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읽는 묵상
사람은 자신을 아프게 한 것보다, 그것이 언젠가는 자신을 살려 줄 것이라는 기대에서 더 오래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를 소진시킨 직장을 미워하면서도 그 직장에서 인정받아야 비로소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내 마음을 함부로 대했던 사람에게 실망하면서도 그 사람이 언젠가 나의 진심을 알아주면 지금까지 받은 상처가 모두 취소될 것처럼 기다립니다.
돈 때문에 관계가 메말라지고 몸까지 지쳤는데도 조금만 더 벌면 불안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상처를 좋아해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아직 받아 내지 못한 판결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네가 틀리지 않았다.’ ‘너는 실패자가 아니다.’ 우리는 나를 아프게 한 대상에게서 이 말을 끝내 받아 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떠나면서도 마음은 떠나지 못합니다. 관계를 끊고도 그 사람의 반응을 살피고, 회사를 옮기고도 이전 직장의 평가를 곱씹으며, 돈을 벌고도 돈이 나에게 내려 줄 안전 판결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나를 상하게 한 힘이 나를 온전히 회복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이 사과할 수는 있습니다. 직장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 형편이 나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 존재의 최종 판결자가 되는 순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앗수르는 단순한 적이 아닙니다. 유다는 한때 앗수르를 구원자로 불러들였습니다. 눈앞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줄 강한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앗수르의 군대를 부르는 것이 더 빠르고 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실제로 앗수르는 유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자로 불러들인 힘은 대가 없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도움을 주었지만, 나중에는 주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다의 적을 물리쳤지만, 나중에는 유다의 목을 조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들은 대개 처음부터 악한 얼굴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찾아옵니다. 성취는 가치를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돈은 안전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사람의 인정은 소속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통제는 실패하지 않게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얼마 동안은 그것을 줍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성취는 가치를 조금 준 뒤, 계속 자신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돈은 안전을 조금 준 뒤, 더 많이 가져야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인정은 소속감을 조금 준 뒤, 사람들의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통제는 불안을 잠시 낮춰 준 뒤,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더 큰 불안을 남깁니다.
거짓 구원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조금 주고, 결국 우리 자신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앗수르가 사라지는 데서 먼저 시작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회복은 나를 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면서도 여전히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을 원망하면서도 직장의 평가로 나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돈을 비판하면서도 돈을 마지막 피난처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하면서도 그 사람의 인정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미워한다고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더 이상 나를 규정하지 못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앗수르를 무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후반부에서 앗수르는 실제로 예루살렘 가까이까지 내려옵니다. 성읍들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도망합니다. 앗수르는 놉에 이르러 시온을 향해 손을 흔듭니다. 위협은 상상이 아닙니다. 점점 가까워지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앗수르는 시온 가까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온의 마지막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하루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평가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판결할 수는 없습니다. 실패는 인생의 한 장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을 쓸 권한은 없습니다.
믿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자신을 안심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두려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크지 않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서 “너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판결을 받아 내기 위해 마음과 삶을 소진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