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오늘은 시편 23편 시리즈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은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번 집을 떠납니다.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하면서, 부모님과 살던 집을 떠나기도 하고, 결혼이나 직장 문제로 익숙한 동네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끔은 예전에 살던 집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문득 고향집에 내려가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집이라는 공간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함께했던 사람들과 그때 누렸던 편안함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 그 집도 달라집니다. 예전에 살던 집이 사라지기도 하고, 오랜만에 찾아간 집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집은 그대로 있어도 그곳에서의 삶은 달라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그렇습니다. 익숙한 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만, 때로는 떠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지만, 언젠가는 헤어짐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소중한 것들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무엇도 영원히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오늘 시편 23편을 기록한 다윗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번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광야를 떠돌았습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동굴에 숨어 지내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 어디에서 지내야 할지조차 장담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 시절 다윗에게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날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광야의 동굴에서 지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의 왕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떠돌던 삶을 마치고 마침내 안정된 자리에 정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왕궁에서도 평안한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하 13장부터 보면 다윗의 가정에 끔찍한 비극이 일어납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누이 다말에게 성폭력을 저질렀습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윗이 이 문제를 어떻게 바로잡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은 분노를 품었고, 결국 암논을 죽였습니다.
그 후 압살롬은 도망쳤고, 시간이 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압살롬은 아버지를 상대로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다시 왕궁을 떠나 도망쳐야 했습니다. 왕이라는 지위도, 왕궁이라는 좋은 집도 무너진 가족 관계를 회복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광야의 동굴이든, 왕궁이든, 그 어떤 장소도 다윗에게 평안을 보장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러한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붙들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목자이신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려운 순간마다, 자신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의지했고, 그분께 나아가기를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말한 ‘여호와의 집’은 도대체 어떤 곳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머물기를 소망 했을까요? 그리고 이 고백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여호와의 집’에 대한 의미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첫 번째로, 다윗이 말한 ‘여호와의 집’은 도대체 어떤 곳이었을까요?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소’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다윗 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없었지만, 성막이 있었습니다. 성막은 쉽게 말해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구별해 놓은 장막입니다. 그런데 성막을 이해할 때 중요한 사실이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게 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머무실 집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입니다. 인간이 만든 건물 안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곳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25장 8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그들 중에 거하겠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뒤에, 그들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구름이 성막을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막 안에만 계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머무실 곳이 없어서 세워진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약속을 보여주는 장소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집’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예배당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에만 하나님만이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이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공동체를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가운데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 드리는 이 예배 가운데 에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이 예배를 받으신다는 믿는 믿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섬겼던 교회에는 연세가 여든이 넘으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새벽예배에 늘 빠지지 않고 나오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에게는 한 가지 특별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예배당에 들어오실 때마다 강단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셨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건물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그 모습을 조금 종교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지나치게 형식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그 모습이 오히려 숭고하게 느껴졌습니다. 권사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인사하셨는지 제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에게는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이 참 분명하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분은 예배당에 들어오시면서도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기억하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을까요? 잘 안할 것입니다.
예배당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면서도, 일상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예배당 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때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가정에서도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집은 단순히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쉬는 공간만이 아닙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집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가 될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작은 원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그 방에서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이지만,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신혼부부가 이제 막 살림을 시작한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말에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생각이 달라 다투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서로의 잘못을 따지기보다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당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어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예배하는 곳마다, 성소가 됩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제 이야기를 잘 안하는데, 한가지 기억남는 예배당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저는 동해, 23사단 철벽부대, 지휘통제실이라는 행정실에서 일했습니다. 교회가 부대 안에 없었고, 이등병 때는 선임들의 눈치가 보여서 부대밖에 있는 교회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의 부대는 많이 좋아진 것입니다.
장로님 두분 계신데,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이등병 시절에는 혼도 참 많이 났습니다. 타자도 빨리 쳐야 하고, 문서 작업에 필요한 단축키도 외워야 하고, 전화 한 통을 받아도 상대방 계급에 따라 말투가 달라져야 했습니다. 지금도 갑자기 다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저도 모르게 말이 빨라집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상황 파악이 끝나고, 해야 할 일들이 우선순위대로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빠릿빠릿한 사람이 아닌데, 급한 일이 생기면, 온몸에 이상한 전투력이 생깁니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쉬고 싶은데, 이등병 때는 그렇게 내무반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희 때는 병장부터 이등병까지 한 공간에서 함께 자는 문화였습니다. 그 때마다, 저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공간이 제가 근무하는 곳 뒤쪽의 보일러실이었습니다. 이등병과 일병때는 그곳이 예배당이자, 기도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보일러실은 조용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덜덜덜 끊이지 않았고, 귀가 먹먹할 만큼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에 가면 제 마음은 조용해졌습니다. 주변은 시끄러웠지만, 제 마음은 오히려 고요해졌습니다. 그곳에 가면 항상 하는 것이, 종이박스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앉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복 건빵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작은 성경책을 꺼냈습니다. 잘보이지도 않습니다. 잘 읽지도 않았습니다. 힘드니까 앉은 것입니다. 생각나는 찬양을 혼자 부르는데,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앞으로 남은 군 생활을 생각하면 막막했습니다. 찬양만 하면 소망이 생겼습니다. 예배 보일러실이 저의 성소였습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공간이 예배 보일러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성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공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곳에 평생 머물기를 소망했습니다. 영원히 머물고 싶어했습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왜 여호와의 집을 그토록 소망했을까요? 시편 27편 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이 그토록 여호와의 집을 소망했던 이유는 여호와의 집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성소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외적인 아름다움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우리처럼 눈에 보이는 육체를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할 수록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의 성품을 더욱 깊이 알아갔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깊이 알아가면서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모습이나 그 사람이 가진 능력에 마음이 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면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힘든대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이나, 누군가 실수했을 때, 쉽게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보게 되면, 참 좋은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깊이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도 이와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그 성품을 추측해야 하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말씀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좋게 생각해서 만들어 낸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그렇게 계시하셨습니다.
다윗은 계시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서 알아갔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광야에서는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앞길을 알 수 없는 순간에는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마주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소망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왕궁에서는 자신의 권력으로 많은 것을 지켜야 했지만, 여호와의 집에서는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왕궁은 다윗이 지켜야 할 집이었지만, 여호와의 집은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곳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떤 집에서도 인생의 모든 문제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를 소망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이렇게 간구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내가 붙들고 있는 문제보다, 나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배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씀보다 다른 것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언제나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마음이 원하는 것이 언제나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우리는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빨리 찾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휴대폰입니다.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봅니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영상이 나와서 봅니다. 하나를 보고 나니 또 다른 영상이 나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사실 별로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방금 무엇을 봤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이제 그만 보고 자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손가락은 계속 다음 영상을 넘깁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너무 즐겁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재미있는 것이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계속 화면을 넘깁니다. 여기서 우리 마음의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만족을 주는 것만 찾는 것이 아니라, 만족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을 계속 찾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기대했던 만족을 얻지 못해도,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별다른 즐거움이 없어도 계속하게 됩니다. 물론 휴대전화로 영상을 보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장면 속에서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힘들 때마다, 허무할 때마다, 익숙한 곳에서 위로를 찾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매번 고민하지 않습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늘 걷던 길을 걸어갑니다. 어느 모퉁이에서 돌아야 하는지 일일이 생각하지 않아도 발걸음이 익숙한 길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도 익숙하게 돌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불안하면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외로우면 누군가의 관심을 찾습니다. 마음이 괴로우면, 다른 자극으로 그 괴로움을 잠시 잊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그곳이 마음이 가장 쉽게 돌아가는 장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안식을 주는 곳으로 잘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위로를 기대해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우리의 문제는 참된 안식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안식을 알면서도 다른 곳에서 만족을 구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에 관해 더 많이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기대를 걸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향하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복해서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듣습니다. 찬양하면서 잊고 지냈던 그분의 신실하심을 고백합니다. 기도하면서 다른 곳에 맡겨두었던 염려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갑니다. 예배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무를 채우는 시간이 아닙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우리가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다시 바라보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도록 은혜를 구하는 시간입니다. 물론 예배 한 번으로 오래된 마음의 습관이 모두 바뀌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고백했어도 내일 다시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집을 사모했던 것처럼, 우리도 말씀과 기도와 찬양 가운데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공동체가 매주 드리는 주일예배, 금요예배를 더욱 소중히 여기면 좋겠습니다. 그 시간을 삶의 중요한 약속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직장과 육아, 건강과 여러 사정 때문에 참석하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는 것을 실제 삶의 일정 속에서도 중요하게 여기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반복해서 향하는 곳에 익숙해지기 때문입니다.
결 론
그렇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았고, 신실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다윗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더욱 분명하고,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다윗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를 사모했지만, 우리는 그 아름다우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오신 은혜를 받았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을 마음껏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려했던 세리들과 죄인들의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외면받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병들고 연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함부로 밀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곳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분은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환영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거절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도록, 친히 자기 생명을 내어주시고 죽음의 댓가를 치루셔야 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어떻게 끝까지 감당하셨을까요?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이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기뻐하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기뻐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참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 십자가는 실제적인 고통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히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아버지께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자신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겪으실 고통과 수치,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감당하실 심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 자체가 기쁨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너머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바로, 잃어버린 죄인들이,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장면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어린아이와 함께 휴가로 외국에 나갔습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아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근처에 있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없습니다.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닙니다. 방금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가고, 가게마다 들어가 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조급해집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나들이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먹으려고 했던 음식도, 구경하려던 물건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저 아이를 찾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이제 충분히 찾아봤으니, 그만 집에 돌아가자고 말한다면, 그 말을 듣고 돌아갈 부모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화를 낼 것입니다.
열 시간이고, 하루고, 며칠이고 찾아다닐 것입니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아이를 찾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찾았느냐가 아니라, 아이를 찾았느냐는 것입니다.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울면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울면서 걸어오는 봅니다.
부모는 달려가 아이를 끌어안습니다. 조금 전까지 마음을 짓누르던 두려움이, 안도와 기쁨으로 바뀝니다. 아이를 다시 찾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심정을 가지고,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목자는 그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발견합니다. 누가복음 15장 4절과 5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이 목자는 양을 찾아내고 즐거워했습니다. 기뻐했습니다. 목자가 기뻐한 것은 수고가 끝났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잃어버렸던 자기 양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풉니다. 성경은 양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참 놀랍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없이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너덜너덜한 상태도 상관없습니다. 가난한 심령,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기를 적극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스바냐 3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즐거워하십니다. 잃어버린 양이 찾은 것 처럼, 안도하십니다.
여러분!! 예배당에 들어설 때, 단지 익숙한 자리에 앉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기쁘게 맞아주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마음으로 예배하십시오.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지내는 작은 방이든, 가족과 함께하는 집이든, 그곳에서 말씀을 펴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십시오.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시고,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집을 사모하는 것도 은혜이지만, 그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맞아주신다는 사실은 더욱 놀라운 은혜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우리도 삶의 어느 자리에 있든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며, 이 고백이 주일의 예배당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이어지는 평생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