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멈출 수 없는 인간과 멈추지 않는 하나님(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창세기 6장 1-8절 · 창세기 6장 14-16절펼치기
창세기 6장 1-8절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세기 6장 14-16절

1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개역개정

서 론

오늘 설교는 운전 이야기로 시작하려 합니다. 운전하시는 분들은 한 번씩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비게이션을 켜고 갑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순간이 옵니다. 네비게이션은 우회전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인을 무시합니다. 그냥 직진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괜찮아 보입니다. 하지만 곧 길이 막힙니다. 도착 시간은 점점 늘어납니다. 그리고 후회하려고 할 그때, 내비게이션이 경로를 재탐색한다고 말해줍니다. 우리의 잘못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리를 들을 때에 압니다. 아까 멈췄어야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운전석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멈춰야 할 때보다, 무너지고 나서야 멈춥니다 몸이 망가지고 나서야 쉽니다. 관계가 깨지고 나서야 돌아봅니다. 일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멈춤’을 계속 미룹니다.

그러다 선을 넘습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제야 후회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후회라는 모습이 싫으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상태로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어쩔 수 없었어.” “다들 이렇게 사는 거야.” 체념이라는 이름으로 후회를 덮어 버립니다.

전환문장

오늘 본문에서도 이 '멈춤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경고가 있었습니다. 기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6장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어떻게 되고 있는지, 중간상황을 보여줍니다. 족보에서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얼마나 악했는가”를 설명도 하지만, “왜 여기까지 왔는가,‘왜 멈추지 못하는가?’ 를 보여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창세기 6장의 말씀을 통해서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 처럼 '멈출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게 멈추지 못해 망가져 가는 우리를 위해 '멈추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셨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성경이 보여주는 멈출 수 없는 인간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무엇을 멈출 수 없는 것일까요? 먼저,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인간은 욕망을 멈추지 못한다고 말해줍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 구절을 두고 사실 학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적인 존재로 보기도 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경건한 셋의 후손으로 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누구냐’ 하는 신학적 논쟁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속했던, 그래서 구별 되어야 했던 존재들이 세상의 화려함을 보고 스스로 그 경계를 허물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하면, 거룩함을 지켜야 할 이들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취해 세상의 욕망과 뒤섞여버린, 이 ‘영적 타락의 흐름’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의도적으로 “모든 여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건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절제 없는 욕망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깊에 봐야 할 것은 보았고, 좋아했으며, 취했다는 과정입니다. 이 세 단계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멈춤이 없습니다. “잠깐만, 이게 옳은가?”라는 멈춤이 없고 “지금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지?”라는 멈춤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이 선택이 나를 살릴까, 망칠까?”라는 멈춤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욕망을 욕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욕망을 포장합니다. 욕망을 “자기계발”이라고 부르고, 욕망을 “힐링”이라고 부르고, 욕망을 “내 행복을 위한 선택”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욕망은 더 이상 멈춰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권리처럼 포장됩니다. “이 정도는 나를 위한 거잖아.”, “이 정도 욕심도 없으면 어떻게 살아?”

“요즘 세상에 이 정도는 다들 해.” 이 말들이 얼마나 익숙합니까? 문제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욕망 앞에서 멈출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정을 앞두고 “기도해 봐야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미 마음은 기울어져 있습니다. 하나님 뜻을 묻는 것 같지만, 실은 내가 원하는 선택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도 이해해 주시겠지.” 그 말로 우리는 욕망을 멈추지 않고 계속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순간부터 욕망을 다루는 존재가 아니라, 욕망에 끌려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이것이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멈출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멈추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이야기에 반감이 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사람의 모든 생각이 언제나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핵심은 자기 중심적으로 흘러가는 방향입니다. 이 말을 다시 풀어보면, 생각은 중립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생각에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 기울기는 항상 ‘나’를 향합니다. 하나님이 중심에서 밀려나는 순간, 우리의 생각은 ‘나의 안전’과 ‘나의 이익’을 최우선 순위로 재정렬합니다.

예를 들어, 용서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다 또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이런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먼저 머리에서 계산합니다. “이 말 했다가 내가 불리해지지 않을까?” 이런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나눠야 한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여유가 없어.”

남들이 도와주겠지, 이런 마음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현실적인 지혜’라고 포장하지만, 자기중심성은 반드시 관계에 악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흘러가며, 관계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안전장치’로 사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내 인생, 내 기분, 내 계획이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듣습니다. 자녀가 내 계획을 벗어납니다. 직장 동료가 나를 힘들게 합니다. 내 중심이 흔들리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때 우리 안에서 본능적으로 솟구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통제 욕구’입니다.

내 평화를 지키기 위해 상대를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집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힘’을 찾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라는 힘을 가짐으로써,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방어막을 칩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라는 힘을 사용합니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서라도 내 뜻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침묵’이라는 힘을 씁니다. 입을 닫아버림으로써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들어 굴복시킵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이라는 힘을 추구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서, 내 말이 곧 법이 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보십시오. 겉모습은 다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입니다. “내 안전과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해, 상황을 내 힘으로 장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지옥의 문은 안에서 잠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중심성은 처음에는 ‘나를 보호하려는 두려움’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을 방치하면 결국 ‘남을 내 뜻대로 조종하려는 힘의 숭배’로 끝납니다. 이 멈출 수 없는 흐름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죄의 실체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중심성으로 살아가려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멈출 수 없는 존재적 모습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멈출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말해줍니다. 인간은 잘못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맥락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욕망으로 살고 있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미 양심으로, 환경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돌이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의 영이 떠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분명한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귀가 먹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마음이 굳어져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죄가 가진 가장 무서운 속성입니다. 처음 죄를 지을 때는 두렵습니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밤에 잠도 안 오고,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멈칫합니다. 그런데 한 번 넘어가고, 두 번 넘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어? 별일 없네? 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네~~ 그때부터는 죄가 죄로 보이지 않습니다. 일상이 됩니다. 문화가 됩니다.

나중에는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이 노아의 때를 이렇게 회상하셨습니다. 39절입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멸망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먹고 마시고 장가가는 일상에만 취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 삶에도 크고 작은 경고들이 계속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신호를 애써 무시합니다. “에이, 설마 무슨 일 생기겠어?”, 영적인 굳은살이 박혀서, 우리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탄식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죄를 항상 축소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인간이 멈추지 못하는 것, 그것은 죄를 죄로 보지 않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욕망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는 생각에서도 멈출 생각이 없었고, 죄의 경고 앞에서도 반복해서 묵살했습니다. 이것이 노아가 살던 시대의 모습이며,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멈추지 못하는 인간을 하나님은 어떻게 바라보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은 화가 나서 등을 돌리셨을까요?, 실망해서 포기하셨을까요? 아니면 조용히 외면하셨을까요? 오늘 본문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은 분노하신 게 아니라, 아파하셨습니다.

여기서 ‘한탄하다’는 단어는 후회가 아닙니다. 부모가 엇나가는 자식을 보며 가슴을 치는 찢어지는 아픔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우리의 태도에 한탄하셨고, 욕망의 노예가 된 우리의 처지를 보며 괴로워하셨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멈추지 않고 죄를 향해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며 아파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절망의 끝에서, 성경은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위대한 한 문장을 선포합니다. 8절입니다.“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도 그 시대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멈추지 않는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입히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신 이야기지만, 노아와 같이 ‘멈추지 않는 죄’가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는 결코 ‘멈추지 않는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쫓아간 것이 아니라, 은혜가 멈추지 않는 우리를 쫓아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탄만 하고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근심만 하고 돌아서지 않으셨습니다. 그 아픈 마음을 품고 무언가를 준비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방주’입니다. 홍수 심판보다 방주가 먼저였습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홍수 이야기는 물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나무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멈추게 하여 살리는 것이  목적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방주를 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한 ‘구조선’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주는 단순한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하나님의 근심, 한탄, 괴로움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정이 ‘형태’를 입고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아픈 사랑’이, 눈에 보이는 거대한 ‘나무 구조물,(방주)’가 되어 사람들 한복판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지은 방주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멈추지 않으셨을까요? 그 대답이 방주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방주를 통해서 하나님이 멈추지 않으셨던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방주를 보면서, 하나님이 일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방주는 욕망을 멈추지 않는 그들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오래참음을 멈추지 않고 계심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면, 충분합니다. 노아도 필요 없고, 방주도 필요 없고, 120년도 필요 없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세상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시면 그만입니다.

방주 같은 복잡한 과정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함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래참음입니다. 방주는 하나님의 오래참고 계시다. 방주는  하나님이 은혜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인이자, 행동이셨습니다.

방주를 떠올려 보십시오. 하루 이틀 짓는 게 아닙니다. 몇 주도 아닙니다. 수십 년입니다. 비도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화를 내고 계셨을까요? 아닙니다. 심판 버튼에 손을 얹고 계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끝내지 않으시고,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참으심이 말이 아니라 나무가 되고, 구조가 되고, 문이 되고 눈에 보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방주입니다. 방주는 “아직 끝내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목소리이며,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아직 은혜가 작동 중이다”라는 신호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놀랍게도 노아 시대를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과 21절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베드로후서 3장 9절에서 다시한 번 언급합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방주의 의미이며, 하나님이 욕망을 멈추지 못하는 인간을 향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방주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열심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가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노아에게 명령하신 방주의 설계도에 있습니다. 방주는 하나님이 직접 설계하신 구조물입니다.

그래서 방주를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배는 아주 이상합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도 될 것이 있습니다. 먼저, 방주에는 결정적인 것이 '없습니다'. 방향을 잡는 키가 없습니다. 추진력을 얻는 돛이나 노가 없습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치밀한 의도입니다. 배에 키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너는 어디로 갈지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기중심성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할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꽉 쥐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내가 계획하고, 내가 방향을 틀고, 내가 속도를 조절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내 뜻대로 움직여야 '안전하다'고 느끼고, 내 통제를 벗어나면 '불안하다'고 느낍니다. 자기중심성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다음 수'를 계산하고 움직여야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방주에 태워 이 '통제 중독'에서 멈추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키 없는 방주'에 태우시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홍수가 터졌는데 배에 키가 없습니다. 얼마나 불안합니까?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은혜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은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더 이상 가지 못하게 막아주는 것입니다.

반면에, 방주에는 '있는 것'이 있습니다. 수많은 '칸'들입니다. 하나님은 "항해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 칸에 들어가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역설입니다. 세상은 "움직여야 산다"고 말하지만, 방주는 "머물러야 산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네가 상황을 장악하라"고 말하지만, 방주는 "너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으니 맡기라"고 말합니다.

방주에 머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내 인생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는 훈련입니다. 내가 상황을 끌고 가려던 손을 놓고, 둥둥 떠가는 물결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은 '내가 움직일 때' 가장 강해지지만, 은혜는 '내가 멈춰 서서 하나님을 바랄 때' 가장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 짐이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자기중심의 무거운 짐입니다. 주님은 그 짐을 내려놓고 방주 안으로 들어와 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내가 더 이상 결정할 수 없는 자리,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방주 안에 머물게 하고 계신 자리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중심으로 인생을 몰고 가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길이 막히게 하시고, 선택지가 사라지게 하시고, 내가 조종할 수 없는 상황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그건 벌이 아닙니다. 그건 실패가 아닙니다. 그건 방주 앞에 서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방주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아무개야, 네가 조종하지 않아도, 나는 너를 놓지 않는다.”

“흘러가도 괜찮다. 내가 책임진다.” 이것이 자기 중심으로 가려는 인간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집요한 은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방주는 우리에게 어떤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줄까요? 방주는 ‘끝까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초청’입니다. 우리는 방주를 그저 비를 피하는 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방주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 한복판에 세우신 거대한 ‘메시지’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방주를 깊은 산속이나 동굴에 숨겨서 짓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밥을 먹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곳에 짓게 하셨습니다. 이 거대한 나무 상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편한 질문'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저 산 위에 덩그러니 놓인 방주가 보입니다.

밥을 먹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저 이상한 배가 보입니다. 방주는 말 없는 웅변이었습니다. “너희의 삶이 이대로 안전한가? 정말 끝이 없다고 믿는가?” 하나님은 오랫동안 그들의 시야에서 방주를 치우지 않으심으로, 그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여주시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소리로도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노아가 나무를 다듬으며 내는 ‘쿵, 쿵, 쿵’ 하는 망치 소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것을 소음으로 여겼겠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 소리는 단순한 공사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굳게 닫힌 죄인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노크 소리였습니다. 망치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하나님의 심장은 멈추지 않고 뛰고 있었습니다.

“제발 그 길에서 돌이켜라, 나에게로 돌아오라.” 방주가 지어지는 모든 과정은, 멸망해가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치열하고도 멈추지 않는 ‘안타까움의 구애’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방주가 완성되고, 창세기 7장 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여기서 ‘들어가라’는 말은 단순히 “가라”가 아닙니다. 원어의 뉘앙스는 “이리 오라”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방주 안에 먼저 계시면서, “내가 여기 있으니 내 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시는 가장 따뜻한 초청입니다.

하지만, 결국 문은 닫혔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문을 닫으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엄중한 현실입니다. 아무리 사랑의 하나님이라도, 죄를 안고 영원히 살 수는 없기에 심판의 문은 닫힐 수밖에 없습니다. 문이 닫히는 순간, 안과 밖의 운명은 완전히 갈라집니다. 안은 생명이지만, 밖은 죽음입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방주의 문 앞에서는 죄인들이 밖에서 죽고, 노아가 안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는 정반대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연히 ‘문 안쪽’, 가장 안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에 계셔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안전한 문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저 거친 골고다 언덕으로 걸어 나가셨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대신 ‘문 밖’에 서기로 작정하신 사건입니다. 방주 때는 하나님이 문을 닫아 사람들을 심판하셨지만,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친히 심판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문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을 향해 침묵하시며 문을 닫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문 밖에서,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비를 홀로 다 맞으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는, 문 밖으로 쫓겨난 자의 처절한 외침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밖으로 나갈 테니, 너희는 안으로 들어오라.” 우리가 받아야 할 ‘문 밖의 심판’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누려야 할 ‘문 안의 평안’을 얻게 된 것입니다.

방주는 나무로 지어졌지만,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밖으로 나가심으로 지어졌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방주, 곧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인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방주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지금 너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느냐?” “지금 너는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느냐?” “지금 너는 내가 마련한 구원의 자리에 들어와 있느냐? “내가 너를 위해 마련한 그 안전한 품 안에, 너는 들어와 있느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아무리 끈질겨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끈질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멈추지 않을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짓는 손을 멈추지 못할 때, 주님은 그 더러운 손을 잡기 위해 당신의 손에 못 박히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죄 없으신 분이 밖으로 쫓겨나심으로 만들어낸,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사랑’의 결과입니다. 나를 증명하려던 헛된 달리기를 멈추고, 끊어내지 못한 죄의 습관을 버리며, 내 힘으로 살아보려던 불안한 질주를 멈추고, 나를 위해 멈추지 않고 달려오신 예수님의 그 사랑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 멈추지 않는 사랑에 완전히 항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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