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에 있었던 제자들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위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곧 떠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떠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답답한 심정으로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어디가는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홀로 가셔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떠난다는 말을 듣자 베드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다해, “제가 함께 가겠다고,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단호한 결심을 하며 고백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의 다짐이 더 강하게 표현됩니다. 그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결심보다 더 깊은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느냐.” 이 말씀은 베드로의 결심을 비웃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이 진심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결심과 다짐과는 달리,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이 체포되신 그날 밤,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닭이 울게 됩니다. 베드로의 결심과 다짐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전환문장
저는 오늘 여러분을 예수님앞에서 결심과 다짐을 하는 베드로의 고백 앞으로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의 결심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결심을 하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지, 그리고 우리는 왜 그렇게 진심으로 결심하고도 그 결심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지, 여러분과 함께 결심의 자리에 계신 주님의 메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의 결심과 다짐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먼저 우리에게 베드로의 결심과 다짐을 주목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고백이후 얼마 안되서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처음부터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다른 제자들은 먼저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완전히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대제사장의 뜰까지 들어갑니다. 이것은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간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따라간다는 것은 자신도 붙잡힐 수 있는 자리로 들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전경비대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는 칼을 뽑아 경비병 ‘말고'의 귀를 다치게 했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줄까요? 베드로의 결심은 말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예수님을 위해 싸우려고 했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를 쉽게 비웃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결심과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본능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판단하고, 방향을 정하고 어떤 삶을 살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는 늘 결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결심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 이후에 다시 일어나며 결심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다가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주님, 다시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말씀을 붙들겠습니다.” “이번에는 흔들려도 계속 나아가 보겠습니다.” 이 결심들은 절대로 가볍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에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결심입니다. 개척된 은혜이음교회를 섬기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족장으로 섬기기로 했습니다. 부장으로 섬기기로 했습니다. 등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봉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이 공동체를 섬겨 보겠다.” 고 좋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심입니다. 정말 잘 섬기고 싶은 마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잘 믿고 싶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심합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주님을 향한 결단' 그 자체는 소중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성경은 결심을 소중히 여깁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흔들릴 때, 분명한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이렇게 결심을 요구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눈치만 보며 갈팡질팡하는 백성들을 향해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확실한 선택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결단을 요구하시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분명한 결심이 있습니다. 결심은 소중합니다. 결심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결심은 진심이었지만, 그 결심이 항상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뜨겁습니다. 기도도 하고 싶습니다. 말씀도 가까이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현실이 밀려옵니다. 삶이 바빠집니다. 마음이 지칩니다.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그 결심이 조금씩 약해집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다짐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겠다고 했지만 다시 멀어졌고 말씀을 붙들겠다고 했지만 마음이 식어 버렸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지만 같은 자리에서 또 넘어집니다. 우리의 삶에는 늘 같은 패턴이 반복됩니다. 다짐합니다. 그러나 흔들립니다. 다시 시작합니다. 그러나 다시 무너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전심이었던 베드로는 왜 무너졌을까요? 왜 결심과 다짐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을까요?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베드로를 조금 더 자세히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은 보았습니다. 지금 가슴이 뜨거운 것도 분명히 느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두려워할 자신의 마음,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흔들릴 자신의 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충성할 수 있는 자신은 보았지만, 무너질 수 있는 자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결심은 거짓이 아니라 불완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의 나”를 기준으로 “미래의 나”를 확신합니다. 지금 마음이 뜨겁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에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의 결심은 거짓이 아니라 불완전했던 것입니다.
왜 불완전했을까요? 그의 마음이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함께 존재합니다. 순종하고 싶은 마음과 통제하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는 동시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동시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불편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결심은 항상 순수하게 한 방향으로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금방 결심이 흐려집니다. 내가 사랑한 만큼 관계가 깊어지지 않으면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기대한 만큼 금방 변화되지 않는 상황이 주어지만, 우리의 다짐은 한없이 가벼워집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대했던 대로 상황이 안돌아 가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왕처럼 승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한 죄인처럼 잡혀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지점이 바로 우리의 결심이 공통적으로 약해지는 지점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 숨어 있던 다른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래서 결심이 무너지는 이유는 단순히 감정이 식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기중심성, 통제 욕구, 두려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무엇을 원하느냐”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래서 결심이 무너지는 순간은 결심이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다른 것이 더 강해지는 순간입니다. 사람은 결심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순간 가장 강하게 원하는 것을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식탁에서는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뜰에서는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 순간, 예수님을 향한 사랑보다 무엇을 더 강하게 느꼈을까요? 우리는 흔히 그것을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생각합니다.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대한 두려움이 베드로를 압도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그 엄청난 결심을 무너뜨린 대상이 누구였을까요? 칼을 든 로마 군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권력을 쥔 재판관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베드로를 향해 질문을 던진 사람이 문을 지키던 '작은 여종' 하나였다고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8장 17절입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이것은 정말 놀라운 역설입니다.
불과 몇 시간 전,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쳤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칼을 빼 들고 맞서 싸웠습니다. 거대한 위기 앞에서는 기꺼이 목숨을 걸고 영웅이 되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모여 불을 쬐고 있는 평범한 뜰 안에서, 문을 지키는 여종이 "당신도 저 사람과 일행 아니냐"고 묻는 그 사소한 질문 앞에서는 "나는 알지 못한다"며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이 여종의 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의 굳은 결심과 다짐은, 거창하고 거대한 위기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결심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한 관계 속에서 무너집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단지 목숨을 잃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당장 불을 쬐고 있는 그 사람들의 무리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고 쫓겨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작은 여종의 시선, 사람들의 수군거림, 그 어색하고 불편한 공기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는 것보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거슬리지 않고, 이 무리에 안전하게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 그 순간 베드로를 지배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진리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더 크게 느낀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결심이 무너진 진짜 이유는 칼이 무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 무리에 속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그가 지키려 했던 사랑과 결심을 덮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의 진짜 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비단 베드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결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붙들겠습니다.” “이번에는 끝까지 믿음으로 가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흐려집니다. 정작 그 결심이 무너지는 자리는 내 삶을 위협하는 거대한 사건 앞이 아닙니다.
직장 동료들이 모여 있는 평범한 회식 자리입니다. 친구들과 대화하는 카페입니다. 가족들과 부딪히는 일상적인 거실입니다. 나를 향해 던지는 사람들의 작은 시선 하나,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소한 말 한마디, 혹은 다수가 동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믿음의 결심과 다짐을 타협해 버리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바쁨 때문이고, 환경 때문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깊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다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원하지만 동시에 세상의 인정과 편안함도 원합니다. 믿음으로 살고 싶지만 동시에 내 삶의 안전도 원합니다. 순종하고 싶지만 동시에 내 삶의 통제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그 '다른 사랑'이 더 강해집니다. 결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랑에 밀려난 것입니다.
결 론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적 결심이 필요하지만, 결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강한 사랑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삶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결심이 이렇게 연약한데, 우리는 어떻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끝까지 믿음으로 걸어갈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결심에 달려 있다면 우리 가운데 끝까지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강한 사랑을 만들어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꾸려고 했지만 바뀌지 않았고, 결심했지만 끝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안에서 답을 찾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밖에서 시작된 사랑을 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만 보게 되면 인간의 결심보다 더 깊은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함께 펴서 읽어보면, 마치 흩어졌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 온전한 그림이 드러납니다. 각 복음서가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인데, 특히 누가복음에는 요한복음에서는 생략되었던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베드로의 결심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 실패 자체를 먼저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다짐이 처참히 꺾일 것을 이미 아시는 예수님께서, 실패를 앞둔 제자를 위해 '미리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 다 같이 누가복음 22장 31절과 32절을 보겠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우리는 여기서 놀라운 영적 순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스스로를 지키겠다고 결심하기 이전에, 이미 사탄의 집요한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탄의 공격보다 더 먼저, 그리고 더 깊은 곳에 예수님의 간절한 '중보기도'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은 그 자신의 얄팍한 결심 위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앙은 이미 그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중보'라는 견고한 반석 위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호언장담이 불과 몇 시간도 가지 못해 무너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부르셨고, 끝내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드로의 다짐을 믿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베드로가 넘어질지라도, 중보자이신 주님께서 친히 그를 끝까지 붙드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슴 벅찬 복음, 기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실패를 미리 말씀하시고 그의 연약함을 낱낱이 드러내신 이유는, 그를 정죄하거나 "너는 안 될 놈이다"라고 판단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네가 무너지는 그 깊은 바닥의 자리에서도, 나는 너를 끝까지 붙들고 있을 것이다"라는 위대한 사랑의 약속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중보자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강권적인 붙드심입니다. 예수님의 중보는 사람을 절대 넘어지지 않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넘어져도 완전히 떠나지 않게 붙드는 힘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결심이 무너진 바로 그 순간, 실제로 그를 붙드셨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고,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이 통곡은 단순히 "내 결심이 실패했다"는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분을 내 입으로 부인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는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무너졌지만, 영적으로 무감각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눈물 뒤에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중보하시는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단이 정죄하는 마음으로 괴로웠지만, 여전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무너질 때 마음이 불편해지고, 기도를 피하면서도 기도가 생각나고, 말씀을 멀리하면서도 말씀이 계속 걸리는 그 순간, 그게 바로 우리 안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 눈물은 절망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직 우리를 놓지 않으셨다는 가장 깊은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결심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은혜로 유지됩니다. 히브리서 7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결심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중보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심과 다짐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들기 전에 이미 우리를 붙들고 있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질문이 바뀝니다. “나는 끝까지 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무너질 나를 누가 끝까지 붙들고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결심과 다짐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할 수 있습니다. 다시 기도하기로 결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붙들기로 다짐할 수 있습니다. 의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은 자기가 못할 것 같으면 결심조차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또 무너질 것 같고, 어차피 또 실패할 것 같으면 시작 자체를 포기해 버립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결심 앞에서 멈춥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자리에서 우리를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포기할 수 없는 거룩한 방향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결심은 내가 해낼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의 은혜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기 때문에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붙들려 있기 때문에 결심합니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또 무너질 것 같은데..." 그래도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십시오. "나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다시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그리고 오늘, 주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나는 약합니다. 그러나 나를 붙드시는 주님은 강하십니다." "나는 흔들립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나는 넘어집니다. 그러나 나를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의 은혜는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이 아름다운 고백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