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읽는 묵상
초막절 마지막 날, 가장 큰 날. 사람들은 성전에서 물을 붓는 의식을 보며 광야에서 반석을 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서서 외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말씀은 조용한 위로가 아닙니다. 공개적인 선언입니다. “생수의 근원은 여기 있다.”
나는 지금 무엇에 목마른가.
사업하는 분은 계속되는 경쟁 속에서 “안정”에 목마릅니다. 직장인은 인정과 자리 보전에 목마릅니다. 취업 준비생은 합격이라는 한 줄 문장에 목마릅니다. 부모는 아이의 미래가 안전하다는 확신에 목마릅니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마십니다. 뉴스를 마시고, 비교를 마시고, SNS의 타인의 삶을 들이마십니다.
그러나 이상합니다. 많이 마셨는데도 더 목이 마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주는 물은 갈증을 잠시 잊게 할 뿐, 갈증을 끝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상황을 해결해 주겠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생수는 사건이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믿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받는 신앙이 아니라 흐르는 신앙입니다. 성령은 내 갈증을 잠재우는 정도가 아니라 내 안에서 새로운 흐름을 시작하시는 분입니다.
환경이 바뀌지 않았는데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것,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성령의 생수입니다.
본문의 후반부는 또 다른 장면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조롱합니다. “율법을 모르는 자들이다.” “갈릴리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오겠느냐.” 지식은 많았지만 목마름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교만은 갈증을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나는 괜찮다고, 나는 이미 알고 있다고, 나는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순간 생수는 들어오지 못합니다.
니고데모는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들어보자”고 말했습니다. 겸손은 생수가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묵상과 성찰
예수님은 내 상황을 바꿔 주는 물이 아니라, 내 존재를 새롭게 흐르게 하는 생수의 근원입니다. 나는 요즘 무엇으로 갈증을 달래고 있는가. 성과인가, 비교인가, 인정인가, 아니면 예수인가.
세상의 물은 나를 잠시 달래지만, 성령의 생수는 나를 다시 살게 합니다. 나는 “마르지 않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갈증을 인정하는 자만이 생수를 마신다. 교만은 목마름을 숨기지만, 믿음은 목마름을 드러냅니다. 나는 예수를 이해하려고만 하는가, 아니면 예수께 나아가 마시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