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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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의 자리에 계신 예수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요한복음 2장 1-11절펼치기

1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개역개정

서 론

오늘 본문은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장소는 갈릴리의 작은 마을, 가나입니다. 고대 근동의 결혼식은 지금처럼 하루 만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최소 일주일, 때로는 2주 넘게 잔치가 이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머물며 신랑과 신부를 축복했습니다. 결혼식은 개인의 행사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잔칫집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흥겹다는 것입니다. 잔칫날, 주인공이 슬퍼하거나 애통하는 법은 없습니다. 잔치 그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창 흥이 오른 순간, 포도주가 떨어져 버렸습니다.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단지 메뉴 하나가 빠지는 게 아닙니다.

잔치의 흐름이 끊기고, 분위기가 꺼지고, 무엇보다 ‘준비를 못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체면이 무너질 위기였습니다. 지금까지 지극정성으로 대접한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판이었습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곧 파장을 의미했습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이 장면을 의도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곳, 그 곳에도 반드시 문제는 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일이 잘 되는 것 같아도, 새로운 문제가 나타납니다.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불행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오늘의 아픔이 오히려 내일의 축복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에도 가장 깊은 걱정을 끌어안습니다. 뜨겁게 사랑할수록 이별을 두려워합니다. 큰 성취를 이룰수록 추락을 상상합니다. 행복을 그대로 만끽하기보다, 상실의 고통을 미리 예방하려 합니다. 우리는 왜 행복 앞에서도 걱정이라는 옷을 벗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이 행복이 오래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행복의 지속’을 원합니다. 기쁨이 마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한 번 웃기 시작하면, 그 웃음이 오래가길 원합니다. 내가 붙잡은 안정감이 영원히 내 손 안에 있길 바랍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행복을 얻는 것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이건 단지 나이가 들어서가 아닙니다. 환경이 나빠져서도 아닙니다.

성경은 이 현상을 인간의 ‘실존적 결핍’이라고 진단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실존적 결핍을 가장 기뻐야 할 자리에서 보여줍니다. 결핍이 찾아온 곳이 비극 현장이 아니라, 결혼식이었습니다. 기쁨의 한복판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준비를 소홀히 한 거 아닌가?” “하객 수를 잘못 계산했나?”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결혼식은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입니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최선을 다해 넉넉히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떨어졌습니다.

이 장면은 한 가정의 실수라기보다 인간 존재의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계획합니다. 우리는 대비합니다. 우리는 관리합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예상하지 못한 틈이 생깁니다. 잔치는 계속되는데 포도주는 줄어듭니다. 겉은 흥겹지만 속은 점점 불안해집니다. 바로 여기서 요한은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렇게 ‘나는 결핍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괜찮은 척하며, 어떻게든 흘러가는 잔치를 유지하려고 애쓸 뿐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준비해도 마음에 빨간 불이 켜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 영혼의 포도주가 떨어져 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예를들어, 우리는 자꾸만 무엇인가를 ‘더’ 원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새 옷을 사도 며칠 지나면 시들해지고 또 다른 옷을 찾습니다. 배가 부른데도 마음이 허해서 자꾸 야식을 찾습니다. 스마트폰을 1시간째 보고 있는데, 재미는 없는데 손에서 놓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배가 고픈 게 아닙니다. 마음이 고픈 것입니다. 영혼의 포도주가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유 없이 ‘짜증’과 ‘조급함’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별일 아닌데 가족에게 화가 납니다.  앞차가 조금만 늦어도 견디기 어렵습니다. 남들의 SNS를 보다가 갑자기 우울해집니다. 내면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자꾸 ‘괜찮은 척’ 연기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속으로는 “힘들다, 지친다” 비명을 지르는데, 겉으로는 웃으며 “요즘 너무 좋아요”라고 말합니다. 약한 모습을 들키면 사람들이 떠날까 봐, 실패자로 보일까 봐 가면을 씁니다. 이건 단지 솔직하지 못한 게 아닙니다. 내 안의 자존감이 바닥났다는 신호입니다.

인생에는 이러한 마음의 어려움이 결핍으로 생각될 때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준비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치열하게 살았고, 남들보다 더 노력했고, 준비할 건 다 했는데도 어느 순간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바닥’이 드러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필연적으로 결핍을 느끼며 불안 속에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까요? 모르게 찾아오는 이 마음의 허기와 이유 없는 짜증, 괜찮은 척해야 하는 이 피곤한 삶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까요? 더 열심히 노력해서 스펙을 쌓고 통장을 채우면 해결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결핍을 느낄 때,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공허함이 밀려오면 쇼핑이나, 쾌락으로 달래려 합니다. 외로움이 찾아오면 사람을 찾습니다. 불안이 오면 통장의 잔고를 늘리고, 스펙을 쌓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런데, 잠치 채워지는 듯해도, 이내 더 큰 목마름이 찾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인생의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다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통해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본 론

먼저, 오늘 본문의 장면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그려보십시오. 갈릴리 가나의 결혼식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초청을 받았습니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고 있는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마리아가 그 사실을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채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가장 좋은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을 잔칫집의 풍경 속에 담아 두었습니다. 이 잔치가 '파장'이라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적'의 현장이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포도주가 떨어진 현장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주목하게 합니다. 2절입니다.”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여러분, 이 구절을 냉정하게 한번 보십시오. 사실 예수님은 이 결혼식의 주례자도 아니었고, 혼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수많은 하객 중 한 명으로 초청받았습니다. 아마 저기 구석 자리에 앉아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잔치의 기쁨이 끊길 위기입니다. 이 순간, 하객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수군거리고, 걱정하고, 불평할 뿐입니다. ‘손님’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결핍의 문제를 해결할 권한도, 능력도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끝까지 ‘점잖은 손님’의 자리에만 머물러 계셨다면, 이 잔치는 그냥 비극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은 언제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위치가 ‘손님’에서 ‘주인’으로 바뀌었을 때입니다. 요한은 여기로 우리를 대리고 갑니다.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지시한 순간, 그리고 하인들이 그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예수님은 더 이상 하객이 아니었습니다. 그 잔치를 주관하고 명령하는 ‘주인(Lord)’이 되셨습니다.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결핍의 마음이 변화되어, 기쁨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아주 냉정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의 결핍을 느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나의 결핍의 마음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의 현장에 그분이 '개입'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스스로 익숙한 방식으로 그 마음을 다스 리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어떻게’ 맡겨야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초대한다는 것, 내 마음에 개입하시도록 주도권을 내어드린다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마음으로는 이해를 하는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우리는 이것을 마리아의 행동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마리아는 당황해서 여기저기 포도주를 구하러 다니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군중 속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3절에 보면 그녀는 곧바로 예수님께 나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왜 마리마아 하객으로 와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는지,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마리아의 행동을 주목하게 한 것은 확실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리아는 “예수님께 단 한 번도 물을 포도주로 바꿔주세요”라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디 가서 좀 사오세요"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아뢰었을 뿐입니다.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마치,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예수님께 고백하는 것 처럼 “주님,내 힘으로는 더 이상 기쁨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문제만 가지고 나아가 있는그대로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결핍의 마음을 느낄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마리아 처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결핍을 아뢰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제 통장에 잔고가 없습니다.” “주님, 제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주님, 제 가정에 사랑이 메말랐습니다.” “주님, 마음이 우울합니다.”, “주님 나는 왜 이렇게 감정이 왔다갔다 합니까?”

“주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을 하객에서 주인으로 바꾸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을 진정한 창조주로 모시는 행위입니다. 기도할 때에 거창한 미사여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결핍을 숨기지 않고 주인 되신 주님 앞에 토해내는 그 정직한 고백, 바로 그곳에서부터 무엇이 시작됩니까? 기적이 시작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군중 속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마리아처럼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왜 굳이 예수여야 합니까? 돈이 없으면 돈을 벌면 되고, 우울하면 상담을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세상의 방법들도 일시적인 도움은 됩니다. 하지만, 왜 우리 인생의 근원적인 결핍에는 반드시 예수님이 필요할까요?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 무언가를  더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본질'을 바꾸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적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부족한 포도주를 옆 마을 마트에서 사 오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맛도 향기도 없는 ‘물’을, 가장 향기롭고 맛있는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개선이 아닙니다. 재창조입니다. 화학적 기호가 바뀐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한번 정직하게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늘 자꾸 무언가를 ’첨가’하려고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더 가지면 괜찮아질 줄 압니다. 더 인정받으면 안정될 줄 압니다. 더 사랑받으면 덜 불안할 줄 압니다. 그래서 계속 더합니다. 스펙을 더하고, 돈을 더하고, 인맥을 더하고, 경험을 더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 더했는데,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마치 물에 아무리 좋은 것을 타도, 시간이 지나면 가루는 가라앉고 마는 것 처럼 말입니다. 처음에는 달콤합니다. 처음에는 신납니다. 처음에는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제자리입니다.

우울한 사람이 돈을 수백억 번다고 행복한 사람이 됩니까? 환경은 화려해집니다. 집은 넓어집니다. 차는 좋아집니다. 그러나 밤에 혼자 누우면 내면의 깊은 우울함은 그대로입니다. 불안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평안해집니까? 지켜야 할 것이 많아집니다. 잃을 것이 많아집니다. 눈치 볼 사람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불안해집니다. 관계도 그렇습니다. 외로워서 사람을 붙잡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떠날까 봐 더 불안해집니다. 성취도 그렇습니다. 성공했는데, 다음 성공을 못 하면 어쩌나 걱정합니다. 우리는 계속 더하지만, 정작 바뀌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고픈 것입니다.

우리는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안전감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존재가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첨가물’로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더하는 것으로는 결핍을 멈출 수 없습니다. 채우는 것으로는 허기를 끝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본질적인 인간의 변화, 재창조는 오직 예수님만이 할 수 있다는 표지, 사인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우리에게 그 증거로 4장에서 길게,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예시로 말해줍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남편을 다섯이나 바꿔도 채워지지 않던 사마리아 여인의 목마름이, 예수님 한 분으로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이것은 환경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본질'이 바뀐 것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격, 가치관, 인생의 목적, 그 본질적인 DNA를 바꾸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여러분을 만드신 창조주 예수님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무겁거나, 혹은 답답한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본질을 바꾸신다고 하셨는데, 제 모습을 보면 여전히 변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혈기 부리고, 여전히 욕심 많고, 여전히 불안합니다. 여전히 결핍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걸까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다만, 우리 삶의 구석구석, 내 성격과 습관이라는 항아리 속의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과정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지만, 가만히 계실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과 하인들의 ‘순종’이 만나는 지점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맹물을 항아리에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명령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포도주지 물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물은 손발을 씻는 정결 예식용 물입니다. 손님들에게 씻는 물을 마시라고 갖다 주라니요?

하인들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말씀대로 했습니다. 자신의 생각, 경험, 상식을 내려놓고 말씀 그대로 따랐습니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실패합니다. 의심합니다. 안된다고 더 믿습니다. 사람은 안변해. 라는 말을 더 신뢰합니다. 예수님을 초청은 해놓고, 정작 내 생각과 다르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주님, 원수를 사랑하라니요? 저 사람은 안 돼요." “주님, 먼저 저 사람이 사과하면 그때 용서하겠습니다.” “주님, 형편이 좀 나아지면 그때 헌신하겠습니다.” “주님, 제 감정이 정리되면 그때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정직하라니요? 이 사업 바닥에서는 그렇게 하면 망해요." “주님,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주님, 현실을 좀 보셔야죠.”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여러분!! 우리의 변화가 더딘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 순종이 멈춰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 장면을 주목하게 합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언제 되었냐는 것입니다. 항아리에 채울 때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의 뉘앙스를 보면,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는 도중에’ 변했습니다. 하인들은 여전히 물인 줄 알고 떠서 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순종의 발걸음을 떼는 순간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확인하고 움직이려 합니다. "주님, 먼저 제 성격을 바꿔주시면 그때 봉사할게요." "주님, 먼저 환경을 열어주시면 그때 순종할게요." 아닙니다. 순서는 반대입니다. 여전히 부족해 보이고, 여전히 물 같아 보여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발을 떼는 순간, 내 마음에 결핍의 마음을 주님께 맡겨 드리는 그 순간, 용서하기로 결단하고 전화를 거는 그 순간,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움직이는 그 순간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순종도 안해보고 미리 겁을 먹고, 미리 안되었다고, 스스로 합리화하여 순종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패배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나는 안 변해, 나는 원래 이래"라는 말을 믿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아직 변화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 싫고, 믿음으로 살면 초라해 질까봐 겁이 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주님, 이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며 꽉 쥐고 있는 그 영역은 여전히 우리의 골칫거리로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결핍의 마음은 예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내 계산’으로 그 빈 공간을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 염려, 내 계획, 내 잔머리로 가득 차 있어서, 주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핍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역설적이게도 계산기를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불안할수록, 부족할수록, 더욱 바보처럼 주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내면을 채우십시오. 세상이 볼 때는 “지금 그럴 때냐”라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묵묵히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말씀의 항아리를 채울 때,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부족했던 그 부분이 가장 풍성한 포도주로 변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결 론

어쩌면 여기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느끼실지 모릅니다. “나는 아직 안 되겠네.” “나는 아직 멀었네.” “이 설교는 잘하는 사람들 이야기 같아.” “예수 믿는 게 왜 이렇게 어렵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본문은 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꾸 이 이야기를 “내가 더 순종해야 기적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어렵게 느껴집니다. 기적은 하인들의 대단함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고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인들이 한 일은 위대한 결단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한 걸음 옮긴 것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앞에 담대히 나아가 말씀드리면 됩니다. “나는 아직 안 된다”는 그 마음까지도 숨기지 말고 고백하면 됩니다. “주님, 저는 아직 어렵습니다.” “주님,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래도 당신께 가져옵니다.” 그것이 순종의 시작입니다. 완벽함이 아니라, 가져오는 것. 잘함이 아니라, 맡기는 것.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할 일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한마디입니다. “주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의 주인은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께 드려야 할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의 더 깊은 결핍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그분은 결국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결핍이 있어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흔들려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숨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주님께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의 주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결핍이 여러분을 규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을 규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핍은 절망이 아니라 은혜가 스며드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핍은 무너짐의 표시가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의 결핍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주님을 더 깊이 만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은혜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분명히 경험되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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