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30일 주일
설교자: 이지열 담임목사
서 론
여러분도 읽어 보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아주 독특한 형식의 소설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 사단, 악마입니다. 풍자적이고 통찰력 있게,경험 많은 삼촌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이제 막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조카 악마 윔우드에게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타락시키고 원수에게서 어떻게 멀어지게 할 것인지(여기서 원수는 하나님입니다.)
31개의 편지로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 아주 인상 깊은 대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윔우드가 삼촌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빨리 타락시킬 수 있습니까?” 그러자 스크루테이프가 피식 비웃으며 말합니다. “바보 같은 소리 말아라. 그를 한 번에 파멸시키려고 하지 마라. 그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길은 아주 서서히 기울어진 길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게 만들라. 그러면 그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C.S 루이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낙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큰 죄를 짓기 전에 먼저 낙심에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지고, 의지가 꺾이고, 마음이 축 처질 때 인간은 이런 실망감에서 나오는 낙심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파괴적인 선택, 비합리적인 선택, 자가 진단적인 행동에 쉽게 뛰어듭니다.
때로는 이성적이지 않게 잘못된 관계로 도피하고 순간의 감정에 책임질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고. 스스로를 해치는 길로 향합니다. 왜냐하면 낙심은 미래를 믿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들자 현재의 유혹에 기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미래의 가치보다 현재의 쾌락이 더 커 보입니다.
낙심 속에 있는 사람은 장기적 유익보다 단기적 위안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당장의 달콤함을 해결책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낙심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에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낙심은 한 번 이겨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낙심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았습니다. 바벨로에게 예루살렘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낙심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고, 70년 동안 아무 소망도 보이지 않을 때 그들의 마음은 점점 바벨론화 되었습니다. 타협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1차로 귀환했지만 성전이 건축되는 과정에서 대적과 방해로 16년이나 재건사업이 멈추었을 때, 그들은 또 낙심에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자신만 돌보았습니다. 타협했습니다. 또 다시 성전을 완공하는 은혜를 경험했지만 성벽이 무너진 예루살렘에서 조롱받고 안전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또다시 낙심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낙심이 반복될 때마다 하나님은 구원도 반복하셨다는 것입니다. 학개를 보내어 “다시 일어나라!” 말씀하셨고, 스가랴를 보내어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 소망을 심으셨고,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세워 멈춘 성전을 다시 세우게 하셨습니다. 에스라를 보내어 말씀으로 백성의 영혼을 다시 붙드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헤미야 한 사람을 조용히 준비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9월부터 이 반복적인 낙심과 반복적인 하나님의 붙드심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를 모두 읽고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연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에도 하나님은 필연을 심어두십니다.
우리가 그냥 지나가는 줄 알았던 발걸음에도 하나님은 이미 예비하신 길 위에 두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우리 중에 낙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낙심에 대한 경계를 반복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마음의 감정을 숨기기도 하고, 스스로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겉보기에는 모두 잘 지내는 것 같지만,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그러나’를 품고 있습니다. 웃고는 있지만, 마음 한편은 무너져 있고 예배 드리고 있지만, 다시 일어날 힘이 부족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내 안의 상처는 여전히 아픕니다.
어쩌면 우리 공동체가 반복적으로 겪고 있는 감정이 낙심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함께 드리는 예배자들 중에는 낙심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환문장
오늘 낙심의 마음을 가지고 온 사람들에게 오늘 메세지가 들려지길 원합니다. 낙심의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안됩니다. 낙심의 마음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낙심의 원인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왜 낙심하는가?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고 있는 낙심의 전쟁 한복판으로 나아가 낙심이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지, 4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낙심하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지 성경의 원리를 찾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먼저 우리가 낙심의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서, 느헤미야 시대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든 학개, 스가랴, 에스라보다, 훨씬 뒤에 쓰여진 책입니다. 다시 성전재건을 시작 한 후에 4년만에 성전이 재건 되었고, 그 후에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준비시켜 성벽재건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성벽은 예루살렘을 보호하는 벽을 말합니다. 벽이 무너지니, 치안이 문제가 되고, 외부에서 침략이 와도,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1장에 보면 예루살렘성 문들이 불에타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페르시아 왕의 비서실장이라 할 수 있는 술맡은 관원이었던 유대인 느헤미야는 눈물로 기도하게 되었고, 느헤미야는 목숨을 걸고 페르시아의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으로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사자금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보호할 군대를 제공받고, 성벽 공사에 대한 허가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의 꿈을 가지고 예루살렘 왔습니다. 사람들도 기뻐했습니다. 성벽재건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절반쯤 재건되던 시기에, 본격적인 낙심의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흐름입니다.
일이 잘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점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사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치지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낙심의 문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낙심을 하기 되는 실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낙심은 육체의 피로에서 시작됩니다.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10절은 낙심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가장 먼저 낙심은 힘이 빠질 때, 시작되었습니다.
힘이 빠지는 순간, 믿음도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관점은 느헤미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낙심의 원인을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낙심은 죄 때문에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낙심은 관계 문제로도, 환경 문제로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낙심은 피곤할 때 시작됩니다. 여기서 “낙심하여” 라는 헬라어 ‘에클뤼오’는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툭 풀려 버리는 뉘양스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고무줄이 계속 당겨지다가, 툭 끊어지는 것 것처럼 낙심도 그렇게 찾아온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낙심은 갑자기 찾아오는 사건이 아니라, 서서히 누적된 피로가 믿음을 끊어버리는 마음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낙심의 가장 큰 적은 육체의 피로와 정신적인 피로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정말 알게 되는 것이 있는데, 때로는 가장 영적인 일은 믿음으로 쉬는 것입니다. 잘 쉬는 것도 영성입니다.
제 아내는 이 설교를 들으며 속으로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여보!! 당신에게 적용하세요!! 저에게 하는 메세지입니다.
사람이 피로가 쌓이면, 내적 방어선이 약해집니다. 영혼은 피곤할 때 편한 것을 찾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길이지만, 동시에 의지와 집중이 요구됩니다. 반면 넷플릭스와 유튜브는 아무 노력 없이 즉각적인 자극과 도파민을 줍니다. 그래서, 지친 영혼은 편한 길을 선택하는 관성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젊다고 체력을 과신합니다. 과도한 약속, 만남, 게임, 유튜브 시청등, 육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은 낙심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토요일 저녁을 과신하지 마십시오. 주일예배는 토요일 저녁을 어떻게 보내는가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피곤하게 저녁을 보내면, 주일에도 예배에 집중이 잘 안되고, 분주해집니다.
좀 더 과하게 말하면, 주일예배는 토요일 저녁에 결정됩니다. 피곤하지 않도록 충분히 내일 주님이 어떤 메세지를 나에게 주실지 생각하면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시간을 같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육체적 피로는 반드시 낙심의 마음이 들게 하면서, 점점, 자신이 맡고 있는 일이나,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정확히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10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피곤하여 힘이 빠지니, 지금까지 잘 해왔던 흙 무더기에서 돌을 고르고, 벽돌을 만드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부담으로 다가오자 아직도 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좌절이 찾아왔습니다. 육체의 피곤은 현재 상황의 대한 부담과 좌절을 가지고 오게 합니다. 피곤과 좌절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언제나 함께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낙심의 두 번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좌절’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성벽을 쌓으면서 피곤이 찾아오자, 시간이 갈수록 해야 할 일 때문에 짓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거 언제 끝나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좌절입니다. 좌절은 우리가 하는 일을 더 무겁고 복잡하게 느끼게 만듭니다. 사역도, 직장도, 관계도, 섬김도, 분명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인데 이제는 짐처럼 느껴집니다.
좌절이 찾아오면 지금까지 걸어온 이유가 흐려지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막막해 보입니다. 어느순간, 지금까지 헛수고 한 것 같다는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을 다시는 건축하지 못하리라” 작은 좌절이 낙심을 확정짓는 말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마음에 부담이 되고, 좌절이 찾아오자, 스스로 먼저 실패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낙심이 들어오는 세 번째 통로, 실패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체가 피곤해 지자, 공사가 더뎌 보이고, 흙무더기가 여전히 쌓여있고, 기대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 것 같고, 결과는 멀게만 느껴지니, 스스로 빠르게 실패했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패감이 낙심으로 연결될 때, 3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는, 미래에 대한 비관입니다. 앞으로는 잘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더 믿게 됩니다. 또 하나는, 시작에 대한 후회입니다. 괜히 시작했다는 자책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도와주셨는데, 실패감이 들자, 하나님이 안도와주셔서 이렇다는 생각의 왜곡이 되는 것입니다.
실패감은 ‘사실’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아직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또한 이것이 사단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사단은 현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공격합니다. “할 수 없다” 이 말 한마디를 유도하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미혹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감이 들자,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신뢰가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실패감이 들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보다 하나님의 부재를 상상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외부의 목소리에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11절입니다.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성벽재건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산발랏과 도비야의 무리들의 거친 말들의 화살을 방어할 수 있는 믿음의 방패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외부의 목소리가 커지면 사실보다 두려움이 더 커집니다. 이 장면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입니다. 골리앗은 칼과 창을 들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먼저 입으로 싸웠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했습니다. 무려 40일동안 말로 공격했습니다. 그 결과, 군사들은 골리앗과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이미 마음에서는 패배했습니다.
전쟁은 칼로 지기 전에 마음에서 먼저 지는 것입니다.
결 론
그렇다면, 이런 낙심의 늪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회복 시키실까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성경은 느헤미야를 통해 낙심을 꺾는 세 가지 회복의 원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 번째로, 느헤미야는 낙심을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낙심의 원인을 붙들고 씨름하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확대해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말에 반응하기보다 하나님의 얼굴을 먼저 구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왜 이렇게 힘든 거지? 누구 때문이지? 무엇이 문제지?”
그러나 느헤미야는 달랐습니다. 원인을 분석하기 전에 기도로 하나님을 초대했습니다. 왜일까요? 문제를 오래 바라볼수록 문제는 더 커지고 하나님을 오래 바라볼수록 하나님은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문제보다 하나님이 먼저 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낙심이 올 때, 우리는 기도하라는 사인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루 중 가장 마음이 무너지고 연약해지는 시간은 잠들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에 스스로 위로받으려고 스마트폰을 꺼냅니다. 그러다 보면, 외부의 자극이 어느새 내면을 점령하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도 마음은 더 피곤해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같은 5분을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기도하면 어떨까요? 내일에 대한 염려가 맡김으로 바뀌고, 두려움이 평안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결국, 무엇 앞에 마음을 열었느냐에 따라 다음날 영혼의 상태가 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마음의 문을 불안에게 열지 않고 하나님께 열어두는 선택입니다.
날마다 복음으로의 아침기도문과 저녁기도문을 그냥 넘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이 달라질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느헤미야는 낙심한 공동체를 위해 그들을 흩어 놓지 않았습니다. 낙심은 항상 고립 속에서 자라고, 회복은 항상 관계 속에서 자랍니다. 그래서, 각자 혼자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 기대고, 지켜줄 수 있도록 함께 공동체로 모여 있게 했습니다. 1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그런데, 왜 종족대로 세웠을까요?
그 당시 이스라엘은 씨족 중심 공동체였습니다. 가족·친족·지파는 ‘정서적 안전망’이었습니다. 낙심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정서적으로 지지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발랏과 도비야의 조롱은 성벽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을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가장 안전한 관계 안에 세운 것입니다.
혼자 고립되면 생각이 어두워지고, 두려움은 증폭되며, 실패감은 굳어지고, 낙심은 깊어집니다. 그러나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마음이 돌아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진정성 인사와 안부를 뭍는 것은 낙심한 영혼, 시들어가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환대’는 문을 크게 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먼저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공동체는 서로 인사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웃으며 눈을 마주치고, 안부를 묻고, 이름을 기억해주고, 그 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관심을 가져주는 것, 이것이 종족대로 세운 이유입니다.
문제는 요즘 많은 교회가 ‘공동체’라는 이름을 자주 말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신성한 구조’처럼 떠받들면서도 정작 사람에게는 다가가지 않는 모순이 생깁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 숭배’입니다. 은혜이음교회는 숫자를 자랑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복음으로 연결된 우정으로 겸손과 온유로 서로를 대하는 마음, 서로 방패가 되어주는 관계입니다.
은혜이음교회가 이런 공동체로 더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 인사해주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인사가 우연일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낙심의 문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중요한 도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런 낙심의 늪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느헤미야는 낙심의 늪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알고 있었습니다. 낙심의 핵심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피곤하면 현실이 크게 보이고, 좌절하면 문제가 크게 보이고 실패감이 오면 자신이 크게 보이고, 두려움이 오면 ‘상황만’ 크게 보입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그들의 주저앉아 있는 마음을 흔듭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두려워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로 끊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크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 왜냐하면 두려움은 언제나 ‘하나님이 작아졌을 때’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의 본질은 하나님이 작아졌다는 해석입니다. 문제보다 하나님이 작게 느껴지는 순간 두려움이 들어옵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를 단독 명령으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옆에 “기억하라”가 따라옵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다시 크게 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을 하나님 시각으로 재해석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보다 하나님을 앞세우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두려움은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다윗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다윗은 단 한 번도 골리앗에 대해서 묻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의 기술, 나이, 지위, 지능지수 그의 이력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무척이나 주의를 기울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 몇 번 언급할까요?
무려 9번이나 언급합니다. 그와 반면에 골리앗에 대해 언급은 2번 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골리앗에 대한 상념보다 9대 2로 압도적입니다. 4배나 더 많이 생각하고 집중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정통했습니다. 물론 골리앗을 예리하게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더 오래, 더 깊이 주목했습니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과 다른 점이며, 골리앗과 같은 큰 문제로 낙심하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입니다. 여러분은 골리앗과 큰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정말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저지른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네 배쯤 생각하고 있습니까? 불평거리보다 감사해야 할 은총의 목록이 네 배 정도 더 깁니까?
두려움 덩어리보다 소망의 보따리가 네 배이상 더 큽니까?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아뢰는 이야기보다 주님의 능력을 찬양하는 고백이 네 배쯤 길게 이어집니까? 거인에게 초점을 맞추면 실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거인이 자빠집니다.
그렇습니다. 낙심으로 찾아오는 두려움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기억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세지는 반드시 ‘기억하라’와 함께 나옵니다. 홍해 앞에서도 “두려워 말고, 여호와께서 싸우신다”고 말씀하셨고, 여리고 성 앞에서도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도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마음과의 영적인 전쟁은 ‘결과를 걱정해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가 확정된 싸움입니다. 우리는 낙심과 좌절과 두려움에 종노릇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햐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정죄와 사망을 향해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싸움이 이제 시작된다”가 아니라 “승리가 이미 선언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가 싸우는 모든 영적 전쟁은 결과가 불확실한 싸움이 아니라, 승리를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승리 안에서 낙심과 두려움을 밀어내는 싸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낙심의 늪에 빠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내가 얼마나 약한가”가 아니라 “나를 위해 싸우시는 주님이 얼마나 크신가”입니다. 피곤으로 몸이 흔들릴 때, 좌절로 비전이 흔들릴 때, 실패감으로 나 자신에 대한 시선이 흔들릴 때, 두려움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그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이 싸움은 저의 싸움이 아니라 주님의 싸움입니다. 낙심의 전쟁터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선포했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낙심을 위하여 싸우시리라.” 이것을 기억하는 한, 낙심은 절대로 우리의 종착력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낙심과 좌절과 실패감과 두려움이 나의마음을 심란하게 만들 때 마다 우리 하나님이 승리하셨다. 우리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싸우신다. 이 말씀을 더디 믿지 않고, 더욱 믿음으로 하나님의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