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목자는 내 뒤에 은혜를 남기십니다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시편 23장 6절펼치기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개역개정

서 론

우리는 지난 5주 동안 시편 23편을 한 절씩 살펴보았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윗은 노년에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공급하심에 대해서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6절에 이르면, 다윗의 시선이 조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지나온 길을 돌아 보았다면, 이제는 앞으로 걸어갈 길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에게 반드시 따를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참 확신에 찬 고백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지, 어려운 일이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누구를 만나게 될지, 무엇을 잃게 될지, 어떤 일을 겪게 될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말합니다. “반드시 은혜가 나를 따르리니.” 어떻게 이렇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의 확신은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생긴 확신입니다. 뒤를 돌아보니 보였습니다. 푸른 풀밭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좋은 날에만 목자가 아니셨습니다. 무너지는 날에도 목자셨습니다. 다윗이 넘어졌을 때도, 잘못 선택했을 때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을 때도 하나님은 다윗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지나온 삶을 회상하면서, 앞으로의 삶을 바라보며 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붙드신 하나님이라면, 앞으로도 나를 놓지 않으실 것이다.” 이렇게 확신하며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해서 따라올 것이라는 것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참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의 삶을 자세히 보면, 그들이 은혜를 찾아 다닌 것이 아니라, 은혜가 그들의 삶을 따라다녔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복을 받을 만한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이 복을 찾아다닌 것도 아닙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복이 그를 따라 갔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좋은 환경을 선택하며 살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형들에게 팔려 종이 되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세기 39장 3절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참 이상합니다. 요셉은 형통할 만한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그가 있는 자리에서 형통함이 일어났습니다. 요셉이 형통을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요셉을 따라다녔습니다.

다윗의 인생도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에게 쫓겼고, 광야를 떠돌았고, 수많은 전쟁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무엘하 8장 6절입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이 늘 이길 만한 곳을 찾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그를 이기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승리를 쫓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을 따라갔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복이 따라왔고, 요셉에게는 형통의 은혜가 따라왔고,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승리가 따라왔습니다. 그들이 사는 시기와 환경,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장소와 시간, 환경과 사람이 달라졌어도,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다윗이 확신했던 미래의 은혜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윗이 확신했던 미래의 은혜, 두 가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다윗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두 가지 은혜가 항상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의 선하심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하나님의 인자히심의 은혜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따르리니”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라다프”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표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모습이 아니라, “뒤쫓다, 추적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고백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끝까지 나를 추적해 올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한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다윗을 추적한다는 것은, 다윗이 가만히 있지 않고, 도망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을 굳이 추적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망치고 있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추적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면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직면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잘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라, 수없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직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이 멀어질 때마다, 함께 멀어지신 것이 아니라, 다윗이 도망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히려 그를 뒤쫓아 왔다는 것입니다.

먼저, 다윗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뒤좇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언제나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내 평생에 선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좋은 일을 떠올립니다. 일이 잘되고, 문제가 풀리고,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고, 내가 기대한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라는 고백을 자연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삶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갈 때입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내가 생각했던데로 일이 잘 안풀립니다. 잘해 보려고 했던, 상황이 막히는 것 같습니다. 기도했는데, 상황은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단순히 속상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잘못 가고 있는 건가?”, “하나님은 정말 나를 선하게 인도하고 계신 걸까?” 이런 질문까지 따라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보다, 내가 생각하는 선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싶어 하면서도, 사실은 그 선하심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내 인생에 좋은 일만 생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언제나 주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내가 아직 이유를 알지 못하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선하기를 멈추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다윗의 인생이 바로 그랬습니다. 다윗은 일찍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왕궁으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윗이 간 곳은 왕궁이 아니라 광야였습니다. 사울에게 쫓겼습니다. 동굴에 숨어야 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피해 계속 도망쳐야 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물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선하신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까? 왕으로 세우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저는 지금 왕의 자리가 아니라 광야에 있습니까?” 물을 수 있습니다. 눈앞의 장면만 보면, 하나님의 약속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정반대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과정, 한가운데 있던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보기에는 인생이 늦어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보기에는 길이 막혀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길에서도 다윗을 이끌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기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앞당기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 힘이 있다고 해서, 그 힘을 자기 뜻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광야는, 다윗의 인생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늦어진 시간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는 다윗을 만들어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평생을 돌아보며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저도 이 말씀 앞에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회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그 선하심을 여러분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저 역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제가 기대하는 결과로 확인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여러 기대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고,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자라 가고, 우리의 작은 수고들이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꺾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목회가 언제나 기대한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준비한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때도 있고, 진심을 다해 섬겼지만, 제 마음과 다르게 받아들여질 때도 있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렸는데,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제 마음에는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 더 잘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제 마음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니, 그 질문 속에는 또 다른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제가 생각하는 좋은 목회의 모습이 이루어져야 안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가 늘어나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것 같고, 계획했던 일이 잘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도 더 커졌습니다. 그런데 일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제 마음은 쉽게 흔들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선하심보다,  제가 생각하는 선한 결과를 더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 가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선한 일입니다. 목회자로서 마땅히 소망하고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는 일이 선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제가 원하는 방식과 시간에 그 일을 이루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교회가 빨리 세워지기를 바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이지열이라는 목사를 다루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가정을 위해 애쓰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기대했던 선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게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상황은 나를 다루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길을 걷고 있어도, 하나님은 선하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무엇을 확신했을까요?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평생에 따라다닐 것을 확신했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내 평생에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여기서 ‘인자하심’이라고 표현 된 히브리어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단순히 따뜻한 감정이나 호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쉽게 사랑을 철회하지 않는 ‘신실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계속해서 추적해 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헤세드의 사랑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변함없는 사랑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얼마나 사랑을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에 신실하지 못한 존재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우리가 정말 원하는 사랑은, 단순히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나의 좋은 모습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모습까지 알고도 나를 떠나지 않는 사랑을 원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장점은 보여 주려고 하지만, 부족한 모습은 되도록 감추려고 합니다.

직장에서 일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사실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괜히 무능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아는 척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괜히 분위기가 불편해질까 봐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음이 힘들어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누군가 “요즘 어떻게 지내?”라고 물으면, 사실은 괜찮지 않은데도 습관적으로 “잘 지내지”라고 대답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내 어려움을 이야기했을 때,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다툼이 생길까 봐, 마음속에 묻어 두기도 합니다. 친한 친구에게 조차 질투하거나 비교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지만, 그런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왜 사랑받고 싶은 사람 앞에서조차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할까요? 어쩌면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사랑받고 싶어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만, 정작 그렇게 사랑받고 나면 또 다른 두려움이 생깁니다. '저 사람이 나의 진짜 모습을 알아도 나를 좋아할까?’

'내가 지금처럼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나와 함께해 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다른 사람의 부족함 앞에서는 쉽게 실망합니다. 내가 실수했을 때는 상대방이 나의 사정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만, 다른 사람이 실수하면 그 사람의 태도부터 문제 삼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까지 받아 주는 사랑을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부족함까지 받아들이는 데에는 서툰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인간의 모순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충성을 받았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믿고 따랐던 사람의 충성을 배신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기록이 사무엘하 23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다윗과 함께 싸웠던 용사들의 이름과 매우 인상적인 사건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전쟁중의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고, 블레셋의 수비대는 베들레헴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그 베들레헴에는 블레셋의 수비대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문득 흘리는 말로, 이렇게 말합니다.사무엘하 23장 15절입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다윗이 고향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어 했던 것은, 단순한 갈증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적군이 차지하고 있는 고향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가 가서 물을 떠 오너라.” 지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나가면서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세 용사가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블레셋 군대의 진영을 돌파하여 베들레헴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우물에 있는 물을 길어 다윗에게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물 한 잔을 가져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군사작전도 아니었고, 다윗이 명령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다윗의 소원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의 작은 말에도 마음이 쓰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하고,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은 우리에게 명령이 됩니다. 다윗의 용사들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명령하지 않았지만, 다윗의 소원은 그들에게 목숨을 걸 만큼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세 용사가 베들레헴에서 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물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목숨을 건 충성을 자신의 갈증을 채우는 데,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하나님께 부어 드렸습니다. 그만큼 다윗은 자신이 얼마나 부하들에게 큰 사랑과 충성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언제나 그 사랑에 신실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사랑받았던 경험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을 잘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다윗의 인생이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랑의 가치를 알면서도 자신의 욕망이 앞설 때는 그 사랑을 배신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23장을 끝까지 읽어 내려가면, 다윗과 함께했던 용사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39절에 이르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바로 우리아입니다. 성경에서 마지막에 이름을 쓴다는 것은 의도성이 매우 강합니다.

용사들의 이름이 주는 메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의 사랑을 소중히 여겼지만, 정작 자신에게 충성했던 우리아의 목숨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희생시켰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자, 결국 우리아를 전쟁터의 가장 위험한 곳에 세우고 다른 군사들이 물러나도록 명령했습니다. 우리아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나 순간적인 판단 착오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충성했던 사람을 배신하고, 왕으로서 주어진 권력을 이용해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것입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이야기의 마지막 부록처럼 있는 사무엘하 23장에서 앞의 두 장면을 생각하게 하는 대비를 시켜 놓았습니다. 세 용사가 가져온 물 앞에서는 그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던 다윗이, 자신의 죄를 감추어야 하는 순간에는 우리아의 생명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신실하기를 바라면서도, 내 욕망과 그 사람에 대한 신실함이 충돌할 때는 나의 욕망을 선택합니다.

이 사건은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자기중심성의 위험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끝까지 사랑해 주기를 바라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다윗에게 신실하지 않으셨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랑했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함에 따라 자신의 신실함을 결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선하심과 언약에 따라 신실하게 행동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다윗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신실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실패보다 더 깊고, 자신의 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다윗의 기억에는 자신의 부하들의 충성을 받았던 기억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끔찍하게 그 충성을 배신했는지도 그의 인생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언제나 그 고백대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철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 론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확신하는 다윗의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메세지를 주는 것일까요?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우리가 평생 갈망하며 살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변함없이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결국 인간이 궁극적으로 소원하는 것은 완전한 선과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선함과 사랑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선과 변하지 않는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줄 수 없는 것들에 우리의 인생을 맡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것을 갈망하면서, 끊임없이 변하는 것들에 우리의 행복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완벽한 선과 변함없는 사랑을 다른 것에서 찾으려고 하는 우리들의 진정한 소원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에도,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사무엘하 23장의 세 용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의 소원은 그를 사랑했던 세 용사에게 명령이 되었습니다. 세 용사는 다윗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적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소원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마리아의 태로 들어가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아기가 되셨습니다.

모든 생명을 지으신 분께서 어머니의 품에 안겨야 하는 아기가 되셨고, 만물을 먹이시는 분께서 누군가의 돌봄과 공급을 받아야 하는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세 용사는 사랑하는 왕을 위해 목숨을 걸었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거역한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망을 지키기 위해 충성스러운 부하의 생명을 희생시켰지만,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충성했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거역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끝까지 따라갈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이 의심되십니까? 지금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발견하지 못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시고,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의심되십니까?

반복되는 실패와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마저 의심하고 계신 분들 있습니까?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며, 우리가 그 사랑을 의심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미처 구하지도 못했던 가장 깊은 소원을, 예수님은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의 사명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의 평생을 끝까지 따라올 것을 믿으며 오늘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은혜이음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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