깊은 상처나 실패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두 가지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하나는 덮어 두는 방식입니다. “굳이 꺼낼 필요 없다.”, “지나간 일이다.”, “그냥 잊어버리자.”불편한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전개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빨리 정리하려고 판단으로 끝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방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덮어 두면 문제가 계속 남아 있고, 문제에만 집중하면 보면 상처가 아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덮어 두지도 않으셨고, 문제에만 집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 그 여인의 마음의 자리로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본문 7절부터 읽어 보면 대화가 점점 깊어집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대화의 여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건을 요약해서 기록합니다.

그래서 한 절과 한 절 사이에는 기록되지 않은 많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이 한 문장씩만 주고받고 바로 다음 말로 넘어갔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잠깐의 침묵도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의 표정을 살피는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질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한참 동안 이어진 대화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모든 말을 다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대화의 핵심만 우리에게 남겨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장면을 읽을 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사람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관계를 여셨고, 그 관계 속에서 조금씩 더 깊은 이야기로 여인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와의 이야기가 점점 깊어지는 가운데,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우리 다 같이 13절과 1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먼저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여인이 정오에 나오는 이유도, 사람들을 피하는 이유도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던 이유도,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뿌리가 ‘목마름’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보통 목마르면 찾습니다. 물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사랑을 찾습니다. 인정을 찾습니다. 그래서 관계를 붙잡습니다. 사람에게 마음을 기대 봅니다.

“이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채워 줄 수 있지 않을까.” “이 관계라면, 이 공동체라면 내가 채워지지 않을까.” 그래서 사람은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무언가를 붙잡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잠깐 채워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지나면 다시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찾습니다.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다른 관계를 찾습니다. 다른 인정을 찾습니다. 다른 공동체를 찾습니다. 그렇게 사람은 계속 무엇인가를 붙잡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람은 지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붙잡았던 것이 결국 마음을 채워 주지 못한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번 결혼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도덕적인 실패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인생을 목마름의 이야기로 보고 계셨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에게서 물을 찾았습니다. 관계에서 물을 찾았습니다. 사랑에서 물을 찾았습니다. “이 사람이라면 내 인생이 채워지지 않을까.” “이 관계라면 내 마음이 채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열었던 것입니다. 관계를 시작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또 같은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다시 실망합니다. 다시 상처받습니다. 다시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렇게 다섯 번이나 그 물을 마셔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여인은 다른 선택을 합니다. 더 이상 찾지 않습니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계속 실패를 경험하면 마음속에 실망감이 수치심으로, 절망감이 자기 방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목마름 때문에 찾다가 목마름 때문에 숨기도 합니다.

목마름이 사람을 찾게 만들고 목마름이 사람을 숨게 만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숨는 이유는 단순히 사람들의 시선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실패의 기억을 마주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도한 회피가 시작됩니다. 

어쩌면 이 수가성 여인은 거리에서 남자와  여자가 같이 즐겁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보일 때마다,이 여인의 마음 속에는 하나의 기억이 쌓입니다. “나는 또 실패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사람들의 눈을 보면 그 눈 속에 자기 인생의 실패가 비춰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여인이 피하고 있었던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인생의 실패의 기억을 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도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실패한 기억 때문에 사람을 피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무너진 기억 때문에 사람을 피합니다. 어떤 사람은 관계가 깨진 기억 때문에 사람을 피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험에서 떨어진 기억 때문에 사람을 피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들을 만나면 괜히 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서 먼저 피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숨기고 싶은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점점 사람을 피하게 됩니다. 사람들 속에 있지만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웃고 있지만 마음은 닫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억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목마름 때문에 찾다가 목마름 때문에 숨습니다.

결 론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단순히 이 여인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목마름의 근원을 바꾸러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주는 물”은 단순히 목을 축여 주는 물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여인 안에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 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에게서, 관계에서, 인정에서 계속 물을 길어 올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목마름이 없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사람이 상처를 받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가 항상 잘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이 항상 잘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만나면 이제 물을 길어 올리던 우물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아야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인정을 받아야 내가 가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전에는 관계가 잘 되어야 내 인생이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에게서 계속 물을 찾습니다.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해 줄까.”, “이 사람이 나를 인정해 줄까.” “이 관계가 내 인생을 채워 줄까.” 그래서 기대합니다. 그래서 붙잡습니다. 그래서 상처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람에게서 예전처럼 생명을 찾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내 존재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를 떠나도 내 인생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내 존재를 받아 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왜 그렇게 사람에게서 사랑을 찾고, 인정을 찾고, 관계를 붙잡는 것일까요? 사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나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다.” 이 말을 누군가에게서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반응을 계속 살펴봅니다. 내 말을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내가 하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웃는지, 내가 모임에 있을 때 사람들이 나를 반기는지. 살핍니다. 그리고 그 반응을 보며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여기 있어도 되는 사람인가?” 스스로 끊임없이 마음의 독백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눈을 보며 자기 존재의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이 오늘은 떠날 수도 있습니다. 어제는 인정해 주던 사람이 오늘은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목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에 말이 아니라 십자가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라는 증거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증거로서의 행동이셨습니다. 사람은 내가 실패하면 나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내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나를 외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가장 실패한 자리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괜찮은 사람이라서 받아 주는 것이 아니다.” “네가 실패했어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는 선언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이미 사랑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기를 증명하려고 필사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마른 세상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생명의 근원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셨을까요? 단지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사람이”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관계에 목말라하며,  받아 들여짐에 목말라하는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시선을 피하려고 숨어있는 우리를 말씀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부끄러워 숨은 자리, 실패 때문에 숨은 자리, 사람의 시선을 피해 숨은 자리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주님, 목마릅니다. 고백하십시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주님께 있다는 이 진리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을 듣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람들을 찾아나서라는 메세지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간절히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생수를 경험한 사람을 통해 목마른 사람에게 찾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 드리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목마른 사람을 찾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숨은 사람을 찾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이음교회를 그렇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요?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숨어 있는 지체들에게 다가가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된 교회 지체들을 통해서 찾아가십니다. 성령님은 숨이 있는 지체들을 보게 하십니다. 혼자 있는 사람이 보입니다. 모임에서 겉도는 사람이 보입니다. 말이 없는 사람이 보입니다.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왜일까요?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시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가갑니다. 그리고 대화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커피한잔 하자’는 말은 사소한 말이 아닙니다. ‘원투원 하자’는 말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은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거절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내 관심이 부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이렇게 선택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자.”, “괜히 다가갔다가 부담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관심을 마음속에만 두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를 다가가게 하십니다.

은혜가 이어지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우리의 다가감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생수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의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숨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상처에서 치유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공동체에서 복음으로 대화화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찾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같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분들은 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렇게 대화 못하는데…”, “나는 저렇게 깊은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데…” “나는 복음을 저렇게 설명할 수 없는데…” 그래서 마음이 멈춥니다. 부담이 되는 부분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안된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다가가면 주님이 일하신다는 사실도 믿어야 합니다.찾아가면, 은혜가 흘러갑니다.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개척이 되고 사람들마다 처음의 의지와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더 다가가고, 더 찾아가고, 우정을 만들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위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옆에 있는 지체에게 다가가십시오. 은혜이음교회의 존재이유는 복음을 통해, 우정을 만들고, 공동체로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비전에 함께 동역하는 은혜이음 교회 모든 지체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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