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한 가지 전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믿음은 점점 좋아져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더 단단해져야 하고, 신앙은 점점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근한 압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는 예전보다 나아졌는가, 나는 지금 더 잘 믿고 있는가, 나는 왜 여전히 흔들리는가. 이 질문이 깊어질수록 신앙은 기쁨이 아니라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더 애씁니다. 더 기도하고 더 붙들고 더 버텨보려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대를 내려놓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의 여정은 직선이 아닙니다.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붙들었다가 놓치고, 결심했다가 무너지는 곡선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타협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은혜로 돌아오는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며 이미 완성된 사람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의 과정 속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창세기 12장을 살펴보면서 타협과 은혜사이에 서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는지, 믿음은 어떻게 흐려져 타협하게 되는지, 아브라함의 불안전한 믿음은 어떻게 은혜가 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정말로 믿음의 사람이었을까요? 그의 믿음은 어디서 시작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부르심의 과정을 살펴보면 한 가지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과 여정이 온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온전한 믿음으로 따라나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데라의 족보와 다양한 성경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족보가 나옵니다. 족보를 보면 데라에게 큰 상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라의 아들 하란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아브람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데라의 입장에서는 죽음과 불임이 한 집안 안에 함께 들어온 것입니다. 어쩌면 데라는 갈데아 우르에 더이상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라 가족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땅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다는 것은 대단한 결정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주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모든 안전한 울타리를 해제하는 것이며, 앞으로 무엇을 만날지 모르는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가다가 중간에 거류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하란입니다. 마치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따고 가는데, 대전에서 내린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들은 서울로 안가고, 대전에서 거류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란에서 하나님이 아브람과 사래를 부르셨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신 분들이 있다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란에서의 부르신 것 처럼 보이는데, 사도행전 7장에서는 하란 이전, 메소보다미아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7장 3절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어떻게 된 것일까요? 서로 정보가 다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두 번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갈데아 우르에서 먼저 부르시고, 다시한 번 하란에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아브람에게 드러내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람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오해하면 안 됩니다. 가족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삶의 기준을 떠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떠나긴 떠납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 나섭니다. 겉으로 보면 순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몸은 움직였지만 기준은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타협하며 걸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상황중심적인 모습은 아브람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상황과 현실에 매우 민감합니다. 타협합니다. 온전한 믿음의 여정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열리면 하나님이 하셨다고 생각하고 상황이 닫히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상황이 열린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고, 지금 상황이 닫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상황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면 하나님의 선하심보다 상황이 열려야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내면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일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상황에 흔들리고 타협하는 우리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반성되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하고 싶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아브라함은 어쩌다 보니 하란까지 왔습니다. 그가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걸어온 것이 아니라, 상황을신뢰함으로 나아왔습니다. 실제로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에서 하나님만 믿지 않았습니다. 아브람도 아버지 데라와 함께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는 순종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는 하나님만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말씀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반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모습을 보시고, 은혜를 거두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자격이 되고 완전하기 때문에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볼 때 아브람이 다른 갈데아 우르에 사람들보다 나아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스카웃 한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사람, 잘 믿을 것같은 사람을 선발한 것이 아닙니다.
조건없이 부르시고, 조건없이 대리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격이 없을 때 부르십니다.하나님은 모르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가다가 포기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상황에서 반신반의 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창세기 기자는 창세기 12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 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중요한 단어다 나옵니다. 마침내…..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입니다. 감격스러운 믿음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들어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계속해서 반신반의 하면서 불순종하면서, 타협하며, 때로는 포기 하고, 주저 앉아 있기도 하는 아브람을 하나님이 이끌어 마침내~ 마침내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눈앞에 나타난 것은 기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땅인데 살 수가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왔는데 현실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말씀 붙들고 직장을 선택했는데 더 불안해졌습니다.
기도하면서 관계를 내려놨는데, 더 외로워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기로 했는데, 손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신앙을 지키려고 했는데, 오히려 뒤처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안에서 아주 미묘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맞는 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흔들립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기근이 오자, 그는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멀어지는 선택을 했습니다. 타협이었습니다. 다시 상황에 의해 타협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이 행동을 이해하려면 행동보다는 그가 생각하는 전제를 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생각 없이 내려간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두 가지 전제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약속의 땅이라면 기근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기근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 같지 않다”는 전제입니다.
이 두 가지 전제가 아브라함을 움직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현실도 아닙니다. 해석입니다. 약속의 땅에 기근이 있으면 안 됩니까? 우리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기근 속에서 하나님의 더 큰 계획이 드러날 수는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면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황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제가 실망감과 두려움을 키웁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점점 믿음이 아닌, 타협의 지점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약속을 안 지키면 실망을 합니다.
그러면 어느순간 상대방에게 내 마음대로 해도 될 것 같은 권리 의식이 생겨납니다. 묻지 않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으로 가면 안되었는데,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 있는 불안을 빨리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타협합니다. 내려가지 말아야 할 땅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걸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애굽에서 거주하려 했다고 말해줍니다.
타협은 단순한 한 걸음이 아니라, 방향을 정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도 다른 타협으로 가게 되는 방향성을 열어 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현실이라는 것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했습니다. 애굽에 내려가는 상황도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애굽에 가면 반드시 애굽의 남자들이 틀림없이 나를 제거하고 내 아내 사래를 분명히 빼앗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래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두를 지키기 위해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예상은 실제로 맞아 떨어졌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사라의 아름다움에 주목했고, 바로의 궁까지 그녀를 데려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타협은 두려움에서 온다는 것이고, 그리고 두려움에서 시작된 타협은 그리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다른 어려움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타협의 시작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과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생합니다. 의심과 두려움이라는 마음은 상황에 대한 현실의 촉이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은 우리 상황을 빠르게 나름대로 보호하려고 예측을 합니다. 아브라함도 나름대로 상황에 대응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예상은 놀랍게도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에 대해서 조금은 객관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두려움은 항상 나쁜 감정은 아닙니다. 사실 상황에 두려움은 어느정도 우리를 보호하기도 합니다. 위험을 미리 감지하게 하고, 리스크를 계산하게 하고 무모한 선택을 막아줍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두려움 자체가 아닙니다.
두려움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입니다. 두려움이 참고하는 신호일 때는 유익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에 의해서 결정을 내리는 기준이 되는 순간부터 매우 위험해집니다.
두려움에 의해서 결정한 경험들이 맞으면 맞을 수록 우리는 점점 더 의심과 두려움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하나님보다 내 안의 불안이 더 정확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선택이 바뀝니다. 기도보다 판단이 앞서고, 맡김보다 계산이 앞서고 신뢰보다 통제가 앞섭니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두려움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다음에도 두려움을 따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두려움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문제는 두려움이 틀렸느냐가 아닙니다. 두려움이 맞을수록, 우리는 더 깊이 그 통제 아래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참고사항이 되고, 두려움이 결정권자가 되는 순간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살아가게 되는 무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처음 취업을 준비할 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방향으로 가보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조금 늦어도 의미 있는 길을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불안이 올라옵니다. “그러다 길이 막히면 어떡하지?, 남들 다 가는 길 안 가면 위험하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더 안전한 길을 택합니다.
그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꽤 잘 맞아 보입니다. 빨리 취업되고, 안정되고, 큰 실패 없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순간 그 경험이 두려움을 더 신뢰하게 만듭니다. 그 다음부터는 가능성보다 불안을 먼저 봅니다. 도전은 줄고, 선택은 보수적으로 바뀌고, 삶의 범위는 점점 좁아집니다.
이것이 두려움의 통제입니다.
최근에 양치를 하면서 치과를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충치가 하나 있는데, 이것을 내버려 두면 신경치료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치과에 가기 싫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웠습니다. 충치치료를 하면서 스케일링도 하라고 할 것이고, 아프기도 하면서도, 사람들이 내가 그동안 어떻게 관리해왔는지를 판단하기 때문에 두렵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룹니다. 괜찮은 척합니다. 버팁니다.
치과에 가는 선택은 하지 않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통증이 심해지기 전까지, 내가 버틸 수 있는 선까지만, 두려움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반응합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됩니까? 더 큰 통증으로 돌아옵니다. 더 큰 치료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허락한 만큼만 다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타협과 두려움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서 항상 반복되는 일입니다. 결국 아브람은 애굽에 들어가 사래를 누이로 속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반드시 타협과 거짓말을 낳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타협이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안전을 위해 말씀을 따르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자기 인생 전체를 무너뜨릴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로 거짓말을 하는 타협을 했는데, 오히려 아내를 잃을 상황까지 갔습니다. 이것이 타협의 구조입니다. 말씀을 어기는 타협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고 안전해 보이지만, 결국 더 큰 불안과 더 큰 위기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타협합니다.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 선택이 결국 더 큰 불안과 더 큰 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기는 여러분이 당장 굶어 죽는다거나, 직업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오히려 괜찮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취업도 하고, 자리를 잡고, 큰 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시작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쉬지를 못합니다. 조건은 갖추어졌는데, 안정은 있는데, 이상하게 불안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루가 끝나도 “괜찮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계속 비교하게 되고, 계속 뒤처질까 봐 불안하고, 조금만 흔들리면 무너질 것 같은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밖에서 안전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만들어진 안전은 겉은 지켜줄 수 있어도 속은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안정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안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무너진 것이 아니라, 괜찮은 것 같은데 계속 불안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상황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라를 지킬 수도 없었고, 상황을 되돌릴 수도 없었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과를 감당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애굽과 바로왕에게 재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십니다. 질병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집을 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의 타협 때문입니다. 복이 되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자기 때문에 다른 집안에 재앙이 임하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아브라함은 소망이 없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의 잘못된 선택과타협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잘했기 때문도, 회개했기 때문도, 믿음을 다지 붙들었기 때문도 아닙니다.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 상태에서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궁금해집니다. 잘못은 아브람이 했는데, 왜 재앙은 바로에게 재앙이 임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걸 분명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불공평한 분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금 이 장면을 누가 더 억울한지를 따지는 재판처럼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 본문의 초점은 “누가 덜 잘못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지키고 계시는가”입니다. 지금 이 사건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보호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씨로 민족을 이루시고, 그 후손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중심에 사래가 있습니다. 사라는 단순한 한 여인이 아닙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통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누가 더 착한가”가 아니라 “내 언약이 지금 위협받고 있는가”입니다. 바로는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과정이 어땠든 결과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여인을 자기 궁으로 들여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언약이 무너지도록 절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재앙을 받은 이유는 “바로가 더 악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처벌아니라, 차단입니다. 곧바로 바로가 아브람을 부른 것으로 보아, 재앙이 심화된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도록 막으신 것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이 누구 편을 드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절대 놓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아브라함의 죄는 더 분명해집니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위태롭게 만든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려고 했던 선택이 하나님의 언약을 흔드는 선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타협했고, 바로는 그 타협의 결과 안으로 들어왔고,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기 위해 개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 때문에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타협 때문에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흔들려도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 론
우리는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완전한 믿음으로 출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르심 앞에서도 온전히 떠나지 못했고, 순종과 타협이 섞인 상태로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상황 앞에서 흔들렸고, 두려움 앞에서 타협했고, 결국 복의 통로가 아니라 재앙을 흘려보내는 자리까지 내려갔습니다.
이건 아브라함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상황을 더 믿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붙든다고 말하지만 불안이 올라오는 순간에는 계산과 판단을 먼저 붙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의 통로로 살아가지 못하고, 때로는 상처를 흘려보내고, 때로는 긴장을 만들고, 때로는 관계를 무너뜨리는 자리까지 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타협하는 아브라함을 주목하지 않고, 그 타협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타협 안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붙드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에 기회를 한 번 더 주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다려 보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이 약속때문입니다. 우리가 내려가도 끝까지 끌어올리시겠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향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로 부름받았지만,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연약했습니다. 타협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상황에 메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 앞에서 내려갔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굶주림 앞에서도 내려가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두려움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갔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협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타협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거짓을 선택합니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타협의 자리 위에 서 계십니까? 말씀보다 상황이 더 크게 느껴지고, 하나님보다 현실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고, 기도보다 계산이 먼저 움직이고 있는 그 자리에 서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이겨내려고 하는 노력과 결심이 아니라 여러분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마침내 이루시는 주님의 부르심과 그 신실하심을 분명히 경험되어지는 은혜가 계속 될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창세기 13장1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결과를 말해줍니다.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주님이 타협과 은혜의 자리에서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