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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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기도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역대하 32장 16-21절 · 열왕기하 19장 14-15절펼치기
역대하 32장 16-21절

16산헤립의 신하들도 더욱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종 히스기야를 비방하였으며 17산헤립이 또 편지를 써 보내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욕하고 비방하여 이르기를 모든 나라의 신들이 그들의 백성을 내 손에서 구원하여 내지 못한 것 같이 히스기야의 신들도 그의 백성을 내 손에서 구원하여 내지 못하리라 하고 18산헤립의 신하가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 질러 예루살렘 성 위에 있는 백성을 놀라게 하고 괴롭게 하여 그 성을 점령하려 하였는데 19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비방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사람의 신들을 비방하듯 하였더라 20이러므로 히스기야 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21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왕이 낯이 뜨거워 그의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의 신의 전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몸에서 난 자들이 거기서 칼로 죽였더라

열왕기하 19장 14-15절

14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개역개정

설교: 이지열 담임목사

서 론

우리의 인생에는 상황으로 인해, 믿음은 흔들릴 때가 있고, 세워질 때가 있으며,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이 여정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약합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도, 현실의 무게 앞에서는 누구나 흔들립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은 언제나 ‘보이는 상황’이 커질 때입니다.

숫자가 신앙을 집어 삼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급보다 더 높은 연봉이 더 현실적입니다.

보이지 않는 내일이 더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은 흔들립니다. 취업, 결혼, 진로, 노후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불안한 마음이 더 선명해집니다.

사람의 표정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에는 꼭 사람이 얽혀 있습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애너지를 많이 씁니다.

질병의 통증은 신학보다 더 현실적입니다. 기도를 해도, 아프면 믿음이 작아집니다. 몸의 고통은 눈에 보이고, 하나님의 위로는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의 소리에 먼저 반응합니다.

우리를 흔드는 건 개인 문제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압력도 너무 큽니다. 문화의 거센 물결이 강력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시대착오처럼 보이고, 믿음은 작고 고립된 목소리처럼 들립니다.

가장 무서운 건 바깥의 위협이 아닙니다. 안에서 일어나는 흔들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알고 있는데, 마음은 공허하고, 감정은 무너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내 안의 감정이 더 ‘진짜’처럼 느껴질 때, 그렇게 믿음은 조용히 뒤로 밀려 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경제의 무게 앞에서, 미래의 안개 앞에서, 사람의 눈치 앞에서, 몸의 고통 앞에서, 세상의 압박 앞에서, 자기 마음의 소음 앞에서 흔들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답을 몰라서 흔들리는 게 아닙니다. 이미 정답은 알고 있습니다.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알면서도 잘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답을 알고 있습니다. ‘가정은 화목해야 하고, 사람은 친절하고 신사적이어야 하고, 현장에서 낙오되지 않는 유능한 자가 되어야 하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말은 맞는 말인데, 다들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처음엔 의지를 다집니다. 마음을 다잡고 결심합니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겠다. 말씀대로 살아보겠다.” 기도 시간도 정해놓고, 성경도 붙잡고, 사람 관계도 잘해보려고 애씁니다. 승리할 때도 있지만,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아침엔 결심이 단단합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면 피곤이 밀려오고, 관계는 생각처럼 풀리지 않고, 현실은 결심을 조롱하듯 달려 듭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전환문장

성경도 흔들리고, 다시 세워지고, 또 넘어졌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 바로 히스기야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지만 두려움에 흔들렸던 왕이었고, 그 흔들림 속에서 기도로 세워졌던 왕이었으며, 마지막에는 교만으로 흐려졌던 왕이었습니다. 그의 여정 속에는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따라 걸으며, 믿음이 흔들릴 때, 믿음이 세워질 때, 믿음이 흐려질 때 이 세 지점을 함께 지나가려 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흔들리는 믿음을 어떻게 붙드시는지  그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히스기야 그는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일까요? 히스기야는 남유다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나라는 이미 영적으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성전 문은 닫혀 있었고, 예배는 사라졌고, 제사장들은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따랐던 왕이었습니다. 나라 전체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시대,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히스기야는 달랐습니다. 그는 성전을 다시 열고 먼지를 털어냈습니다. 제단을 다시 세우고 예배를 회복시켰습니다. 온 나라에 유월절을 선포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드물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라 불린 이유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개혁자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히스기야도 흔들리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세상은 이미 거대한 앗수르의 그림자 아래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당시 중동을 집어삼킨 무자비한 강대국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남유다마저 그들의 위협 앞에 떨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골목마다 사람들은 속삭였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우리도 곧 끝이야.”라고 말입니다.

히스기야는 바로 이런 시대의 한가운데에 왕으로 섰습니다.

앗수르가 침략한 이유는 남유다가 독립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당시 앗수르의 산헤립왕은 이것을 ‘반역’으로 간주했고, 산헤립은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남유다로 쳐들어 왔습니다. 많은 성읍이 함락되었고, 마지막 남은 곳은 예루살렘뿐이었습니다. 군사력의 차이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산헤립은 조롱 섞인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에는 남유다의 심리를 건드리는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말로 겁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신하들과 성전에 있는 제사장들까지 모두 겁에 질렸습니다. 히스기야도 믿음으로 서려고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 하니, 그들의 표정을 보고 히스기야도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히스기야도 처음엔 믿음으로 서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문 밖에는 산헤립의 대군이, 성 안에는 겁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적군의 수보다 백성의 눈빛이 더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표정은 “우린 끝났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백성의 공포가 히스기야의 심장으로 밀려왔습니다. 그의 마음도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객관적 현실보다 크게’ 느껴지게 만듭니다. 실제 상황은 변하지 않았는데, 내 안의 상상은 점점 부풀어 오릅니다. 두려움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빼앗습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사신을 보내어,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타협의 길을 택합니다. 성문 문에 입혀진 금을 벗기고, 성전 곳간의 은을 긁어모아 앗수르 왕에게 바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아니라, 눈앞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의 반응이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커 보일 때, 믿음은 뒤로 밀려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은 히스기야에게 부질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황이 커보일 수록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일이 어떻게 풀릴지’, ‘어떤 경로로 결과가 나올지’을 알고 싶어하는 깊은 욕망이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른다”는 상태를 견디는 게 너무 괴롭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을 때, 마음은 조용히 기다리지 못합니다. 머릿속은 멈추지 않고 돌아갑니다. “이 다음엔 어떻게 될까?” “만약 그렇게 안 되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불확실성은 단순한 ‘정보의 공백’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이미 나 혼자 결과를 다 그려버립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가슴이 답답하고,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잠이 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보다 ‘계산’을 먼저 합니다. ‘신뢰’보다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만약 이 방법으로 해결되면 괜찮아질 거야.” “이 경로만 보장된다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 이런 마음이 올라올 때, 이미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이 아니라 결과를 보장해 줄 메커니즘에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메커니즘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보이는 무언가’를 붙잡고 싶어지는 것, 그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이 일하실 방식’을 알고 싶어합니다. 방법이 보장되어야 마음이 놓이고, 결과가 예측 가능해야 신뢰가 생기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스케줄표와 설명서를 먼저 보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하실 건데요?”,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나요?” “이 일이 결국 잘 풀리긴 하는 거죠?” 이런 질문이 입술에 맴돌 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방법의 안정감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방법이 보장되어야 마음이 놓이고, 결과가 예측 가능해야 신뢰가 생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로 바꾸어 버립니다. 예를 들면, 취업을 준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좋은 직장을 주세요.”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이렇게 계산합니다. “이 회사에 합격하면 하나님이 날 도우신 거고, 떨어지면 아직 때가 아닌 거겠지.”

그런데 사실 그건 믿음이라기보다 ‘결과의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를 미리 정해두고, 그 틀 안에서만 신뢰하려는 마음이죠.

연애와 결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이 제 짝이라면 확신을 주세요.”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그 확신을 빨리 주세요. 그래야 덜 불안하니까요.” 결국 신뢰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 불안을 잠재워 줄 보장된 그림이 됩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아야 안심하고, 방법을 알아야 기도할 수 있을 것 같고, 계획이 보여야 믿음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면 이런 우리의 생각을 깨트리게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메커니즘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대신 “나를 신뢰하라”고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결과의 지도를 붙잡고 걸어가길 원하시는 게 아니라, 그분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출애굽의 메커니즘을 설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안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까지의 경로를 보여주셨습니까? 안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부활 전 고난의 전 과정을 다 이해시키셨습니까? 안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중간 과정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할 일이다.

너는 결과의 보장을 보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나를 신뢰하고 움직여야 한다.”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 어떻게 될 건데요?”이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입니다. 잠언 3장 5절과 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결국 하나님은 방법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마신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답답하면서 하나님이 답이신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해도, ‘누가’ 함께하시는가에 집중할 때 진짜 평안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타협의 길을 택한 히스기야는 변화된 상황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산헤립은 그 조공을 받고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랍사게(사신)를 보내 예루살렘 성 앞에서 유다 백성의 믿음을 흔드는 조롱과 협박을 퍼붓습니다. 히스기야의 타협은 오히려 상대의 욕심과 위협을 더 자극할 뿐이었습니다. 타협은 산헤립의 목소리를 키웠습니다. 우리의 신앙적 타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목소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지만, 마음의 중심을 내어 주었기 때문에, 이제 또다른 것에 타협하게 되는 위험성을 안게 되었습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한 번의 허용은 다음 허용을 부르고, 결국 믿음의 중심이 천천히 밀려나 버립니다.

‘이 정도쯤은 괜찮겠지.’라는 그 작은 틈으로 두려움과 불신이 밀려옵니다. 타협은 죄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복음의 자리를 밀어냅니다. 히스기야의 조공은 끝이 아니라, 적의 목소리를 더 키운 시작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손에는 산헤립이 보낸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그의 눈앞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편지에는 조롱과 협박이 가득했고, 그 말들은 그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나아갑니다. 자기 방으로 숨지 않았습니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았습니다. 열왕기하 19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나아간 건 믿음이 대단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붙잡을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왕으로서 동맹을 맺을 수도 없었습니다. 군사력은 앗수르에 비해 초라했고, 성벽은 이미 무너졌으며, 백성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도와줄 수 있는 나라는 없었고, 백성들은 히스기야의 눈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왕의 어깨에 기대던 백성들이 이제는 왕조차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전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산헤립의 편지를 펴놓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남은 건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거룩해 보이지만 사실 절박함의 기도입니다. 붙잡을 것이 하나님뿐일 때,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붙잡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위대해서가 아니라 붙잡을 게 없어서 가능했습니다. 다른 옵션이 사라질 때 진짜 기도가 시작됩니다. 옵션이 많은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진짜 기도는 붙잡을 게 하나님뿐일 때 터져 나옵니다. 히스기야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기도는 ‘결심의 기도’가 아니라 항복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워지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강화되어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위대한 사람이 하는 위대한 행동이 아니라, 붙잡을 게 하나님뿐인 사람이 드리는 절박한 외침입니다.

누가 주님앞에 나아갈까요? 붙잡을 게 하나님뿐인 사람입니다.

그 마음에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기도하고 싶은 깊 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결과를 본 후에 기도한 게 아닙니다. 결과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어떻게 이런 마음이 생겼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일하시기 전, 반드시 우리에게 사인을 보여주십니다. 그 사인을 바라볼 줄 알면, 우리는 흔들려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그 신호중 하나가 바로 기도하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기도가 잘 나오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기도하고 싶고, 오늘 하루라라는 시간 속에 가장 중요한 시간을  기도시간으로 여기고 싶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성령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일 하시려는 순간, 우리 마음에 먼저 기도의 갈망을 심으십니다. 그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간구일 수도있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나아 가라는 초대입니다. 기도가 하고 싶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움직이고 계시다는 가장 분명한 사인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 하실까요? 마태복음 6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먼저 아시는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실까요?

왜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주시고, 간구하게 하실까요? 왜 우리는 기도가 필요한 것 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고 응답받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이 아니면 우리는 그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자연히 일어난 일이거나, 사람들이 도와준 일이나, 운이 좋았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가 기도하지 않고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에 소원을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유는 아~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 하나님이 정말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에 눈이 열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정말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다 이루시지만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에게 이렇게 믿음이 세워지는 기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천사가 산헤립의 군대를 치실 것이라는 메세지를 주었습니다. 세상은 강력한 나라가 주도해 가는 것 같고, 그들의 나라가 영원할 것 처럼 떠들지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섭리는 이 땅에서 은밀하게, 하지만 아주 치밀하게, 그들의 잘못된 선택과 그들 스스로의 욕심과 탐욕으로 무너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히스기야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힘들 때마다, 타협대신 기도하는 시간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를 힘썼습니다. 이런 히스기야의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좋은 모델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를 능력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배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도의 능력으로 무장한 사람이 내 옆에 있으면 쉽게 기도를 배울 수 있는데, 그러나 기도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 우리 주위에 많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기도하는 사람으로 내 옆의 지체에게 서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중 하나는 기도자에 대한 경계가 있습니다. 뜨거운 기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옆에 가보면 지나치가 광신적인 요소가 많아, 배우려는 마음이 생기기보다는 영적으로 질려 버리곤 합니다. 반대로 그리스스도인이라고 해서 가까이 가보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 뿐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아 온유하고 겸손한 열정적인 기도의 사람을 별로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열망은 서로 기도하기를 힘쓰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기도해도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신에게 몰입되기 시작하면, 교만해 집니다. 기도를 통해 많은 응답을 받았던 히스기야에게 영적인 교만함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에 세 번째 믿음이 흐려질 때입니다. 그는 기적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성전은 회복되었고, 나라의 위기는 벗어났습니다.

그때 바벨론에서 사신이 찾아왔습니다. 사신들이 찾아왔을 때, 히스기야는 자신감이 극에 달았습니다. 사신들은 ‘어떻게 남유다가 부강하게 되었는가? 히스기야 왕이 어떤 약을 먹었길래?’죽을 병에서 살아나게 되었는지, 신기하면서 정탐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왔지만, 히스기야는 그것을 ‘인정받을 기회’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왕으로서 그것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보여준다는 것은 과시적인 측면과 자만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인 바벨론이 남유다를 점령하게 뒤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성경기자는 이런 모습을 교만으로 해석했습니다. 역대하 32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가 기도의 응답이후에 교만해졌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고난 속에서는 하나님을 찾지만,응 답 후에는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자리가 끝나면, 우리는 쉽게 중심을 잃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끝난 자리가 교만의 시작점이 되기도 합니다. 은혜에 대한 기억이 흐려지만, 공로에 대한 착시가 시작됩니다.

“기도했더니 됐다”는 그 마음에 자신이 기도한 것에 대한 자랑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결과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내가 믿음으로 이뤄낸 성취’로 해석될 때, 그 기도는 은혜의 자리에서 공로의 자랑으로 변합니다. 히스기야는 간증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결 론

그렇습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처럼 이렇게 믿음이 흔들릴 때 타협하고,  믿음이 세워지는 과정속에 기도가 있고, 믿음이 흐려질 때 교만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정말 봐야 할 것은 히스기야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히스기야를 한곁같이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타협을 책망하셨지만,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교만 이후에도 그를 다시 붙드셨습니다.  이것이 주는 신학적 함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흔들림을 모르신 척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우리가 흔들릴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무너진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놀라움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실 계획을 이미 품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우리의 흔들림보다 더 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은 완벽한 마음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결심은 이렇습니다. “흔들리지 않겠습니다”가 아니라 “흔들려도 주님께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고백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나의 믿음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매주 다시 그분께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게 믿음이 세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흔들려도,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오늘 우리에게는 히스기야의 손에 들린 산헤립의 편지가 들린 것처럼 우리의 손에도 이 시대의 산헤립의 편지가 들려 있습니다. 그 편지는 우리 시대의 말로 이렇게 씁니다. “너는 안 될 거야.” “이 상황은 바뀌지 않아.” “네가 가진 건 너무 작아.” “기도해 봐야 뭐가 달라지겠어?” 우리 손에는 이런 편지가 있습니다.

숫자의 협박, 불안한 문장, 수체의 단어, 자랑의 쉼표가 적혀 있습니다. 어떤 건 은행에서 온 문자로, 어떤 건 사람의 말 한마디로, 어떤 건 내 마음 안에서 매일 되풀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 편지를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 주님 앞에 펴 놓는 히스기야를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기도의 자리 앞에 산헤립의 편지를 펴 놓을 수 있습니다.

한 달이 끝날 때마다 남은 월세와 카드값이 마음을 짓누를 때, 주님, 이 걱정을 주 앞에 펼쳐 놓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취업, 진로, 결혼, 노후의 불안이 밀려올 때, 주님, 이 막막함을 주 앞에 펼쳐 놓습니다.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선과 말, 오해와 평가에 상처받은 마음이 여전히 아플 때, 주님, 이 관계의 무게를 주 앞에 펼쳐 놓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몸의 통증과 검사 결과의 숫자가 나를 두렵게 할 때, 주님, 이 고통과 불안을 주 앞에 펼쳐 놓습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죄책감과 멈추지 않는 자기비난이 나를 짓누를 때, 주님, 이 수치와 무력함을 주 앞에 펼쳐 놓습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응답받은 후에도 교만이 스며들어 나를 높이고 싶을 때, 주님, 이 자랑의 마음을 주 앞에 펼쳐 놓습니다. 고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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