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구약성경을 풀어서 설명하시고, 질문에 답변하시며, 그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끌고 들어왔습니다. 이 여인을 성경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이라고 말해줍니다. 이 여인을 끌고 온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 질문은 단순히 율법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예수님께 빼앗길 것 같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끄집어 내려고 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던 것입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통해 함정을 파 놓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면 로마법을 대적하는 사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통치아래에서 유대인들은 사형 집행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빌미로 예수님을 고발하려 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돌로 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소문을 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예수님을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예수님앞에 대리고 왔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 여인은 회복되어야 할 한 영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여인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살려야 할 사람이 아니라 이용할 대상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죄’하려는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정죄하는 사람은 죄인을 회복시켜려 하지 않습니다.
정죄하는 사람은 사람을 존재가 아닌 사건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전환문장
이렇게 오늘 본문안에는 여인을 정죄하며,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끌려나온 한 여인과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오늘 저는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자리에서 시험을 받고 계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여러분들을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죄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그 정죄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어떤 말과 행동을 보이셨는지, 그리고 이 메세지를 듣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눈빛은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기세등등했습니다. 자신들이 지혜있고 똑똑한 것 처럼,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며 성전의 뜰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끄러워 하며 떨고 있는 한 여인을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세웠습니다.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같이 일겠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인을 어디에 세웠습니까? 사람들 한 가운데에 세웠습니다. 이것이 정죄의 무서움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성전의 뜰 한 가운데 세워지자, 그곳이 갑자기 조용해 졌습니다. 모든 시선이 그 여인에게 쏠렸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몸은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마음은 이미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아마 이 여인은 자기 발끝만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 누가 수군대는지, 누가 정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변명도 늦었습니다. 도망도 불가능합니다. 숨을 곳도 없습니다. 그 여인은 지금 사람들 한가운데 세워졌습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멍해진 수치와 두려움,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여인은 이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친구로, 한 영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처럼, 하나의 문제처럼, 하나의 증거물처럼 보고 있다는 것을 그 여인은 온몸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속으로 혀를 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여인의 무너짐을 보며 자기의 옳음을 더 굳게 붙들었습니다.
우리도 이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완전히 낯선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누군가를 성전 뜰 한가운데 세워 놓고 돌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끌어내어 정죄하는 일도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실수를 들을 때, 누군가의 실패를 알게 될 때, 누군가의 약점이 드러날 때 우리는 겉으로 돌을 들지는 않지만 마음 속에서 조용히 판단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대화속에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들은 대화의 주제 한가운데 세우는 일을 자주합니다. 처음에는 상황을 걱정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은 걱정이 아니라 판단과 비판의 이야기가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상처가 어느 순간 구경거리가 되고 누군가의 실패가 어느새 대화의 주제가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할 때에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나는 저 저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무너짐이 어느 순간 나의 옳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부부사이든, 교회든, 직장이든, 친구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든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우리의 비판과 정죄는 틀린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보면 불만이 많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말이 옳다고 해서 그 마음까지 옳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마음 속에 있는 동기가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옳은 말을 하면서도 사람을 살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옳은 말을 하면서도 사람을 일으키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 옳음이 누군가의 마음을 찌르는 칼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죄는 늘 자신을 높은 자리에 세우고 다른 사람을 우리의 대화의 한 가운데 세웁니다. 정죄는 나를 안전한 자리에 세우고 다른 사람을 평가받는 자리에 세웁니다.
정죄는 나를 재판관의 자리에 세우고 다른 사람을 피고인의 자리에 세웁니다. 그래서 정죄하는 사람은 점점 타인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는 눈이 흐려집니다.
그리고 이런 정죄의 마음은 한 사람의 마음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사회의 분위기와 문화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평가하고 서로를 판단하고 서로를 쉽게 정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점점 더 솔직해 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견이나, 편하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늘 사람들을 의식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회적 문화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판단과 비판과 정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늘 두 가지 마음이 함께 자랍니다. 판단받고 싶지 않는 마음과 인정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사실 이 두 마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갑니다. 그 인정받고 싶은 마음 뒤에는 판단받고 싶지 않는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칭창받고 싶은 마음 만큼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인정받기 위해 애쓰지만 그 애씀 속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함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다르게 보면 어떻게 하지?”, “내가 기대에 못 미치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우리는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지만 그 열심 속에는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부담감이 자라납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입니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입니다.
흔들리면 안 된다는 부담감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 부담감의 깊은 곳에는 이런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정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사람들이 나를 안좋게 평가하지 않을까.” 그래서 정죄의 문화 속에서는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숨기기 시작합니다. 정죄의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수를 인정하기보다 숨깁니다. 잘못을 고백하기보다 포장합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보다 조금 더 괜찮은 모습으로 보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는 거짓말이 무기가 되고 자라납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죄가 가벼워서가 아닙니다. 죄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수치심입니다. 사람은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너는 형편없는 인간이다”라는 시선을 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하기도 하지만 존재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거짓말하기도 합니다.
점점 거짓말로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겉과 속이 다른 외식이 자라납니다. 그러다 어느순간,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이중성과 외식, 거짓말과 행동등을 보면서 환멸을 느낍니다. 결국 정죄의 사회와 구조는 인간의 존엄성마져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정죄는 죄를 고치는 힘이 되지 않습니다. 정죄는 사람의 존엄성을 무너뜨리고 타인과 자신을 혐오하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우리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정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서계신 성전 의 뜰에서 일어나는 정죄의 문화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그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돌이 들려 있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돌을 들고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간음에 대한 분명한 규정이 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면 간음한 남자와 간음한 여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명기 22장도 같은 규정을 말합니다.
율법은 간음을 매우 심각한 죄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간음은 단지 한 사람의 실수나 개인의 사생활 문제로 끝나는 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언약을 깨뜨리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이 강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율법이 강한 이유는 하나님이 죄가 얼마나 사람을 무너뜨리는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대충 넘기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죄는 사람의 인생을 찢고, 관계를 깨뜨리고, 공동체를 허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더 이해해야 할 것은, 간음에 대한 사형 규정이 곧바로 사람을 죽이라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반드시 공정한 재판과 책임 있는 증인을 요구했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판단이 결코 가볍게 내려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신명기 17장을 보면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세 명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규정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야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절차가 아닙니다. 이 규정은 굉장히 무거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17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죽이기에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그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왜 하나님은 이런 규정을 두셨을까요?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판단은 가볍게 내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네가 먼저 시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네가 지금 하는 이 판단을 정말 하나님 앞에서 책임질 수 있는가?” “네가 지금 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 결정이 정말 공의라고 확신하는가?”
“너는 지금 분노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증인은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증인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짓 증인은 매우 엄격하게 처벌되었습니다. 신명기 19장을 보면 거짓 증인은 그가 남에게 내리려고 했던 형벌을 자신이 그대로 받아야 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함부로 사람을 정죄하지 못하도록 율법 안에 강력한 책임의 장치를 넣어 두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쉽게 죽이기 위해 주어진 법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죄를 쉽게 하지 못하도록 막는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돌을 들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했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의 죽음을 책임질 수 있는가?” 율법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이 함부로 정죄하지 못하도록 굉장히 엄격한 장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본문의 장면을 보십시오. 율법은 남자와 여자를 함께 다루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남자는 없습니다. 율법은 증인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재판은 없습니다. 율법은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이미 돌을 들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이 표현은 굉장히 강한 표현입니다. 단순히 “소문을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 것 같다”는 추측도 아닙니다. 현장에서 잡혔다는 말은 말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여러분, 간음은 혼자 할 수 있는 죄입니까? 그런데 남자는 없습니다. 여자만 서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정상적인 재판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왜 남자는 없을까요? 본문이 정확히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남자가 도망쳤을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권력 있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고발자들과 연결된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의도적으로 남자를 놓아주고 여자만 끌고 왔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매우 남성 중심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죄는 둘이 지었는데 정죄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지곤 했습니다. 약한 사람, 방어할 수 없는 사람, 수치의 중심에 세우기 쉬운 사람에게 정죄가 몰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장면은 단순한 재판 장면이 아닙니다.
공의를 세우는 재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수치를 이용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죄의 자리에 계신 예수님은 이 장면을 보고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 장면에서 가장 신비로운 행동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굽히셔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어떤 단어를 쓰셨을까요? 본문은 예수님이 무엇을 쓰셨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무엇을 쓰셨느냐보다 왜 쓰셨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에서 사람들의 분노의 리듬에 참여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중은 흥분하고 있습니다. 돌이 들려 있습니다. 정죄의 열기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고, 빠르게 몰아가고 있고, 빠르게 끝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멈추셨습니다. 몸을 굽히셨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이것은 군중의 흐름을 끊는 행동입니다.
여러분, 정죄는 항상 속도가 빠릅니다. 정죄는 오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죄는 자세히 확인하지 않습니다. 정죄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정죄는 상대의 사정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정죄는 그 사람의 회복보다, 내 판단이 옳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정죄는 멈추지 않습니다. 한 번 불붙으면 계속 몰아갑니다.
사람 하나를 완전히 무너뜨릴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정죄의 속도 앞에서 먼저 멈추게 하십니다. 군중이 돌을 들고 앞으로 나아갈 때, 예수님은 몸을 굽히십니다. 사람들이 소리 높여 정죄할 때,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사람들이 한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갈 때, 예수님은 그 흐름을 끊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7절입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은 죄가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간음이 별것 아니라는 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지금 정죄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의 죽음을 책임질 수 있는가?”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인 충고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핵심을 다시 그들 앞에 세우시는 말씀입니다. 정죄는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죽음을 책임지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순간 사람들이 하나씩 돌을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 많은 자로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왜 나이 많은 사람부터 나갔을까요? 성경이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어린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자신이 깨끗하지 않다는 알았을 것입니다. 살아보니 남의 죄를 돌로 칠 수 있을 만큼 자기 손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크게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 내려놓았습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리고 결국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결 론
이제 두 사람만 남았습니다. 정죄받는 여인과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요한은 이 장면을 주목하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복음의 놀라움이 드러납니다. 요한은 정죄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떠난 그 자리에 유일하게 정죄할 자격이 있는 예수님이 여인과 함께 서 계심을 주목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참으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율법의 참된 주인이십니다. 그분만이 돌을 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죄할 자격이 있는 그분이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정죄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돌을 들었고, 정죄할 자격이 있는 예수님은 돌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11절 읽겠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니하노니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여러분, 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을까요? 간음한 죄가 가볍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 여인이 억울한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죄의 무게를 모르셔서 일까요? 더욱더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죄의 무게를 누구보다 더 정확히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죄를 눈감아 주겠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괜찮다,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실 때, 십자가에서 정죄당하실 모습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결국 예수님 자신이 그 여인의 정죄를 짊어지실 것이라는 다짐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떨어져야 할 정죄, 우리에게 떨어져야 할 심판, 우리가 들어야 할 유죄 선언, 우리가 져야 할 수치와 버려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겠다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인을 가운데 세워 놓고 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수치의 한가운데 십자가의 한 가운데에 서셨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여인의 죄를 드러내어 그를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자신의 몸에 짊어지시고 우리를 살리려고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가 그분께로 갔습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돌이 그분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죄가 아니라 은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를 정죄하지 않기 위해 우리 대신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정죄하며 돌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도, 돌에 맞아 무너져 있는 사람에게도 소망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어떤 분들은 누군가에게 들은 한마디 때문에 오래동안 무너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이미 잊었는데 내 안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의 말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늘 자기 자신을 향해 돌을 들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너는 안 변해.”, “너는 부족해.”, “너는 실패한 사람이야.”, “너는 위선자야.” 끊임없이 나를 고소하는 소리에 위축되어 무너져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그 정죄의 소리 한복판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만드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죄보다 더 큰 은혜가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죄가 나를 더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기쁜소식입니다. 너희의 수치가 너희의 이름이 되지 않게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들고 있던 돌도, 자기 자신을 향해 들고 있던 돌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정죄하지 않으신 사람을 내가 계속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살리려고 하시는 사람을 내가 계속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시 일으키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이제 은혜 안에서 다르게 살 수 있다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수치에 끌려다니지 말고, 과거에 붙들려 살지 말고, 은혜 안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복음의 능력을 외치십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정죄보다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수치보다 깊은 사랑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여러분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리는 사람으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이 은혜로 다시 일어나 주님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