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읽는 묵상
수요일쯤 되면 마음에도 피로가 쌓입니다. 월요일에는 분명 불편하게 느껴졌던 일도, 며칠이 지나면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받아들이게 됩니다. 말을 날카롭게 해 놓고도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 그래”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하고도 “내가 사람을 좀 정확히 보는 편이야”라고 여깁니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도 “더 효율적인 때를 기다리는 중이야”라고 설명합니다.
내게 유리한 선택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결정”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잘못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죄악을 “수레의 줄로 끄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죄에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이 줄을 붙잡고 죄를 끌어당깁니다. 처음에는 내가 죄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죄가 나의 생각과 감정과 선택 전체를 끌고 갑니다. 더 무서운 것은 죄를 짓는 것보다 죄를 죄라고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고, 어둠으로 빛을 삼으며 빛으로 어둠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들은 아무 기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나름의 기준이 너무 분명한 사람들입니다. '
문제는 그 기준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선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불편하게 하면 악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말은 지혜라 부르고, 회개를 요구하는 말씀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깁니다. 성과가 있으면 과정의 부정함을 눈감고, 손해가 예상되면 마땅히 해야 할 일도 외면합니다.
본문은 이것을 단순한 판단 착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처럼 살아가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말씀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판결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를 기다리지 못한 채 “그분이 정말 계시다면 지금 당장 보여 달라”고 재촉합니다.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내가 통제할 수 있으며, 내 계획에 도움이 되는 하나님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불러내는 조력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까지도 심판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운 까닭은 하나님께서 감정적으로 화를 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 사실이라고 믿어 온 자기기만을 한순간에 무너뜨리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보게 되고, 견고하다고 믿었던 삶은 마른 풀처럼 사라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절망 속에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선을 악이라 부르고 악을 선이라 부르던 우리의 왜곡된 판단까지 짊어지고 십자가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심판받아야 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도록,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자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내가 완전히 잘못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너지는 일이 아닙니다.
나보다 나를 더 정확히 아시며, 심판 가운데서도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판단권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판단을 확신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진실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지키기 위해 진실의 이름을 바꾸고 있는가?” 수요일의 믿음은 거창한 결심이 아닐 수 있습니다. 피곤함을 핑계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 편리함을 지혜라고 부르지 않는 것, 내 감정이 옳다고 확신하기 전에 말씀 앞에서 한 번 더 멈추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바르게 이끌기 시작합니다.
최근 내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현실적 판단’, ‘어쩔 수 없는 선택’, ‘정당한 감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