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오늘 본문은 너무 유명한 말씀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주로 기적에 집중합니다. 어떻게 떡 다섯 개가 오천 명의 식사가 되었을까? 어떻게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렇게 많아질 수 있었을까?를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매우 평화로운 장면을 떠올립니다. 푸른 잔디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나누어 주십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습니다. 마치 소풍 같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생각보다 분위기가 다릅니다. 본문에는 계속해서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 바로 앞에는 세례 요한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의 체면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세례요한을 죽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왕은 있었지만 백성을 돌보지 않았고, 권력은 있었지만 정의는 무너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지쳐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예수님의 소문이 온 땅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떠나가고, 무너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선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33절을 보면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나자, 사람들은 여러 마을에서 뛰어서 그들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예수님보다 먼저 도착합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저는 여기서 인간의 한 가지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희망이 보이면 달리기 시작합니다. 정말 힘든 사람도 소망이 보이면 움직입니다. 아무리 지쳐 있어도 기대가 생기면 발걸음을 옮깁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 힘들어도 공부하는 이유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직장인이 월요일 아침에 다시 출근하는 이유도 기대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이유도 소망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누군가는 병이 낫기를 기대했습니다. 누군가는 삶이 달라지기를 기대했습니다. 누군가는 무너진 인생이 다시 세워지기를 기대했습니다. 누군가는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찾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보다 현재를 견디는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를 기대하는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신다는 믿음, 그것이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히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면이 아닙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기대를 품고 예수님께 달려온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큰 무리속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동정심이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날이 저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빈 들에 모여 있었습니다. 저녁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먹을 것은 없습니다. 날은 저물어 갔습니다. 제자들은 상황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상식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무리를 집에 보내자는 제안”을 합니다.
35절과 36절입니다. "이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사실 제자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말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입니다. 시간은 늦었습니다. 장소는 빈 들입니다. 누가 봐도 답은 하나입니다. 이제 각자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환문장
저는 오늘본문을 통해서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셨는지, 여러분과 함께 빈들에 있는 들판으로 가서, 주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각해 보면, 이것은 굉장히 이상한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돈도 없습니다. 음식도 없습니다. 방법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곧바로 반문했습니다. "우리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200일치 임금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수천만 원에 해당하는 큰돈입니다. 제자들의 말은 사실상 이런 의미입니다. "주님, 그건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의 말은 사실 맞았습니다. 그들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정말 돈이 부족했습니다. 음식이 부족했습니다. 방법도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명령을 하셨을까요? 정말로, 제자들의 능력을 믿었기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또한 아닙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부족함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경험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는 계산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계산 안에 예수님이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성경 내내 이런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홍해를 건너라고 하셨고, 여호수아에게는 요단강으로 발을 내딛으라고 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는 군사를 줄이라고 하셨고, 제자들에게는 오천 명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능력이 끝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제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먼저 계산합니다. 우리는 늘 자신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도 부족합니다. 돈도 부족합니다. 사랑할 힘도, 섬길 여유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합니다. "제가 가진 것으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속으로 말합니다.우리는 늘 자신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취업 준비하느라 너무 바쁩니다.” "취업만 되면 섬기겠습니다.”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취업이 되면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막 회사에 들어가서 정신이 없습니다.”, "조금 적응되면 섬기겠습니다." 맞습니다. 정말 공감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적응하면 또 말합니다.
"지금은 승진이 중요합니다.”, "조금 자리 잡으면 여유가 생길 겁니다.” 이렇게 말을합니다. 결혼 전에는 "결혼하면 더 안정적으로 섬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결혼하면 "가정을 세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아이를 낳으면 "지금은 아이를 키워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크면 "이제는 노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신기하게도 인생은 늘 부족합니다. 늘 바쁩니다. 늘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생각합니다. "조금 더 가지게 되면.”, "조금 더 안정되면.”,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하나님께 드리고, 그때 누군가를 섬기고, 그때 나누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생을 돌아보면 그런 날은 생각보다 잘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족함은 형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연봉이 3천만 원일 때도 부족하고, 연봉이 5천만 원일 때도 부족합니다. 월세 살 때도 부족하고, 집을 사도 부족합니다. 혼자 살 때도 바쁘고, 결혼해도 바쁩니다.
우리는 더 많이 가지면 넉넉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더 많이 가질수록 지켜야 할 것도 많아집니다. 가진 것이 적을 때는 얻는 것이 고민이지만, 가진 것이 많아지면 어떻게 더 늘릴지가 고민입니다. 직장이 없을 때는 취업이 목표지만, 직장이 생기면 평가와 승진이 부담이 됩니다. 집이 없을 때는 집을 갖는 것이 꿈이지만, 집이 생기면 대출과 유지와 하락이 걱정이 됩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소유를 통해 안정감을 얻는 존재가 아닙니다. 소유를 통해 새로운 불안을 만들어 내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소유는 만족을 주기보다 비교의 기준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을 얻는 순간, 감사했지만, 얼마 후에는 그것이 당연해집니다. 처음 차를 샀을 때는 행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좋은 차가 눈에 들어옵니다.
처음 집을 마련했을 때는 감격했지만, 곧 더 넓은 집, 더 좋은 지역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만족에 익숙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만족을 소비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것 같지만, 오히려 더 많이 붙잡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결국 문제는 가진 것의 양이 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을 이상화 하지도 않고, 부를 악으로 규정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묻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이 당신을 소유하고 있는가?”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38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이 질문이 참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돈을 더 구해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오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없는 것부터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없는 것을 계산하게 하지 않으시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없는 것에서 시작하시기보다, 우리에게 이미 맡겨진 것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가서 확인해 보니 무엇이 있었습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그러나, 오천 명 앞에서 그것은 너무 작았습니다. 사람들의 계산으로는 있으나 마나 한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도 비슷한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제가 하는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챙긴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내 작은 헌금이 교회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내가 한 번 용서한다고 그 사람이 변하겠습니까?” 우리는 거창한 말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늘 이렇게 계산합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미루고, 섬김을 미루고, 나눔을 미루고, 순종을 미룹니다. 더 많이 생기면, 더 준비되면, 더 여유가 생기면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부족해서 순종하지 못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작은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큰 기회는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작은 순종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보시며 "너무 적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으로는 안 된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41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기 전에, 있는 것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일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주님의 손에 맡길 때, 그것을 통해 일하십니다.
떡 다섯 개가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물고기 두 마리가 대단해서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지고 있었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손에 들려졌느냐였습니다. 사람의 손에 있을 때는 도시락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는 수천 명을 먹이는 하나님의 공급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언제나 충분함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부족해 보이는 순종에서 시작되었 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닙니다. 완벽한 조건도 아닙니다. "지금 너희 손에 있는 것을 예수님의 손에 맡길 수 있겠느냐.” 그 질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시간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능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서일 수도 있고, 한 사람을 위해 드리는 기도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이 정도로 무슨 변화가 있겠어?”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작은 것을 통해 큰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떡을 만들어 수천 명에게 직접 나누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조금 다르게 기록합니다. 41절입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직접 무리에게 떡을 나누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이 다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기적은 예수님의 손에서 시작되었고, 제자들의 순종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 없고 가진 것 없는 제자들을 구경꾼으로 남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기적의 통로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시는 것보다, 기적을 경험하는 제자를 세우시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떡만 늘리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믿음도 함께 자라게 하셨습니다.
받기만 하던 사람을 나누는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구경하던 사람을 섬기는 사람으로, 관객을 제자로 빚어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받은 무엇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중요한 세 가지를 생각해 보자면, 첫 번째는 복음입니다. 두 번째는 물질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생명 곧 시간입니다. 이 세가지를 우리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나누며, 흘려보내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먼저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 용서받았습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을 소장품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흘러가도록 주셨습니다. 우리는 좋은 식당은 소개하고 싶어합니다. 좋은 영화를 보면 알려 줍니다. 좋은 것은 흘려보내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좋은 소식인 복음만은 마음속에만 간직합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좋은 소식인 복음만은 쉽게 나누지 못합니다. 이유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거절당할까 봐 두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잘 설명하지 못할 것 같아 망설입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관계가 불편해질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질문에 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게 된 복음을 이야기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용서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내가 경험한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안될 것 같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한 사람의 말이 누군가에게 소망이 되고, 한 번의 간증이 누군가를 예수님께로 이끌고, 한 구절의 말씀이 무너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고, 한 번의 초대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주에 중앙대 약학대학원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중대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여학생입니다. 캠퍼스 전도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고가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렸을 때부터 알게 된 후배와 같이 기도하게 되었고, 그 후배 친구 한 명이 참여해서 세 명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안될 것 같지만, 기도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습니다. 학교에서 부스를 허락받았고, 취지를 설명하고, 1000명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생각을 가지고 기도했는데, 이 소식을 알게 된 몇몇 교회에서 후원도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클립스 1000개, 아이스트 1000개를 넘게 준비할 수 있게 되었고, 2일간, 약 1500명에게 복음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게 될까? 청년들이 들을까? 이런 생각을 했지만, 저의 생각은 저의 육신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본 것은 교회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 교회는 알지만, 기독교 신앙에 대해 관심도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3분간 알차게 준비한 복음전도지를 듣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연히 많은 질문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들이 들은 것일까? 아니면 이클립스 받기 위해서 앉아있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이 말씀을 의지하고 하고 있었습니다. (사진) 고린도전서 3장 6절과 7절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돈을 단순히 생활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을 그것보다 훨씬 큰 의미로 바라봅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살리라고 맡기신 도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를 먼저 묻지 않으십니다.
"내가 맡긴 것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떡을 붙잡고 있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에 드려지고, 사람들에게 흘러갈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붙들고 있을 때는 단지 내 소유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흘러갈 때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헌금은 단순히 돈을 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헌금은 신뢰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제 삶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제 미래는 통장 잔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있습니다." 이 믿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액수보다 먼저 마음을 보십니다. 많이 드렸느냐보다, 누구를 신뢰하며 드렸느냐를 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물질을 개인에게만 맡겨 두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흘러가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한 사람이 혼자 모든 사람을 돌보게 하지 않으시고, 공동체를 통해 함께 사람을 살리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도, 주일헌금도, 감사헌금도, 선교헌금도, 구제헌금도, 모두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생명을 살리도록 맡기신 오병이어입니다.
한 사람이 드린 작은 헌신은 교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의 양식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오병이어도 한 소년의 도시락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거쳐, 공동체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오늘 교회의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헌금은 오늘도 계속되는 오병이어입니다. 우리가 드린 작은 순종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 사람을 살리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을 흘려보내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을 맡기셨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맡기셨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보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생명을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낸다는 것은, 내 생명의 일부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너무 바쁩니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섬기겠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보면 여유는 기다린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시간이 있어서 중요한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맡긴 생명이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느냐?” 한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시간, 힘든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시간, 새가족에게 말을 걸어 주는 시간,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 세상은 그것을 작은 시간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사람을 위로하시고, 사람을 세우시고, 사람을 살리십니다.
오병이어도 거창한 것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도시락 하나가 예수님의 손을 거쳐 수천 명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시간을 통해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누군가를 살리는 오병이어가 되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할 물질을 맡기셨습니다. 오늘도 살아갈 생명과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교하느라 이미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해서 나누지 못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나누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늘 우리를 다시 십자가 앞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내어놓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자신의 몸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드리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께 무엇을 더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도 비교하지 맙시다. 없는 것을 바라보지 맙시다. 이미 주신 것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손에 맡깁시다. 복음을 흘려보내십시오. 물질을 흘려보내십시오.생명과 시간을 흘려보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기적은 언제나 많이 가진 사람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것을 예수님의 손에 맡기는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주님께 받은 은혜를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