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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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자리에 계신 예수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요한복음 19장 28-30절펼치기

28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개역개정

서 론

오늘은 성 금요일입니다. 매년, 고난주간의 마지막 금요일 저녁은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대부분 고난주간에는 십자가를 다룹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그리고 어느순간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를 수없이 들었고, 수없이 묵상했고, 수없이 “은혜”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십자가를 잘 알고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십자가를 너무 빨리 이해해 버린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립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말이 너무 빨리 나오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십자가 앞에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충격이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더 이상 우리를 흔들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그 의미를 축소해 버립니다.

십자가 형벌은 정말로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로마에서도 아무에게나 이 형벌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잔혹한 범죄자, 반역자, 사회적으로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나 주어지던 형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단순히 죽이는 형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가장 수치스러운 모욕, 가장 긴 시간을 끌며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이 다 모여 있는 형벌이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 형벌을 받기 전에는 반드시 거치는 과정이 있습니다. 채찍질입니다. 이 채찍은 단순한 채찍이 아닙니다. 끝에 작은 납 조각이나 동물의 뼈 조각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휘두르면, 그 채찍이 살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살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잡아당기면, 살이 함께 뜯겨 나왔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보통 서른 대에서 마흔 대 가까이 이 채찍질을 가했다고 합니다. 이미 이 단계에서 사람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죄수에게 가족이 있다면, 그 가족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군병들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더 세게 때려 달라고 뇌물을 주었던 것입니다. 더 세게 때려서 채찍에 맞아 죽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까지 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채찍에 맞아 죽는 것이 십자가에 가는것보다 차라리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가서는 안 되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십자가 형벌로 가셨습니다. 채찍으로 맞아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완전히 벌거 벗겨지셨습니다. 우리가 보통 예수님 그림을 보면 그래도 뭔가 두르고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벌거 벗겨지셨습니다.

십자가는 한편으로는 극한의 고통을 주는 것이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극한의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히 벌거 벗겨진 상태로 공중에 전시되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약 13cm에서 15cm 정도 되는 긴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손바닥에 박는다고 오해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손목에 박았습니다. 왜냐하면 손바닥에 박으면 십자가를 올릴 때 찢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얇은 나무 판자를 대고, 양쪽의 손목과, 두 발을 겹쳐서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못을 박아 십자가를 들어 올리면 참을 수 없는 큰 고통과 쇼크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죽는 사람들의 의학적 사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사람들의 의학적 사인은 ‘질식사’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힐 때는, 팔이 위로 고정됩니다. 그리고 못이 박힙니다. 그렇게 되면 흉곽 곧 (가슴)이 늘어난 상태로 고정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숨을 들이 마시는 것은 가능하지만 내쉬는 곳이 어렵습니다. 숨을 제대로 쉬려면 가슴을 수축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발로 밀고 팔로 버티며 몸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숨을 “조금이라도” 정상적으로 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을 들 때마다, 손과 발에 못 박힌 못이 조금 더 깊이 파고든다고 합니다. 그럼 너무나 고통스러워 다시 몸을 내립니다. 그런데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다시 숨을 쉬려면 몸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또 아픕니다. 그래서 몸을 다시 내립니다. 그러면 또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짧게는 여섯 시간에서 아홉 시간, 길게는 이삼일 동안 계속해서 숨을 쉴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신음하다가,  결국 몸을 들 힘이 완전히 떨어져 더 이상 몸을 들 수 없게 될 때에 ‘질식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에는 양편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죽이기 위해 로마 군병들은 다리를 겪었다는 장면을 성경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왜 다리를 쳤을까요? 몸을 들 힘을 완전히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결국 질식사로 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형벌의 끔찍함입니다.

그런데 이 끔찍한 십자가 형벌을 예수님께서 당하실 때, 그분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부르짖은 말 가운데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독특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가시 면류관에 가시에 찔리시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가시 면류관의 가시는 아주 길고 강했을 것이고, 학자들은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혹은 “내 손목이 너무 아프다. 내가 숨이 막힌다.

내 발이 너무 아프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전환문장

여기서 궁금해집니다. 요한은 왜 수많은 고통 중에서 “내가 목마르다”라는 한 문장을 남겼을까요? 복음서에서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은 유일하게 요한복음에서만 나옵니다. 요한은 “내가 목마르다”는 표현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저는 오늘 성금요일,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속에서 말씀하신 “내가 목마르다”의미를 살펴보면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먼저, “내가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고백은 실제 고통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고백은 상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목마르셨습니다. 이미 채찍질로 인해 몸은 심각한 출혈 상태에 있었습니다. 피와 체액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몇 시간 동안 매달려 계셨습니다. 탈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탈수가 되면 사람이 어떻게 될까요? 저도 이것을 전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저 역시 배운 내용입니다. 인체의 60%내지, 70%가 물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특히 뇌와 심장은 75% 이상이 물입니다. 그리고 그 단단한 뼈조차도 31%가 물이라고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체내 수분이 1%에서 3% 정도 부족해지면 갈증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두통, 신경통 같은 증상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5% 정도 수분이 빠져나가면 혼수상태로 진입한다고 합니다. 그때부터는 몸이 자기 안에 있는 수분을 잃지 않기 위해 더 이상 땀을 배출하지 않습니다. 몸에 체온이 올라갈 때 땀을 계속 배출함으로써 체온을 낮추는 것인데, 수분을 잃지 않기 위해서 땀을 배출하지 않으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그때 부터 계속해서 체온이 올라가고 사람들이 말하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탈수를 경험하는 사람은 단순히 목마르다는 것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불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예수님이 겪는 실제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7%정도 수분이 빠져 나가게 되면 장기가 손상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고통의 자리 속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람이 겪는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개념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단순히 예수님의 고통만 말하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는 주님의 고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을 묵상해 보면 요한은 반복해서 “목마름”이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자신을 목마름을 채워주시는 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초막절 잔치가 끝나는 그 공허한 날에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에수님은 우리가 그토록 공허하고, 외로워하고, 허무해서 허기진 마음을 다른 것에 찾지 말고 나아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장에서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사건을 통해 비어 있는 인생을 풍성함으로 채우시는 분으로 소개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같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들의 목마름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의 갈증을 끝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요한은 목마름을 해결하시던 분이, 목마름 안으로 들어가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마른 상태를 멀리서 설명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그 목마른  상태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태를 “이해하신 것”이 아니라 그 목마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갈증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마름의 자리에서 하나님 없이 말라가는 존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 없이 말라가는 십자가의 자리에 가셔서 “내가 목마르다”고 고백하는 이런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단순히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목마름을 체험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태를 공감하기 위해서 가셨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신 것은 공감하기 위해서 아니라, 대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 없이 말라가는 이 목마름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목마름을 가볍게 생각해 왔습니다. 조금 공허한 것, 조금 채워야 하는 것, 조금 힘든 상태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는 표현은 ‘지금 나는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단절의 자리에서 목마르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나는 지금 심판의 자리 안에 있다는 선언이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이 심판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보통 심판을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는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심판은 그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심판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사건이기 전에 어떤 상태입니다.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상태, 생명의 근원과 끊어진 상태, 사랑과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 상태가 계속되고, 굳어지고, 끝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습니까? “내버려두심”, 그냥 그 상태가 지속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심판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우리는 지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옥은 이 심판의 상태가 끝까지 이어진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심판과 다른 것이 아니라 심판이 완성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지옥을 생각하면 불타는 곳, 벌 받는 곳, 두려운 장소를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성경은 지옥을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불도 나오지만 어둠도 나옵니다. 이것은 은유입니다. 불과 어둠이 어떻게 함께 공존할 수 있을까요? 모순처럼 보입니다. 다시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은유입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함일까요? 끊임없는 고통과 지속되는 고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드시며, 지옥을 설명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지옥에 있는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4절입니다.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이 부자는 음부에서 이 고백을 합니다. “내가 목마르다.” 지옥의 언어는 “아프다”가 아니라 “목마르다”입니다. 필요는 계속되는데 채워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도 이 느낌을 조금 압니다. 인정을 받으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오래 가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채워질 줄 알았는데 다시 흔들립니다.

성과를 내면 안정될 줄 알았는데 또 불안합니다. 조금 채워진 것 같지만 금방 다시 마릅니다. 그래서 또 원하고, 또 붙들고, 또 찾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살펴보면, 아주 중요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일은 없어야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지옥'에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단 한 가지를 들어주신다고 하십니다. “한 가지만 구해라” 그럼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나가게 해 주세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천국으로 보내 주세요”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부자는 지옥에서 꺼내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은 “여기서 나가게 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는 고통은 말하면서도 방향은 바꾸지 않을까요?

왜 그는 나가게 해달라고 하지 않고, “목마름을 해결해 주세요”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게 이해되지 않으면 지옥을 오해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단순히 탈출할 수 없는 장소가 아닙니다. 상태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존재가 끝까지 굳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렇게 고통스러우면 당연히 하나님을 찾지 않을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통이 사람을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힘들 때 하나님께 돌아가기보다 문제만 해결되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상황만 바뀌기를 원합니다. 불편함만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살던 삶 자체를 돌이키고 싶어 하지는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문제만 해결해 주세요” 하지만 이렇게는 잘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던 나를 바꿔 주십시오” 이게 바로 우리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나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는 방향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이 계속되고 굳어지고 끝까지 이어지면 그것이 심판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더 이상 바뀌지 않으면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하나님이 억지로 가두신 감옥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선택해 온 삶이 결국 스스로를 가두는 상태입니다

문이 없어서 못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가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보다 자기 방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꺼내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이 말라가는 존재의 끝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셨습니다.

결 론

이것은 지금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말라가는 심판의 상태를 겪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가신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분이 목마르셨고 그분이 계셔야 할 자리로 우리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몸이 완전히 말라가고 있는 상태를 겪고 계셨고, 숨울 쉬기 위해 몸을 들어 올릴 때마다 못이 더 깊이 파고드는 고통을 감당하고 계셨으며, 타는 듯한 갈증 속에서 더 이상 버틸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속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못하겠다.” 내가 목말라서, 더이상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니까 가능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 장면은 더 이상 우리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신 고통의 크기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고통에도 쉽게 무너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조금만 일이 틀어져도 마음이 흔들립니다. 조금만 관계가 어긋나도 버티기 어려워집니다. 조금만 인정받지 못해도 내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고통을 단순히 “불편함”으로 경험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건 없어져야 한다”, “이건 빨리 끝나야 한다”, “이건 감당할 수 없다” 그리고 결국 “못하겠다” 여기까지 가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통 앞에서 우리는 의미를 찾기보다 탈출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유를 묻기보다 벗어나는 길을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속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상황을 바꿔 주세요” 하지만 이렇게는 잘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시는지 보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로 반응하십니다. 같은 고통 속에서 다른 말을 하십니다.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못하겠다”가 아니라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없애야 할 것”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들어가야 할 자리”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참아낸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버텨낸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고통의 자리 끝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마름에 끌려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목마름에서 건짐 받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 없이 말라가는 존재로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없이 말라가는 존재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목마름을 끝까지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여전히 목마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흔들리고,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목마를 때 바로 다른 것으로 가지 마십시오. 핸드폰으로 도망가지 말고, 사람에게 매달리지 말고 ,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붙들지 말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나 지금 목마릅니다”, “주님, 나 지금 불안합니다”, “주님, 이 상황을 내가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너무 오래 살았습니다.

이제는 터진 웅덩이에서 나와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물을 바꾸십시오. 주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이미 우리의 목마름을 대신 감당하신 분, 이미 우리의 끝을 대신 지나가신 분 이미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빼앗기 수 없는 기쁨과 만족과 희락과 소망이 우리 마음에 채워져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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