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예상할 수 없던 초대(다윗과 므비보셋)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사무엘하 9장 1-9절펼치기

1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2사울의 집에는 종 한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시바라 그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그에게 말하되 네가 시바냐 하니 이르되 당신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3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 저는 자니이다 하니라 4왕이 그에게 말하되 그가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하니라 5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그를 데려오니 6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니이다 7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8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9왕이 사울의 시종 시바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사울과 그의 온 집에 속한 것은 내가 다 네 주인의 아들에게 주었노니

개역개정

2025년 11월 16일 주일

설교자: 이지열 담임목사

서 론

오늘 본문은 다윗과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의 이야기입니다. 추수감사절에 이 본문을 택한 이유는 이 본문안에 ‘감사의 근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감사를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고,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문제가 해결되면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감사는 여건이 갖춰졌을 때, 꺼내 쓰는 감정이라고 여깁니다.

우리는 눈앞의 상황을 먼저 봅니다. 통장 잔고, 건강 상태, 관계의 분위기, 올해 성취한 것과 실패한 것들. 그리고 그걸 저울질해 보고, “이 정도면 감사할 만하지” 혹은 “이 상황에 무슨 감사를…”이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조금 다릅니다. 성경의 감사는 ‘환경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의 반응으로 바라봅니다. 내 인생이 계획대로 풀렸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 때문에 나오는 고백이 ‘감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서 감사는 “모든 것이 잘 될 때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는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성경의 감사는 현실을 억지로, 긍정적으로 보려는 기술이 아닙니다. 성경의 감사는  기억의 신앙입니다. 내가 어디서부터 여기까지 왔는지, 누가 나를 붙들어 주셨는지, 어떤 은혜가 지금 이 자리에 나를 세우고 있는지 그것을 잊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감사할 조건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느냐,  잊어버렸느냐”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은혜를 기억하는 한 인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인물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입니다. 그는 왕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 사울왕에게 쫓기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울왕이 처음에는 그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렸을 때, 온 나라가 그를 영웅이라 불렀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그 노래 한 줄이 사울왕의 마음에 불을 지폈습니다. 사울은 질투했고, 그 질투는 점점 광기로 변했습니다. 그날 이후 다윗은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왕궁에서 들판으로, 들판에서 동굴로, 아둘람 동굴, 엔게디 광야을 전전하며 그는 왕의 칼을 피해 살아야 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 배신과 두려움, 그 모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다윗의 마음을 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자, 다윗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둘은 권력으로는 원수가 되어야 할 사이였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형제보다 더 깊은 우정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전쟁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환문장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의 시기에 잊혀진 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바로 요나단 입니다. 요나단과 만남의 기억 속에 ‘감사’가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감사절 절기를 맞이하여 다윗이 은혜를 기억하며 은혜를 흘려보내는 장면으로 여러분을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은혜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감사의 절기를 지키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게 되는 은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본 론

먼저 우리는 다윗의 질문을 통해서 그 특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나서, 어느날, 참모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다윗은 사울의 집에 남은 사 람을 찾았습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사울의 집안을 찾는 다윗을 주목합니다. 왜 다윗이 사울의 집안에 남은 사람을 찼았을까요?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찾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 당시 세상의 왕들과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보통 왕이라면 자신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왕가의 후손들을 제거했습니다. 왕이 된 사람은 원수의 집안을 없애는 것이 통치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반대의 일을 합니다. 다윗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복수’를 생각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 사울왕의 자손들을 찾았습니다.

은혜는 이렇게 세상의 상식과 반대로 흘러갑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지워야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은혜를 아는 사람은 ‘살려야 우리가 산다’고 믿습니다. 보통은 상처를 준 사람과 그 집안을 내 삶에서 지워 버리려 하지만, 은혜는 지워야 할 이름을 다시 기억해 내고, 끊어야 할 관계를 다시 초대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은혜는 이렇게 움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은혜는 언제나 먼저 찾아갑니다. 이렇게 다윗이 은혜를 베풀 사울의 사람을 찾는 모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 사람을 찾는 이야기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의 은혜는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시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적은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죄를 짓고 숨어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먼저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상 숭배하던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출애굽기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고통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먼저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과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은 백성이 완벽히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고통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은혜란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낮아 먼저 다가가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절정은 바로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편안함을 버리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사역 전체는 바로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찾아감의 은혜.” 예수님은 사람들이 피하는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손가락질 하던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 여리고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쇠사슬에 묶인 거라사 광인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 무덤 사이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에 맞을 여인을 감싸기 위해 죄의 저리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미워한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려고 세리의 세금대 앞으로 가셨고, 예수님은 국경을 넘어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방 여인의 간절한 믿음 앞에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찾아갑니다. 우리의 감사는 찾아 오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절 절기를 보내며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던 것 처럼, 우리도 복음이 필요한 자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감사할 수 있게 하신 것 처럼 우리도 이웃의 필요를 채워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은혜이음교회 공동체가 준비한 추수감사절 예물은 복음이 필요한 곳,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나서, 주님의 사랑으로 흘려 보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은혜가 필요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감사절 우리가 은혜를 기억해야 하는 일입니다. 최근에 가족장으로 섬기고 있는 영서자매님과 원투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투원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영서자매님은 부모님께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고 싶은 소망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날도, 원투원을 하면서 부모님을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 마음에 있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교회에 모시고 오기 전에 먼저, 우리가 가서, 식사자리를 만들고, 환대하며 교제를 나누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서자매님의 부모님만을 위한 환대의 시간을 정성것 만들어 사랑을 전하자는 취지였고, 둘 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끝난 후에 영서자매님이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12월 27일 토요일 점심에 함께 식사하고 교제나누는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은혜이음교회는 이런 찾아나서는 일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사역해 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영서자매님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복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들을 말해주세요!! 먼저 기도로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회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겠습니다.

우리 함께 이일로 은혜를 흘려 보내는 일에 동역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소망합니다.

다윗은 사울 가문의 종이었던 ‘시바’라는 종을 불러 물었습니다. 요나단의 아들이 남아 있냐는 질문이었고, 시바는 두려운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자비를 구하는 마음을 담아,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남았는데, 이름이 므비보셋이라고 말하며 두 다리를 저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뉘양스는 불쌍히 여겨달라는 뉘양스였습니다.

다윗이 물었습니다. 그가 지금 어디있느냐? 이때까지만 해도 시바는 두려웠습니다. 그러자 시바는 므비보셋이 로드발의 마길의 집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로드발은 ‘풀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라는 뜻입니다. 그곳은 왕가의 몰락한 후손들이 숨어 사는, 두려움의 땅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은 그곳에서 숨어 지냈던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잃고, 다리를 다치고, 할아버지의 원수에게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드디어, 다윗왕이 찾는다는 소문을 므비보셋도 듣게 되었습니다. 므비보셋의 마음에는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왕 앞에 불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그가 왕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왕도 자신을 두려워하는 므비보셋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다같이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니”

다윗의 말은 모두가 생각하지 못한 선언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은혜를 베푼다는 이야기를 들었어도, 그 은혜가 ‘죽이지는 않겠다는 선언’정도로 그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선언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이 이렇게까지 은혜를 선언한 것은 요나단과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이 부탁한 것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말한 것은 자비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이 살 만한 곳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사유지 전부를 돌려준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므비보셋이 경작할 수 없는 장애가 있기 때문에 그 땅을 경작할 종들을 서른여섯 명을 주겠다는 말도 해줍니다. 이 종들은 오직 므비보셋을 위해서 헌신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이해가 됩니다.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란 것은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왕의 식탁에 함께 앉게 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평생 동안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네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7절, 10절, 11절, 13절, 충격적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문화에서 이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윗의 식탁은 왕의 권위와 영광을 상징하는 자리였습니다. 거기 앉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보장받는 일이 아니라, 왕의 가족으로 입양되는 행위였습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불쌍히 여긴 것이 아니라, 그를 존귀하게 여기고, 자기 아들처럼 맞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자비를 넘어선 사랑이었습니다. 그를 높이는 조치였습니다. 공적으로 신분을 드러내는 특권이었습니다.

발을 절고, 소망이 보이지 않던 한 사람을 새로운 왕의 식탁으로, 그것도 왕의 가족 자리로 옮긴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은혜의 두번째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언제나 이해할 수 없기에 놀랍고 받을 자격이 없기에 더욱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그런 은혜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원수로 판명된 자들이었습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대적의 피를 가진 자였듯,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죄와 반역의 피를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는 왕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거룩 앞에서, 우리는 로드발에 숨어 살던 므비보셋과 같았습니다. 두려움 속에 숨어 있고, 부끄러움에 묶여 있고, 스스로 선한 길을 걸을 수도 없고, 거룩한 분에게 나아갈 수도 없는 자들이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말한 것 처럼 우리에게도 이렇게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지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식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우리를 종으로 두신 것이 아니라, 자녀로 높이셨습니다.

이 은혜는 우리의 행위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저 은혜답게, 놀라울 뿐입니다. 이처럼 은혜는 관대함을 넘어 놀랍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합니다. 나는 이렇게 놀라운 은혜의 수해자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보답할 수 없는 입장에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나를 상처 준 사람, 불편한 사람에게 은혜로 대할 용기가 있는가? 나의 시간과 재능, 마음이 ‘누군가의 로드발’을 밝히는 통로가 되고 있는가?

은혜 받은 자로서, 나는 불편함과 손해를 감수하며 누군가를 섬기고 있는가? 감사의 절기를 보내며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질문으로 성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렇게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을 찾고, 므비보셋을 만나, 놀라운 은혜와 호의를 베푼 중요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다윗이 스스로 자기 입으로 했던 말 한마디’때문이었습니다. 1절에 보면 중요한 동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이것이 은혜의 동기였습니다.

다윗이 호의를 베풀도록 자극한 동기는 정치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원수의 집안에 호의를 베풀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이 요나단에게 어떤 약속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요나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이미 죽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난처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성문 앞에서 “나는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나를 극진히 대접해야 합니다.” 라고 외치며 다윗에게 큰소리치며 권리를 주장하는 절름발이 거지도 없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소멸시효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20년이 지났습니다. 어떤 소멸시효를 적용해도, 이제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아도 되는 시간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치적 안정도 아니었습니다. 정치의 논리는 분명했습니다. “므비보셋은 제거해야 한다.” 정치는 므비보셋의 죽음을 명령했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편의성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는 편이 훨씬 편했습니다.

오직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 호의를 베풀게 한 동기는 ‘요나단과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지막 세 번째 은혜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약속 중심적입니다. 은혜는 이전에 했던 약속에 신실하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시 묵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택하시는 분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죽음의 참혹함까지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완전히 이행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지신 성품이자, 신실함입니다.

이런 신실함에 비추어 우리를 바라보면 우리의 말은 참으로 가볍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너무 쉽게 소비됩니다. 우리는 결혼식에서 혼인 서약을 합니다. 꽃길을 걷고, 음악이 흐르고, 친구들이 축하해 주는 자리에서 눈물로 서약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할 깨나 가난할 때나,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사랑하고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떻습니까?

그 서약을 공식적으로 깨뜨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법적으로는 깨뜨리지 않았어도, 마음속에서 이미 포기해 버린 경우도 많습니다. 몸은 함께 있는데, 서약은 이미 끝나버린 관계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회원이 되면서도 다짐합니다. “이 공동체를 사랑하고, 예배와 기도와 나눔에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걷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다짐을 쏟아냅니다. “올해는 정말 달라질 거야.” “이제는 가족에게 더 잘할 거야.” “이제는 정직하게 살 거야.” “이제는 예배와 말씀을 우선으로 살 거야.” 하지만 그 말들이 며칠 지나지 않아 흐릿해집니다. 우리는 “이제 다시는 안 그럴게”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자기 입으로 하는 말조차 믿지 못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약속도 ‘옵션’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들면 유지하고, 힘들어지면 해지하는 ‘구독 서비스’처럼 말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상품처럼 고를 수 있다고 느낍니다. “맞으면 같이 가고, 안 맞으면 끊으면 되지 뭐.”

그렇게 약속은 “지켜야 할 언약”이 아니라 “기분 좋을 때 하는 선택”이 됩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약속의 무게도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말에 반감기가 있어서 어제 한 약속은 5분 전에 한 약속보다 덜 중요하고, 일주일 전에 한 약속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때는 그럴 마음이었지. 지금은 아니야.” “그때는 진심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잖아.”

우리는 이렇게 말하며 약속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냅니다. 인터넷과 SNS도 우리의 말을 점점 가볍게 만듭니다. 우리는 손가락 몇 번이면 몇 백 번의 말을 쏟아낼 수 있습니다. 단톡방, 댓글, DM, 스토리, 게시글…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말을 던집니다. “보고 싶다.” “사랑해.” “너무 고맙다.” “너 없으면 안 돼.”

그러나 그 말의 수명이 24시간 스토리처럼 금방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말은 넘쳐나는데, 책임은 남지 않습니다. 감정은 뜨거운데, 언약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말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한 번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면 그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 번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그 언약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그냥 따뜻한 감정이 아닙니다. 헤세드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헤세드는 상황이 바뀌어도 물러서지 않는 사랑입니다.

감정이 식어도 남아 있는 사랑입니다. 상대가 변해도 유지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쉽게 말하고 쉽게 취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면 지키십니다. 언약하시면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약속을 어느 정도 지키는 분”이 아니라, “약속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은혜의 이야기를 “구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그 식탁에 앉아 있는 므비보셋입니다. 로드발에서 불려 나와 왕의 상에 앉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끝까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감히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으로 우리를 항상 채워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앞에 종이 아니라 자녀로, 손님이 아니라 가족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말을 바꾸고, 감정 따라 움직이고, 상황 따라 후퇴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에 따라 사랑하시고, 그 사랑을 위해 자기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감사하며, 감사절기를 보내야 할까요? 추수감사절은  “올해 일이 잘 풀렸는가”를 따지는 날이 아니라,

“나는 지금 어떤 은혜 위에 서 있는가”를 다시 기억하는 날입니다. 상황을 계산하며 감사의 양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여기까지가 전부 은혜였습니다.” 고백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드발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이들을 향해, 우리가 먼저 찾아가고, 먼저 손 내밀고, 먼저 식탁을 차려 주는 날입니다.

이 추수감사절에, 우리를 끝까지 찾아오신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감사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댓글

댓글을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