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우리의 하루는 대체로 비슷한 리듬으로 시작됩니다. 알람이 울리고, 어제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어제와 비슷한 길로 집을 나섭니다. 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늘 하던 업무, 늘 보던 사람, 늘 오가던 공간들입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집어 듭니다. 오늘 해야 할 일들, 갑자기 추가된 일정들, 지금 답하지 않으면 미뤄질 메시지들. 하루는 그렇게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고 앞으로 흘러갑니다. 그 흐름에 발을 맞추다 보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곤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삶의 중심에 두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싫어서도 아닙니다. 기도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밀어낸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루 안에 너무 많은 일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의식할 틈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하루를 살면서 수많은 결정을 하고, 수많은 감정을 겪고, 수많은 말을 주고받았는데, 하루가 끝나고 돌아보면 그 하루 어디에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선택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이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쓰였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대도 삶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너무 오래 믿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알고 있었고, 절기를 지키고 있었고, 예배의 형식에도 익숙했습니다.
문제는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만큼 반복되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만나도 삶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관념’으로만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도 따르지 않는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시대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5절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말하는 빛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고, 필요로 했고, 도움을 기대하며 몰려왔습니다.
그럼에도 요한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았음에도 그 빛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예수님을 필요할 땐 붙들었지만, 하나님으로 모시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하루 속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삶의 중심에 두지 못한 채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눈앞에서 표적까지 경험했는데도 삶의 방향은 그대로였을까요? 왜 빛은 그들에게 분명히 비쳤는데, 그 빛이 그들의 일상의 선택과 감정, 삶의 중심까지는 들어오지 못했을까요?
오늘 저는 이 질문 앞에서 여러분을 본문으로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이 질문에 어떤 답을 제시하는지 살펴보며,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모습이 오늘 우리의 삶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일상에서는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사는 걸까요? 왜 우리는 일상에서 하나님을 그리 크게 의식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이 안 계셔서 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서일까요? 요한복음은 이 이유를 믿음의 양이나 열심의 부족에서 찾지 않습니다. 요한은 전혀 다른 지점을 파고듭니다.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던지고 있는 질문의 방향에서 찾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은채 살아가는 이유를 하나님을 너무 작은 질문 속에만 가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이유가 되는지 요한의 논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찬찬히 읽어보면 한 가지 특징이 눈에 들어옵니다. 사건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질문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드러나게 합니다.
먼저, 사람들의 질문을 받는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세례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당신이 엘리야입니까?”, “당신이 선지자입니까?” 이 질문의 속뜻은 “당신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분입니까?”, 이런 뜻입니다. 다시말하면 “당신은 우리의 기대에 들어맞는 인물입니까?” 라는 의도가 담긴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머릿속에 기대하는 답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라면 이래야 하고, 엘리야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고, 선지자라면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기대의 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라는 질문이 아니라, “당신이 우리 기준에 맞는지 확인하겠습니다”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던진 질문의 방향이 요한복음 내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이 질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제 대상을 바꿉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 질문하는 무리들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표적을 보이겠습니까?” 이 질문의 속뜻은 “당신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라면, 우리가 납득할 만한 증거를 먼저 내놓으십시오.” 다시 말해, 당신이 누구인지부터 증명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요한복음 6장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떡을 먹고 배부른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누구이기에 이런 말을 합니까?” 같은 질문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8장에 이르면 질문은 더 노골적이 됩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도 이 질문은 멈추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계속해서 받으시는 질문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이라는 사실을 요한은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말해줍니다. 이 장면들을 우연히 나열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배치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었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자기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하려 드는 그들의 '태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기도 전에, 이미 자기들 생각대로 그분을 단정 짓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들은 겉으로 보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묻는 질문 같지만, 실제로는 내가 생각하는 메시야가 맞는지 '확인하려는 질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 기대치에 딱 맞는 분입니까? 아니면 실망스러운 분입니까?”
사람들이 하는 이 질문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내 생각의 틀' 안에 딱 맞게 가두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이 질문들이 계속 반복되는 구조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드러냅니다. 왜 반복적으로 이 질문들을 보여줄까요? 이 질문들로는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놓는 순간, 그 사람을 깊이 만날 수 없듯이, 예수님도 그렇게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려는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내 생각의 틀 안에 가두려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으로는 일상 속에서 그분을 계속 의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으로는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질문의 출발점 자체를 뒤집는 전혀 다른 선언으로 요한복음을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이 문장은 종교적인 문장이 아닙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세상이 시작되는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가 아니라, 내 인생이라는 질문 자체를 존재하게 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내 삶에 필요한 만큼만 불러 쓰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사실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당신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훨씬 현실적인 질문을 합니다. 마음속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내 삶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입니까?” 하나님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내 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말입니다.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분을 어떻게 믿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도움이 필요할 때 찾는 분”으로만 두면, 도움이 절실한 일이 없는 날, 위급한 사건이 없는 날, 큰 선택이 없는 날에는 하나님이 ‘등장’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그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분', '위로가 필요할 때 찾는 분'으로만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기분이 좋은 날,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날, 마음에 아무런 근심이 없는 '행복한 날'에는 예수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내 감정이 평온하면 주님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행복한 순간에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결국 우리는 '내 문제'가 있을 때만 주님을 찾고, '내 존재' 전체를 맡기지는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여기서 우리의 오래된 신앙을 흔듭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안 계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작은 질문 속에만 가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실까?”에는 민감하지만,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 분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 앞에서는 궁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 작으면,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도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이 관계적인 것이 아니라, 소비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크신 하나님을 나의 작은 생각 상자 안에 ‘가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위대하신 하나님을 나의 욕망 안에서 통제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지 못한 채 계속 잊어먹고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일상에서는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사는 걸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일상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인 편견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이런 우리의 편견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나다나엘입니다. 요한복음 1장 후반부에 보면 빌립이라는 사람이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소개합니다.
빌립은 그 분의 행적을 이야기를 구약에 나타난 이야기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나다나엘의 반응이 냉소적이었습니다. 친구의 흥분에 맞장구치기는커녕, 아주 비관적인 태도로 찬물을 끼얹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이 이렇게 반응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상, 위대한 왕이나 선지자는 성전이 잇는 예루살렘에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갈릴리 산골 마을인 ‘나사렛’은 구약 성경에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그야말로 무명의 촌구석이었습니다. 그러니, 나다나엘의 입장에서는, 온 우주를 구원할 메시아가 그런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동네 출신이라는 말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그런 시한 동네에서 시작될 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나다나엘의 생각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그의 냉소적인 태도는 오늘 우리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아침에 눈을 뜨면 무의식중에 하루를 스스로 단정 짓곤 합니다. “오늘 내 반복되는 지루한 출근길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어?” “정신없이 바쁜 내 사무실 책상 위에서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어?”
“기저귀를 갈고 설거지를 하는 이 구질구질한 집안일 속에 무슨 거룩함이 있겠어?”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결코 거룩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이 계실 것 같은 장소와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장소를 마음속에 나눠 놓기 때문입니다. 자동적으로. 예배당과 기도실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출근길 지하철과 회사 책상 앞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는 경건해지고, 집과 직장에서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화요일 오후 2시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조차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나다나엘의 편견을 어떻게 깨뜨리셨을까요?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자마자 논쟁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4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보았노라.” 이 말씀이 왜 중요할까요?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혼자 묵상하거나 기도하곤 했습니다. 즉, 그곳은 나다나엘만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일상의 공간이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 평범한 시간, 그 혼자만의 자리에 예수님의 시선이 이미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나다니엘에게 예수님이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자마자 나다나엘의 태도가 완전히 바뀝니다. 냉소적이던 그가 즉시 무릎을 꿇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합니다.
나다나엘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한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사렛 같은 촌구석,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무화과나무 아래, 그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나를 지켜보고 계신 분임을 깨달았을 때, 그의 편견은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일상에서 영적인 실패를 경험합니까? 나사렛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내 직장과 가정, 학교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사소한 곳’으로 치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일 예배당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시간에도, 집으로 가는 발걸음속에서도, 운전대를 잡은 그 손 위에도, 우리의 염려속에서도, 주님이 이미 함께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방법은 거창한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루한 회의 시간에도, 반복되는 업무 속에도 주님이 여전히 내 옆에 계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죽어 있던 우리의 일상은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는 생생한 현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우리가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두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는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일상에서는 하나님을 까맣게 잊고 사는 걸까요? 그 이유는 영광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단순한 조연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움직이던 인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 요한은 충분히 자기 자신이 중심에 설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의 질문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나는 그 분이 아닙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말은 겸손한 성품의 미담이 아닙니다. 정보 전달도 아닙니다.
정체성의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왜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예수님의 영광 앞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자기 비하가 아닙니다. 이 고백은 가장 위대한 것을 본 사람이 더 작은 것에 미련을 두지 않을 때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본 그 영광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영광을 떠올릴 때 비일상적인 장면을 먼저 생각합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병이 즉시 낫고, 기도하자마자 문제가 해결되고, 눈에 보이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하루, 반복되는 출근길과 집안일 속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영광을 전혀 다르게 정의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말하는 영광은 번쩍이는 빛이 아닙니다. 요한이 말하는 영광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자리, 죄와 실패가 있는 자리, 가장 평범하고 초라한 현실 한가운데로 직접 들어오셨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연약함을 피해 가는 방식이 아니라, 그 연약함을 덮어주시는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인간이 강해졌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격 없음 이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놓일 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영광을 어디에서 보게 될까요? 그 지점은 늘 같습니다. 나의 자격 없음과 주님의 덮어주심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다가 화를 내고, 실수하고,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보통 “나는 왜 이럴까.”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영광을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런 나를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구나. 나의 실패 위로 덮이는 주님의 용서를 깨닫는 것, 그것이 은혜의 영광입니다.
미래가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있습니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그래도 주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구나.” 이 진리를 붙잡는 순간, 그것이 진리의 영광입니다. 영광은 문제가 해결된 뒤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영광은 해결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눈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외칠 수 있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그를 보라” 그 뒤에 화려한 후광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나를 대신해 죽으러 오신 그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문제가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예수님을 잊는 이유는 예수님이 숨어 계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너무 거창한 방식으로만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하나님이 계신 것 같고, 눈에 보이는 응답이 있어야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번쩍이는 빛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신 어린 양의 은혜와 진리라고 말입니다.
이 영광을 본 사람은 더 이상 일상을 버티는 자리로 살지 않습니다. 일상을 주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자리로 다시 옮겨 놓습니다. 이것에 세 번째 이유입니다.
결 론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놓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이 멀리 계셔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내 필요를 채우는 작은 존재로 가두었고,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이 없는 나사렛처럼 하찮게 여겼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화려한 사건으로만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환경이 바뀌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아질 거라 착각합니다. "이 빚만 갚으면,"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이 인간관계만 정리되면..." “이 직장이 안정되면, 돈 문제가 해결되고, 시간 여유가 좀 생겨야 은혜도 받을 텐데.” 우리는 자꾸만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평범하고 구질구질한 현실을 ‘그만두거나, 탈출해야만’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것이 가능하다고 스스로 말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착각속에서 하나님을 오해하고, 영광을 오해하며, 일상을 하찮게 여겼던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육신’은 고상하고 빛나는 형상이 아닙니다. 부서지기 쉽고 땀 냄새 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몸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고, 나다나엘이 무시했던 그 먼지 날리는 나사렛으로 오셨습니다.
냄새나는 어부들의 배 위로 찾아 가셨고, 예수님은 시끄러운 결혼 잔치 집,술과 웃음소리가 섞인 그 공간으로 들어가 잔칫집 한복판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인간의 결핍을 마주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거룩할 것 같아서’ 모이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숨기며 살아가는 자리로 직접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스러운 곳’에만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성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사렛 같은 일상, 냄새나고 소란스러운 삶의 한복판에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은 공생애 기간을 제외한 약 30년 동안 나무를 깎고, 밥을 먹고, 길을 걷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사셨습니다.
여러분, 이 30년의 시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요? 예수님은 공생애 3년의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 30년의 일상을 견디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밥 먹고, 일하고, 잠자는 우리의‘진짜 삶’을 거룩하다고 선언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취업 준비하고 스펙 쌓느라 마음의 여유가 단 1분도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공생애 3년을 위해 무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무명의 목수로 묵묵히 견디며 ‘준비하는 시간’조차 거룩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우리는 “회사 일이 너무 치열해서 하나님을 잊어요”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땀 흘리는 노동의 현장에 하나님을 모시고 들어오셨습니다.
망치 소리와 톱밥이 흩날리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마십시오. 화려한 기적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도망치고 싶어 하는 그 지루한 사무실, 반복되는 집안일, 꽉 막힌 출근길.
바로 그곳이 예수님이 30년 동안 묵묵히 사셨던 ‘나사렛’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가장 평범한 일상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장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멘입니다.
이제 적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한 가지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이 “주님 안에 거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거창한 계획부터 세우지 마십시오. 수시로, 주님을 부르십시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그 화를 분석하지 말고, 그 화를 들고 “주님”이라고 부르십시오. “주님, 지금 제 마음이 무너집니다.”라고 말입니다.
불안이 몰려올 때, 그 불안을 해결하려고 핸드폰을 더 붙들지 말고, 불안을 들고 “주님”이라고 부르십시오. “주님, 지금 제가 무섭습니다.”
자책이 올라올 때, ‘나는 왜 이래’로 끝내지 말고, 그 자책 위에 어린 양의 이름을 얹으십시오. “주님, 제가 이런데도, 주님은 저를 용납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영광일 것입니다. 이 은혜와 진리가 만나는 자리가 여러분의 일상의 자리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