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의심의 자리에 계신 예수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요한복음 20장 24-29절펼치기

24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개역개정

서 론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의 제자 도마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흔히 그를 “의심많은 도마”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마치 그가 다른 제자들보다 믿음이 부족했던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도마를 생각하면 어렸을 때 교회에서 보물찾기를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종이에 제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이름을 찾으면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이름마다 등급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선물은 “예수님”, 그 다음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아이들은 다 압니다. 좋든 이름을 찾아야 좋은 선물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이를 뒤집을 때마다 이름을 확인하며 기대합니다. 그런데 제가 종이를 하나 찾았는데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도마” 기대하는 마음으로 전도사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전도사님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의심 많은 도마네?” 그리고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기억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에게 도마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뒤에는 항상 꼬리표가 붙었습니다.“의심 많은 도마”

그런데, 성경은 도마를 “의심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적이 없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 본문이 아니라 후대 해석이 만들어낸 별명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덜 사랑했다는 기록도 없고 다른 제자들보다 더 차가웠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예수님께 기대를 걸었고, 예수님을 굳게 믿었던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도마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수 있는 문장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유대 땅으로 가려고 했을 때,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꾸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라는 주장을  사람들에게 하니까, 신성을 모독한다고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는 유별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도마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즉흥적인 뉘양스가 아닙니다. 단순한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도마는 가볍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을 계산하고, 현실을 직면하고, 최악의 가능성까지 생각한 다음에도 가겠다고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확신이 생겨야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결장하면 끝까지 가는 사람이 도마였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이 생기면 누구보다 강하게 믿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한 번 무너지면 누구보다 크게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깊이 믿었던 만큼 더 크게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도마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대충 따라다닌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면 된다”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왜 십자가여만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도마에게 일어난 일은 단순한 실망이 아니었습니다. 세계가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장면을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도마는 처음부터 의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 번 확신했다가 완전히 무너져 본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다시는 쉽게 믿지 않습니다. 쉽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무너진 경험이 그 사람의 믿는 방식을 바꿔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도마와 같이 어느 순간부터,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다가와도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고, 속으로 한 번 더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성격이 모나거나, 차가워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몸에 새긴, 뼈아픈 경험의 결과 이기도 합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게 되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의 온도롤 낮추기 시작합니다.

최선을 다하면 되겠지, 라는 믿음을 가지고 노력했는데, 몇 번이고 무너져 내렸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이상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건강을 크게 잃고 아파본 사람은 어떻습니까?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백 번의 따뜻한 위로보다, 차가운 모니터에 적힌 검사 결과를 내 눈으로 확인해야만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아픔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믿었던 성도에게 깊은 상처를 받아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누군가 다가와서 “우리 교회는 달라요”, “이제는 다 괜찮을 거예요”라고 아무리 따뜻하게 말해주어도, 그 말이 선뜻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으로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상처받고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서, 선뜻 마음을 열고 교회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기대하거나, 믿지 않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너지는 것은 생각보다 견디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확인되지 않으면 믿지 않고, 보장되지 않으면 기대하지 않고, 증거가 있어야 움직입니다 이것은 불신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식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방식이 익숙합니다.

도마도 그랬습니다.  쉽게 믿지 못할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자신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러자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믿고 싶었지만, 다시 무너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25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이 말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다시 무너지고 싶지 않은 사람의 언어입니다.

다시 기대했다가 실망할 것을 두려워 방어하는 사람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지금 도마가 서 있습니다.

전환문장

그러나, 도마를 단순히 상처받은 사람의 반응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말안에는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도마의 고백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왜 사람은 보지 못한 것을 믿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확인된 것은 받아들이지만, 확인되지 않은 것은 쉽게 밀어낼까요?

특히 왜 많은 사람들은 부활의 소식을 들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가 아니라 “그건 말이 안 된다”고 반응할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정말 문제는 정보가 부족해서일까요?,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저는 이 질문을 가지고 본문안으로 들어가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들었는데, 왜 그들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요? 도마는 그냥 “못 믿겠어요”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한 조건을 내겁니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 믿겠다”는 것은 단순한 거절이 아닙니다. 이 장면의 핵심은  “도마가 의심했다”가 아니라, “도마가 믿기 위한 조건”을 스스로 설정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 안에서 현실을 이해합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것을 신뢰하고, 검증된 것을 받아들이고, 설명 가능한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보지 못한 것은 쉽게 믿지 않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준을 “모든 것”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일어납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부활’ 앞에서 이 구조가 충돌합니다. 부활이란 개념은 우리가 살아온 세계의 방식과 다릅니다. 우리는 죽음은 압니다. 끝을 압니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반복되고, 검증되고, 설명가능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다릅니다. 부활은 경험이 없습니다. 검증이 안됩니다. 아직 이뤄지지 않아서,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그건 말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불신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식 구조에서 나오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거부한다기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 머무릅니다.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의심하거나, 밀어내거나, 거부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결국 방향을 결정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순간 우리는 “이해되는 것만 진짜다”라는 기준을 절대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어느순간 우리의 인식은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는 것만 믿기로 이미 결정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이해되는 것만 믿으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은 측정되지 않습니다. 공식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믿습니다.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질문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정의’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건 옳고, 저건 틀리다는 판단은 실험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삶의 중요한 선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 결혼을 결정할 때, 인생의 방향을 정할 때 모든 결과가 완벽하게 계산된 상태에서 결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불확실성 속에서 결정을 내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이해를 넘어서는 것들을 매일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하나님과 부활 앞에서만 기준이 달라집니다. “이건 이해가 안 되니까 못 믿겠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적인 기준에 의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만의 세계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도 믿음입니다. 문제는 부활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 들이면 내가 세상을 이해해 온 방식이 흔들린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부활을 단순히 이해 못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부담스럽게 느낍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받아들이는 순간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내 경험이 절대 기준이 아닌 것이 됩니다. 나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을 몰라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깊은 차원이 드러납니다. 이건 단순한 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자연스럽게 열려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닫혀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못 믿는 존재가 아니라 믿기 싫어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만 인정하고 그 밖의 가능성은 닫아버립니다.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도마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미 결론을 내려버린 사람, 이미 기준을 세워놓은 사람,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내 기준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어떻게 찾아오실까요?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요?

요한은 매우 의도적으로 이 장면을 기록합니다.  2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드 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 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요한은 여기서 중요한 표현 하나를 사용합니다. “문들이 닫혔다”는 표현입니다.

이건 단순한 공간의 상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때문에 닫힌 문, 상처 때문에 닫힌 문, 다시 믿지 않기 위해 닫아놓은 마음 바로 그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런 닫힌 마음을 가진, 도마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시며, ‘평강’을 말씀하십니다. 문이 열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들어오십니다.

이건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인간이 닫아놓은 문이 예수님의 접근을 막을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부활을 믿게 하시는 주님의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내가 준비되면 믿겠다” “내가 받아들일 수 있으면 믿겠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준비된 자리로 오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닫아놓은 자리로 들어오시는 분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이해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도마의 닫힌 세계 안으로 들어 오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친히 예수님은 도마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도마는 손가락을 내밀어 예수님의 몸에 손을 넣어 본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주님의 말씀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감정이 벅차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며,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감탄이 아닙니다. 도마의 기준이 무너진 순간입니다.

내가 확인해야 믿겠다는 자리에서 내려온 순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만난 것 처럼, 저희에게 보여주시면, 저도 더 확실히 믿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하며 설교를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현실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도마처럼 예수님의 손을 만져 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확인해 본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의 그 방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 나셨던 그 역사적 순간을 우리 눈으로 본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도마와 연결되는 상황화가 잘 안됩니다.

그렇다면 도마처럼 보지도 못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져본 적도 없는 우리는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도마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같이, 29절을 읽겠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생각하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장차 오게 될 모든 믿는 자들의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손으로 만져 본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반드시 눈으로 본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다. 앞으로는 보지 않고도, 그러나 참되게 믿는 길이 열릴 것이다” 이렇게 도마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마는 눈으로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언제나 눈으로 보고 믿지 않았습니다. 후대의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안으로 보는 방식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믿게 되었습니다. 직접 만지는 방식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역사 속 한순간에 있었던 사건이 복음서의 기록을 통하여 지금 우리 앞에도 열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요한복음을 처음 읽는 독자들도 도마처럼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의 손을 만져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도 옆구리의 상처를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에게 이 장면을 기록하여 읽게 했습니다.  왜입니까? 직접 본 경험이 없어도, 사도의 증언을 통하여 참된 믿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말씀은 믿음을 막연하게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 근거 없이 종교적 감정을 가지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눈으로 보는 대신, 신실한 증언을 통하여 믿게 되는 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부활은 신화가 아니라 사건이고, 그 사건은 증인들을 통해 전해졌으며, 그 증언이 기록된 것이 바로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도마처럼 손으로 만지는 길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만나는 길입니다. 눈으로 보는 길이 아니라 복음의 증언을 듣고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들려진 예수님의 증언 앞에 나의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도마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을 증언하므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반응하기를 말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0절과 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요한복음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듣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증언은 믿을 수 있는 것 일까요?, 부활은 정말 역사적 사건일까요? 기독교는 여기서 도망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면으로 말합니다.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증언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이건 제자들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적대자들도 부정하지 못했습니다.그래서 나온 설명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3절입니다.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이것은 오히려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주장입니다.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증언 할  또다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변화된 제자입니다. 제자들의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완전히 다르게 변하게 됩니다. 십자가에 잡히실 때에는 두려워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부활 이후에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공개적으로 부활을 전합니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만들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증언을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이 단순한 종교적 주장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 내용 자체가 꾸며내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부활의 첫 증인은 여성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증언은 법적으로 신뢰도가 매우 낮았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누군가 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바꾸겠습니까? 더 신뢰받는 인물을 앞에 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기록합니다. 이것은 사람을 설득하려는 이야기의 구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건을 전하는 기록의 구조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단 한 번의 개인적인 체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6절입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이것은 한 사람의 환상이나 착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또한, 신약성경은 단순히 오래된 종교 문서가 아닙니다. 이 기록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수십 년 안에 기록된 매우 이른 시기의 문서입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전설이나 신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만들어지지만, 이 기록은 사건과 너무 가까운 시점에 쓰였기 때문에 꾸며내기가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살아 있었습니다. 즉, 이 기록은 증인들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기록된 증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증언은 조용한 곳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적대자들이 존재했고, 반박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실제로 이 메시지를 공격하는 환경 속에서 전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증언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설명해야 하는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결 론

부활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그냥 “좋은 소식 하나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던 기준 자체를 뒤집어 버리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체로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결과, 내 손에 잡히는 현실, 지금 당장 느껴지는 감정이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게 되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현실이 마지막 문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현재의 형편만으로 내 인생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을 믿게 되면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프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괜찮아서가 아닙니다.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답답하고, 여전히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악을 보면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불공평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기도해도 금방 바뀌지 않는 현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압니다.

이해되지 않는 이 세상의 여러 일들에 대해서, 지금 보이는 결과로 단정짓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의 아픔과 절망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인생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반전이 있을 것이라는 빼앗길 수 없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을 믿으면, 죽음을 보면서도 그것을 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은 너무 아프고 우리 자신의 연약함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죽음을 마지막 문장으로 읽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그 길을 먼저 지나가셨고 무덤 반대편에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교리 하나를 더 아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더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종노릇하게 하지 않습니다. 지금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준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을 기준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도마처럼 이렇게 고백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 입술의 문장으로만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의 기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경 이후 교회역사의 전승에 따르면, 도마는 복음을 들고 동방으로 나아갔고 결국 인도 땅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도로 기억됩니다. 한때는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말했던 사람이 인도 땅까지 가서, 자기 생명을 걸고 그 부활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도마와 같은 길을 걸어갑니다. 그 이유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서의 내용을 듣고, 믿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깊이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령님은 지금도 이 일을 하십니다. 내가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던 죄인은 것과 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의값을 치루신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구원을 확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입교를 하는 성도들과 세례를 받는 성도들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성령님을 통해서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믿게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그 역사하시는 현장에 있는 줄 믿습니다. 제가 기도하고 곧바로 입교와 세례식으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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