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오늘부터 <습관의 은혜>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변화시키실 때마다,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빚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출애굽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출애굽기를 홍해가 갈라진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진짜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후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후에 곧바로 가나안으로 데려가지 않으셨습니다.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왜일까요? 광야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물도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광야에서는 가진 것이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경험도, 능력도, 계산도 한계에 부딪힙니다. 광야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가장 선명하게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광야에 들어오자 그들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없으면 원망했고, 배가 고프면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어려움이 찾아오면 하나님의 약속보다 현실을 더 크게 보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애굽에서는 나왔지만 애굽이 아직 그들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자유인이 되었지만 마음은 아직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만나를 통해 훈련시키셨습니다. 목마름을 통해 훈련시키셨습니다. 전쟁을 통해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던지고 계셨습니다.
"너희는 누구를 신뢰하며 살 것인가?” 이 질문을 반복하십니다.
사실 이 질문은 이스라엘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질문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아직 아직 가 보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지, 어떤 어려움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미래를 거의 알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미래의 나를 너무 알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알면 불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미래를 모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미래를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설령 미래를 안다 해도 또 다른 불안이 시작됩니다. 좋은 일이 예정되어 있으면 그것을 잃을까 두렵고, 어려운 일이 예정되어 있으면 그것이 오기 전부터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미래를 알아서 평안을 얻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를 신뢰할 때 평안을 얻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래를 다 보여 주시기보다 자신을 보여 주십니다. 길 전체를 설명하시기보다 함께 걷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여정의 모든 계획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함께하셨습니다. 만나를 공급하셨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대한 모든 답을 주시지는 않으셨지만, 미래보다 더 중요한 자신의 임재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걸어가 보지 않은 길을 가다 보면, 때로는 헤매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헤맨다고 해서 반드시 그 길이 잘못된 길은 아닙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곡선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직선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었던 광야 길도 그랬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멀리 돌아가는 길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가장 안전한 길이었고, 하나님을 배우게 되는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방황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통해 우리를 가장 온전하게 빚어 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단순한 이동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전환문장
그리고 오늘 본문은 광야학교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르치신 가장 중요한 영적 훈련 하나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저는 오늘 출애굽기 17장을 통해 왜 ‘기도’가 성도의 삶에서 선택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걷는 자기 백성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을까요? 왜 기도는 선택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야 할까요? 광야의 길을 걷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번의 큰 위협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이었고, 다른 하나는 앞을 가로막는 아말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위협은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다시 과거로 끌고 가려는 위협이었습니다. 다시 노예로 살게 만들려는 공격이었습니다. 반면 아말렉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서는 위협이었습니다. 하나는 뒤를 돌아보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늘 이 두 위협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어떤 때는 과거가 우리를 붙잡습니다. 어떤 때는 미래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그랬습니다.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큰 문제는 애굽의 군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출애굽했습니다. 이미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다시 따라왔습니다. 왜입니까? 다시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애굽 군대 자체가 아닙니다. 사실 더 무서운 것은 애굽 군대보다 애굽의 기억이었습니다. 홍해가 눈앞에 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따라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14장 20절입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이는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놀라운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유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오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애굽이었습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과거의 영향을 오래 받습니다. 사람은 환경이 바뀌는 것보다 마음이 바뀌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몸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마음은 아직 애굽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키신 것은 단순히 장소의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의 사고방식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사고방식으로 바꾸시는 과정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깊은 특징입니다. 사람은 한 번 형성된 두려움을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무시당하며 살아온 사람은 누가 조금만 차갑게 대해도 버려질 것처럼 느낍니다. 오랫동안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좋은 기회가 와도 "어차피 안 될 거야"부터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은 누가 진심으로 사랑해 주어도 쉽게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존재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를 해석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그런데도 애굽 군대가 보이는 순간 기적보다 공포가 먼저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과거의 기억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인간은 은혜보다 상처를 더 오래 기억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래 눌려 살아온 사람은 자유를 낯설어합니다. 왜냐하면 자유에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노예 생활은 비참하지만 익숙합니다. 억압적이지만 예측 가능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행복한 자유보다 익숙한 불행을 더 편안하게 느낍니다. 이것이 죄의 무서움이고 인간 내면의 비극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사람은 단순히 좋은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익숙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반복한 생각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체질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셨지만, 이스라엘 안에 있는 애굽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노예 생활은 끝났지만, 노예의 사고방식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애굽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러 형태가 있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걱정과 염려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걱정합니다.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압니다. 어제 걱정했던 일의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또 걱정합니다. 왜 그럴까요?
걱정이 도움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걱정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보다 걱정이 먼저 올라옵니다. 하나님께 맡기기보다 스스로 붙들고 있으려 합니다. 걱정이 평안을 주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걱정하지 않으면 더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걱정이 통제의 착각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걱정하면 뭔가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걱정은 문제를 움직이지 못합니다. 오히려 내 마음만 소모시킵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실수 하나를 하면 며칠 동안 자신을 괴롭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만 계속 같은 생각을 반복합니다. "왜 그랬지?”, "또 실수했네." 이 생각이 자신을 살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오히려 더 지치게 만들고 더 무너지게 만든다는 것을 감각으로 느낍니다.
그런데도 놓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정죄가 옳아서가 아닙니다.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자기 자신을 그렇게 대해 왔기 때문입니다. 실수하면 자책하고, 넘어지면 정죄하고, 잘못하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이 너무 익숙해진 것입니다. 힘들지만 익숙합니다. 괴롭지만 낯설지 않습니다. 반면 은혜는 낯섭니다. 용서는 낯섭니다.
“괜찮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이런 말들은 좋은 말인데도 쉽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살아온 마음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어떤 사람은 칭찬 하나보다 비난 하나를 더 오래 기억합니다. 열 명이 잘했다고 말해도 한 사람이 비판하면 그 말이 계속 머리에 남습니다.
왜 그럴까요? 비난이 사실이라서가 아닙니다.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마음속에 있던 목소리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익숙한 감정을 진실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오래 두려워하면 두려움이 현실처럼 느껴지고, 오래 정죄하면 정죄가 사실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용서하셨는데, 내 마음은 아직도 재판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애굽의 체질입니다.
출애굽 이후의 가장 큰 전쟁은 외부 전쟁이 아닙니다. 내면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애굽은 "아니야. 넌 여전히 노예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애굽은 "뒤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말씀하시는데, 애굽은 정죄를 속삭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싸움은 단순히 죄 몇 가지를 끊는 싸움이 아닙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애굽의 목소리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정보를 드리는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애굽의 목소리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듣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과거의 기억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정죄의 음성보다 복음의 음성을 선택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애굽에 쉽게 붙잡히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가 익숙해지고, 습관이 되어야, 빨리 익숙한 감정을 붙들고 싶은 마음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이것뿐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위협이 있습니다. 과거의 애굽이 뒤에서 우리를 붙잡는다면, 아말렉은 지금 우리의 가장 약한 지점을 공격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번째 위협, 아말렉입니다.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아말렉은 첩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중심 공동체 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로 들어가 유목민으로 살아가게 되었고, 깊은 골짜기에 숨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약탈하며 살아가는 족속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가보지 않은 광야 길을 걸어갈 때, 아말렉은 계속해서 기습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순히 "아말렉이 공격했다"는 사실보다, 어떻게 공격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기록합니다. 신명기 25장 18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네가 길 갈 때에 너를 만나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네가 피곤하고 곤비할 때에 그리하였느니라”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정면에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뒤처진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지친 사람들, 약한 사람들, 대열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노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쟁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아말렉이 어떤 족속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공동체 안에서 가장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왜냐하면 약한 지점이 흔들리면, 공동체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말렉의 방식입니다. 정면 승부보다 약한 지점을 노립니다. 강한 부분보다 흔들리는 부분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우리에게도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사람은 강할 때보다 약해졌을 때, 쉽게 흔들립니다. 지쳤을 때는 평소에는 흘려보낼 말도 크게 들립니다. 외로울 때는 평소에는 괜찮던 일도 상처가 됩니다. 두려울 때는 평소에는 믿음으로 넘길 일도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아말렉의 공격은 칼과 창의 공격만이 아닙니다. 연약함을 노리는 공격입니다.
그때에는 평소에는 괜찮던 사람도 쉽게 흔들립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 안에도 “약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입니다. 신앙도 괜찮아 보입니다. 관계도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영역 하나만 건드리면, 갑자기 사람이 완전히 흔들립니다. 평소에는 온유한 사람인데,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순간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옵니다.
평소에는 넉넉한 사람인데, 비교를 당하는 순간 마음이 무너집니다. 평소에는 담담한 사람인데, 관계가 틀어지는 순간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평소에는 자신감 있어 보이는데, 실패를 경험하는 순간 자기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마다 특별히 약한 지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약한 부분에서 우리는 쉽게 분노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계속생각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계속 그 장면을 되감기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밤잠을 설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유난히 흔들리는 지점이 있다면, 그곳에 내가 붙들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더 깊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약점이라고 하면, 못하는 부분을 떠올립니다. 부족한 부분, 연약한 부분, 남들보다 뒤처지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훨씬 더 깊이 인간을 보여 줍니다. 진짜 약점은, 내가 집착하는 부분에 있습니다. 내 존재를 기대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붙들고 있는 부분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의 약점이 반드시 못하는 부분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가장 잘하는 부분이 흔들릴 때, 가장 크게 무너집니다. 관계를 잘하는 사람은 관계가 흔들릴 때, 일을 잘하는 사람은 성과가 흔들릴 때, 인정받으며 살아온 사람은 인정이 사라질 때 가장 크게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이 장점이 아니라 존재를 기대고 있는 기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인정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어릴 때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공부도 잘했습니다. 일도 잘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대했던 반응이 오지 않습니다. 열심히 준비한 일이 끝났는데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누가 비난한 것도 아닙니다. 욕을 들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계속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립니다. “별로였나?”, "내가 조금 못했나?” 생각합니다. 칭찬을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는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를 계속 확인받고 싶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응 하나가 단순한 반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존재 전체를 흔들어 버립니다. 이게 약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을 잘합니다. 책임감도 강합니다. 성실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인정받습니다. 그런데 일이 잘 안 됩니다. 성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존재 전체가 흔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일을 못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일을 너무 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잘해야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과가 흔들리면 업무만 흔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 전체가 흔들립니다. 약점은 단순히 못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입니다. 내가 가장 쉽게 무너지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종종 그 약점은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분 안에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말렉은 약한 사람만 공격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가장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지점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말렉이 약한 사람을 무너지게 공격하는 것 처럼, 우리의 내면안에 연약함은 우리의 약점을 드러나게 하여 마음을 무너지게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강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 약점을 없애는 시간이 아닙니다. 내 약점보다 크신 하나님을 다시 붙드는 시간입니다. 아말렉은 언제나 우리의 약한 지점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의 시선을 약점에서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를 주셨습니다. 약점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약점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 론
이런 두 가지 위협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을 들고 있는 모세의 모습을 주목하게 하십니다. 아말렉이 쳐들어왔을 때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사람을 택하여 나가서 싸우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산 아래로 내려갑니다. 실제 전쟁을 합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손을 듭니다.
기도합니다. 이 장면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은 문제를 외면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무시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현실을 외면합니다. 기도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기도는 하지 않고 문제만 붙잡고 삽니다. 그래서 정작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두 극단 모두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산 아래에는 현실이 있습니다. 산 위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놓치지 않습니다. 둘 다 있습니다. 현실도 있고, 기도도 있습니다. 책임도 있고, 의존도 있습니다. 순종도 있고, 간구도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 균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히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대부분 기도에 너무 몰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은 문제에 너무 몰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과하게 치우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에 과하게 치우친 사람들입니다. 입술로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는 내가, 돈이, 사람이, 능력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문제를 생각합니다. 말씀을 붙들기보다 미래를 걱정합니다. 기도하기보다 최악의 상황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점점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단순히 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11절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칼을 드는 사람은 여호수아입니다. 실제로 땀을 흘리는 사람도 여호수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승패가 산 아래가 아니라 산 위에서 결정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깁니다. 이 모습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도 수많은 전쟁을 만나게 됩니다. 여리고도 만나게 됩니다.
가나안 족속들도 만나게 됩니다.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내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먼저 이것을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칼로 사는 백성이 아니다.” "너희는 능력으로 사는 백성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의지하며 사는 백성이다.”라는 것을 철저히 몸에 세기게 하셨습니다. 전쟁은 여호수아가 하지만, 승리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칼은 여호수아가 들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모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고, 손을 들었을까요? 성경에서 손을 든다는 것은 단순한 자세가 아닙니다. 손을 든다는 것은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한계가 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의존적인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모세의 손도 계속 올라가 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지칩니다. 모세도 손이 내려갑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왜 중요할까요? 기도는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생각합니다. "내가 더 기도해야지.”, "내가 더 믿음이 좋아져야지.”,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도 혼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도 안 됩니다. 위대한 지도자도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손이 내려갈 때 마다, 그 옆에 아론과 훌을 붙여 주셨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의 손을 잡고 계속해서 인내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모세처럼 손이 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주간은 믿음이 좋습니다. 어떤 주간은 기도가 잘 됩니다. 그런데 어떤 주간은 손이 내려갑니다. 취업 문제 때문에 손이 내려갑니다. 사업 문제 때문에, 건강 문제 때문에 손이 내려갑니다. 관계의 상처 때문에,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손이 내려갑니다.
애굽의 기억 때문에, 아말렉의 공격 때문에 손이 내려갑니다. 연약함과 약점 때문에 손이 내려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주셨습니다. 혼자 버티라고 교회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함께 손을 들라고 교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이 이번 주에 힘들다면 혼자 버티지 마십시오. 기도가 안 된다면 혼자 끌어안지 마십시오. 금요기도회에 오십시오. 저에게, 가족장에게, 가족에게 기도를 요청하십시오. 아론과 훌이 되어달라고 요청하십시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십시오. "지금 제 손이 내려가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아론과 훌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누군가의 기도가 여러분의 손을 붙들어 줄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에수님이 신실하게 우리를 위해 지금도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에수님의 중보기도를 생각하게 합니다. 모세는 산 위에서 손을 들었지만,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두 팔을 벌리셨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손을 들었지만,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모세의 손은 피곤하여 내려갔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중보는 하루 동안이었지만, 예수님의 중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약해질 때도, 여러분의 손이 내려갈 때도,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릴 때도, 예수님의 중보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넘어저도 다시 인내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서로의 아론과 훌이 되어 주십시오. 서로를 위해 손을 들어 주십시오. 붙들어 주십시오. 우리의 약점과 연약함, 과거의 감정에 머물지 않고, 계속 기도하며, 영적싸움에서 매일 매일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