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읽은 이 본문은 신약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을 마태의 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적도, 가르침도, 십자가도 아닙니다. 바로 시간을 따라 흘러온 이름들, 그 이름들이 엮어놓은 긴 이야기, 족보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족보는 오늘날의 이력서였습니다. “나는 어디 출신인가?”, “내 뒤에는 누가 있는가?” 이것이 그 사람의 자격이었고 존재 이유였고 평가 기준이었습니다. 이력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그 당시 문화에서는 내가 어느 학교, 어떤 회사,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내가 어떤 핏줄인가가 더 중요했습니다.
‘나의 족보안에 누가 있는가?’ 이것이 가장 큰 이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가문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 족보에 매우 민감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헤롯왕이었습니다. 그는 순수 유대혈통이 아니었습니다. 에돔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신분세탁을 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워버리고 싶은 이름은 지우고, 부끄러운 흔적은 덮어버린 채 ‘만들어진 족보’를 꾸며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헤롯은 자신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성전 기록 보관소에 있는 유대 가문들의 족보를 불태워 없애 버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만큼 남의 족보를 없애서라도 자신의 부끄러운 출신을 감추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어느 가문인가? 족보에 어떤 사람이 있는가? 에 따라 사람들의 평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사람으로 가득한 족보’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모습이 꼭 헤롯 이야기만 같지는 않습니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오늘 우리의 삶과도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혈통의 족보’를 중요하게 여겼다면, 오늘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설명하는 기록’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이력서를 쓸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실패했던 경험은 짧게 적고, 성과가 있었던 순간은 조금 더 크게 씁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도 그렇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초라해 보이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숨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선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 삶의 이야기가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 아니라 ‘보여 주고 싶은 이야기’로 조금씩 편집되기 시작합니다. 잘된 이야기만 남기고, 괜찮아 보이는 장면만 고르고, 설명하기 어려운 실패와 상처는 조용히 뒤로 미룹니다. 마치 헤롯이 불편한 출신은 지우고 ‘왕의 족보’만 남기고 싶어 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마음속 타임라인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되는 인생’만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근히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입니다.” “이만하면 설명할 수 있는 인생입니다.” 실패와 상처가 내 이야기로 남는 것을 버거워하는 마음, 내 인생의 기록에 ‘흠 있는 이름’이 적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그것이 어쩌면, 헤롯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아주 솔직한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족보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 두루마리를 펼쳐 읽어내려갔을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이내 화들짝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족보는 그들의 기대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한 왕의 족보라면 화려한 영웅담이 가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왕들의 족보와는 달리, 예수님의 족보는 도무지 기록되어서는 안 될 이름들이 버젓이 적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것은 왕의 위엄을 증명하는 '명예의 전당'이 아니라, 오히려 가문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수치의 기록'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왜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족보를 그렇게 낯설게 느꼈을까요? 예수님의 족보에는 어떤 특별한 특징이 담겨 있을까요? 왜 이 족보는 당시의 다른 족보들과 분명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족보의 특징을 따라가며, 하나님께서 이 계보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말씀하고 계신지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본론
먼저, 이 족보가 당시의 다른 족보들과 구별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여인들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1세기 당시에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여인이 족보에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습니다.
만약 족보에 여인이 들어간다면 아마도 이름을 남길 만큼 매우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 중에 마리아를 빼놓고 네 명의 여인이 이방여인이었습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족속의 사람입니다. 룻은 모압사람이고, 밧세바는 헷족속의 사람입니다. 이방인들이면서 여인들이 예수님의 조상으로 족보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이방 여인들은 그냥 여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그리 좋은 이야기들이 아닙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마태는 의도적으로 ‘다말’이라는 이름을 꺼내들었습니다. 유다지파의 숨기고 싶은 그 괴로운 사건을 끄집어 낸 것입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다말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끔찍한 이야기인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아내가 아닙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이방인 며느리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은 것입니다.
마태는 마치 ‘이것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말하는 것 처럼 다말을 꼭 찝어 말한 것 같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생각하는 유다지파??!! 그 지파가 어땠는지 내가 알려줄게요!!” 창세기 38장을 보십시오. 유다가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 유다가 어떤 죄를 범했는지, 얼마나 자신의 며느리를 하찮게 여기고 학대했는지, 그리고 그 며느리도 얼마나 악했는지, 이렇게 말하는 뉘양스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 일까요? 라합은 어떤사람입니까? 그녀는 가나안 족속의 사람이지만 성경에 보면 기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기생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 이상인 단어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들은 참기 어려웠겠지만 그들에게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다윗의 치부를 건드리는 이야기입니다. 이 족보를 볼 때 유대인들이 가장 충격을 먹을 만한 이야기는 6절에 담겨 있습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는 다윗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밧세바’라는 이름대신 ‘우리아의 아내’로 쓰면서 다윗의 부정한 사건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유대인들이여!! 너희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다윗이 낳은 솔로몬도 부정한 관계에서 낳은 아들이야”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이 인물들을 족보 속에서 의도적으로 같은 줄에 세워 둡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다말과 라합과 사람들에게 칭송받았던 다윗과 솔로문이 족보라는 같은 줄에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라합이나, 다윗이나 하나님앞에서 똑같은 죄인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 뉘양스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들었을까요?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비교하자면 이순신과 이완용이랑 똑같다. 라는 뉘양스로 들렸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버전으로 생각해 보면 경건한 제사장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선상에 놓은 것과 같습니다.
어쩌면 이 족보를 읽는 사람들은 서로 겉보기에 너무 다른 환경을 가졌기 때문에 이들을 같은 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좀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보다 더 도덕적으로 더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제 않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더 낳은 존재가 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삶을 직시하면 그런말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두 하나님의 앞에서 설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왜 이렇게 예수님을 엉망진창의 가족사를 가지신 분으로 소개하는 것 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놀라운 진실을 말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마태는 다말과 다윗, 라합과 솔로몬을 한 줄로 세우므로, 모두가 하나님앞에서는 연악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과 동시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도 예외없이 예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족보로 선포한 것입니다.
세상은 다윗을 받아 들이고, 다말을 거부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자격 없는 우리를 예수님의 가족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족보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이야기를 너무 쉽게,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격 없는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편입하셨다는 이 놀라운 소식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전율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다말, 라합, 룻, 밧세바, 유다, 다윗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것을 보면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 위대하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그리 놀라운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를 철저히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가족으로 들이셨다는 것이 너무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서, 실제로 그들을 ‘내 족보'에 들일 수 있느냐고 묻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성경을 읽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우리는 다말의 사정을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라합도, 룻도, 우리아의 아내도 관대하게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과거를 가진 누군가가 내 가족의 일원이 된다면 어떨까요?
라합이나 다말처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부끄러운 소문이 있는 사람이 내 며느리가 되고, 내 조상이 되어 나의 족보에 기록된다면 받아 들이시겠습니까? 우리는 겉으로는 그들을 환영할지 모릅니다. 머리로는 "용서해야지, 품어줘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마음 한구석에 불편한 침묵이 흐르지는 않을까요? '왜하필이면 우리 집에...'라며,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까요? 명절에 친척들이 모일 때마다 쏟아질 그 불편한 시선들이 걱정되지 않을까요? 이해는 하지만, 굳이 내 가족으로 엮이고 싶지는 않다"는 그 미묘한 선 긋기가 우리 안에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망설임'이 우리의 본심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할까요? 아마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나는 적어도 그들보다는 반듯하게 살았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상식적이고, 도덕적이고, 꽤 괜찮은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은연중에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소식이 그리 크게 기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 있다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시실에 감격하지 않는 이유는 실제로 여러분의 깊은 마음안에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나는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필요없다는 교만과 오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족보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은, 당신이 깨끗해서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족보에 들어온 것은, 우리가 다말보다 고상하거나 라합보다 의로워서가 아니라, 흠 많은 그들을 덮어주셨던 그 파격적인 은혜가, 동일하게 자격 없는 나에게도 덮여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 깊은은 곳을 찌르는 진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난 앞에서는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라고 하나님께 이유를 물은 적이 있습니다. 아니, 자주 묻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게 주어진 수많은 감사의 제목과 축복앞에서는 “왜 나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건가요?”라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고난은 부당하다고 느끼면서, 축복은 마치 나의 당연한 권리인 양 여겼던 것입니다. 나는 꽤 성실했고, 도덕적이었고, 남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았으니,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게 당연하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족보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의 삶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제가 누리는 평범한 하루, 따뜻한 햇살, 작은 성취들조차 저의 자격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설명할 수 없는 사랑 때문이라고 족보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족보의 특징중 하나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족보의 특징중 하나는 족보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계속해서 잘못된 선택을 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장 2절에 보십시오.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딘가 조금 이상합니다. 대부분 족보에는 장자의 이름, 첫째 아들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장자권을 속여서 받은 야곱은 에서 대신, 이삭의 장자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대로 족보가 흘러갔다면 유다의 이름이 나오면 안됩니다. 야곱의 첫째 아들은 유다가 아니라 르후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태는 르후벤을 낳았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야곱이 냇째아들‘유다’를 낳았다고 먼저 이야기합니다.
왜 유다를 언급했을까요? 물론 예수님이 유다 지파의 후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숨겨져 있습니다. 마태는 이 자연스러운 족보의 흐름 속에 어떤 '불편한 진실'을 심어 놓았습니다. '야곱이 유다를 낳았다'는 이 짧은 문장은 우리로 하여금 야곱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떠올리게 합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평생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평생 속고 속이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과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권을 가로챘고, 도망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서로 속고 속이는 치열한 사기극을 벌였습니다. 그의 결혼 생활은 또 어땠습니까? 야곱에게는 레아와 라헬,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아와의 결혼은 야곱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삼촌 라반에게 속아서 하게 된 억지 결혼이었습니다. 야곱이 진정 사랑했던 여인은 라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레아는, 볼 때마다 삼촌에게 속았던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존재, 내 인생을 꼬이게 만든 장본인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레아에게서 유다가 태어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야곱은 아마 레아와의 결혼을 두고 "내 인생의 가장 큰 실패"라고, "내 인생은 여기서부터 꼬였다"라고 수없이 한탄했을 것입니다. "내가 그때 사기만 당하지 않았어도..."라며 땅을 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이 '실패'라고 규정했던 그 만남, 그 원치 않았던 아내를 통해 메시아의 조상인 유다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떤가요? 여러가지 잘못된 선택과 실패와 실수를 통해 며느리에게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간음과 살인을 통해서 솔로몬을 낳았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나와있는 인물들의 구약적 배경을 찾아보게 되면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됩니다.
이들의 모든 선택은 순종적이고, 신앙적인 선택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바보같은 선택이었고, 한편으로는 죄악된 선택들이었고, 한편으로는 욕심과 욕망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잘못된 선택들이 점,점,점 역사의 절정에 치달아 가면서 이 계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쁜 소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잘못된 선택과 실패와 죄악을 사용하셔서 그 분이 계획하신 최선의 결과를 늘 내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는 종종 후회를 합니다. 내가 과거에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 때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을 이렇게 허비하지 않았을텐데 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 때 저지른 죄로 인해서 내 이력을 망치게 되었고 나의 인생은 이렇게 끝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도 레아를 만났을 때는 그는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한 레아의 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플랜B가 아닙니다. 차선책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삶을 통해서 무엇인가 선택하고 결정했을 때 그로 인해서 여러분이 맞이하게 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플랜B가 아닙니다.
심지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기 위해서 했던 일들 조차도 결국 하나님은 선하신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기서 잘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저지른 죄가 좋은 거라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죄를 저질렀다면 그건 악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되고 어리석은 결정이나 혹은 우리의 이기적인 자기사랑의 죄악 된 결정을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발견하게 하는 결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통해서 늘 이 일을 하십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젊은 날, 연애가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이별의 시련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 이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끝까지 내 곁에 계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의 실패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취업이 늦어지고 실패가 거듭될 때, 우리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내 가치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 절망의 바닥에서 우리는 발견합니다. 나의 능력이나 성취와 상관없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찾아오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 죽음이 현실로 다가올 때, "죽음 따위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치던 내 교만함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나를 위해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상황과 문제를 통해 구원이신 예수님을 발견하게 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계획은 하나님의 플랜B가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을 망치는 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바꿔서 말하자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망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결 론
우리는 오늘 마태복음 1장이라는 문을 열고, 수많은 실패와 얼룩진 이름들이 뒤엉켜 있는 긴 족보의 강을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족보의 끝자락, 16절에서 우리는 찬란한 한 이름 앞에 서게 됩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부끄러운 역사, 도저히 자랑할 것 없는 실패의 연속처럼 보였던 이 족보의 종착역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주님은 깨끗하고 흠 없는 가문을 골라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림은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더러운 인간의 역사와 거리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의 지저분한 실패의 역사 한복판으로 친히 걸어 들어오셨습니다.이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의 참된 의미입니다. 성탄절은 낭만적인 불빛을 즐기는 날이 아닙니다. 성탄절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낮고 연약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나의 망가진 삶 속으로 ‘가족’이 되기 위해 들어오신 날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의 족보에 흠이 갈까 봐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밀어내지만, 예수님은 기꺼이 그 흠 많은 족보의 한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끌어안으셨습니다.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시기 위해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으셨고, 우리의 실패를 구원의 이야기로 바꾸시기 위해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이상 더 이상 나의 자격, 나의 성과, 나의 실패를 보며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의 족보가 얼마나 초라한지는 결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족보의 끝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의 성공의 자리에도, 나의 처절한 실패의 자리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연도 아니고, 차선책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실패를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로 바꾸시는 이 놀라운 사랑 앞에 온 마음 다해 감사하며 성탄을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