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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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왜 보고만 계십니까?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하박국 1장 1-11절펼치기

1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5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8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11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개역개정

서 론

우리는 이전 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보다 빠르게 정보를 찾으며, 복잡한 자료를 정리하고, 그럴듯한 답까지 만들어 내는 인공지능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모르는 것이 생기면, 오래 고민하기보다 곧바로 검색합니다. 긴 글을 읽고, 스스로 정리하기보다 요약을 요청하고, 여러 의견을 비교하며 판단하기보다,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지 추천받습니다.

생각하는 기계가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는 기계가 발전할수록,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할 위험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질문을 오래 붙들지 않아도 그럴듯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문제를 깊이 고민하기보다, 빨리 결론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생각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정보를 많이 얻는 것과 깊이 생각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답을 빨리 얻는다고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정보를 수집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며, 그 판단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은 중요합니다. 질문은 우리가 아직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표시이며, 눈앞의 현실이 정말 옳은지를 살펴보려는 인간의 몸부림이 질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질문을 불편해합니다. 학교에서는 정해진 답을 빨리 찾는 학생이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회사에서는 상사의 결정에 질문하는 사람보다 말없이 실행하는 사람이 조직에 잘 적응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회의 시간에 문제를 제기하면 “대안도 없이 비판만 한다”는 말을 듣고, 부당한 업무를 지적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책임감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까 두려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질문하기 전에 먼저 계산합니다. ‘이 말을 해도 괜찮을까?’, ’괜히 불편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질문이 없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을 꺼냈을 때, 돌아올 반응이 두려워서 침묵합니다.

교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은 사람은 모든 일에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처럼 느낍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라고 말해야 하고, 이해되지 않아도 “그래도 감사해야지요”라고 대답해야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반대로 질문을 꺼내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일까 두렵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두렵지만, 때로는 질문하는 자기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쑥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삼킵니다. 질문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질문을 감추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질문을 한다고 해서 그 질문이 언제나 믿음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왜?”라는 질문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물을 수 있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끝내기 위해 물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따르지 않을 이유를 찾기 위해 질문합니다. 거절을 위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묻는 질문도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잘못 보고 있습니까?”. “주님 왜 이렇습니까?” 질문합니다. 사실 우리의 질문은 이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렇게 거절을 위한 질문인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는 질문인지, 선명하게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싶으면서도, 그 뜻이 내 삶을 바꾸어 놓을까 두렵습니다. 우리의 질문에는 믿음과 의심, 기대와 자기방어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질문이 얼마나 순수하냐가 아닙니다. 그 복잡한 질문을 어디로 가져가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떠날 이유로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내 안의 두려움과 서운함까지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갈 것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전환문장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는 이러한 면에서 참으로 배울 것이 많습니다. 하박국은 모든 감정이 정리된 뒤 하나님께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박국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다같이 2절읽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박국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눈앞의 불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계속되는 침묵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박국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다는 사실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현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도 이런 자리에서 생깁니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취업과 진로의 문이 계속 닫히고,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잡아 갈 때, 묻게 됩니다. “하나님, 제 길과 때를 아시는 분이 주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 제 삶만 제자리걸음인 것처럼 느껴집니까?” 질문합니다.

좋은 관계와 믿음의 가정을 위해 기도했지만 만남은 쉽게 이어지지 않고, 어렵게 시작한 관계마저 상처로 끝날 때도 묻게 됩니다. “하나님, 저를 사랑하시고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 관계 안에서는 계속 외롭고 아파야 합니까?”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정직을 선택하고, 예배와 공동체를 지키려 했는데도 삶이 더 잘 풀리기는커녕, 손해를 보고 오해를 받을 때도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 주님의 길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따라갈수록 제 삶은 더 어려워지는 것처럼 보입니까?” 질문합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님을 떠나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믿어 온 하나님과 내가 마주한 현실 사이의 간격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가져가는 질문입니다.

본 론

그렇다면 하박국은 어떤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질문했을까요? 하박국의 질문은 골방에서 만들어진 철학적인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질문 뒤에는 매일 바라보아야 했던 시대의 현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선지자, 예언자는 단지 미래의 일을 알아 맞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대를 주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으로 왕의 정책이 누구를 풍요롭게 하고, 누구를 가난하게 만드는지 살펴봅니다.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묻습니다. 사람들이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발전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성공이라고 보시는가.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정말 당연한 현실인가.

하박국도 그렇게 자신의 시대를 바라보았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하박국이 남유다말 여호야김 시대 전후에 활동한 것으로 봅니다. 당시 유다는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활기차 보였습니다. 왕이 있었고, 관리가 있었으며, 재판이 열렸고, 성전에서는 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본 현실은 달랐습니다.

2절에서 그는 “강포”라고 외칩니다. 힘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약한 사람의 몫을 빼앗는 것, 다른 사람의 노동을 이용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는 것, 법과 제도가 힘없는 사람보다 힘 있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 이것이 강포입니다. 그리고 강포를 막아야 할 법과 제도까지 마비되어 있었습니다.

4절에 보면, 하박국은 율법이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해이해졌다’고 말합니다. 법은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정의는 말해 졌지만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힘없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이 그를 보호하지 못했고, 힘 있는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도, 책임을 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불의를 저지른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불의를 지적한 사람이 공동체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말합니다. “정의가 굽게 행하여집니다.” 정의가 전혀 없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왜곡된 정의가 시행되는 것입니다.

불의를 정의라고 부르고, 약자를 보호하는 일을 특혜라고 부르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조직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상사는 “회사 방침이다”라고 말합니다. 담당자는 “내게 결정 권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동료는 “괜히 나섰다가 나까지 손해를 본다”며 침묵합니다. 피해자는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라며 자신을 탓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누군가는 피해를 계속해서 봅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악은 자신의 작은 책임을 외면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침묵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시대의 가장 무서운 문제도 ‘강포'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습니다. 강포가 일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반복되는 불의에 적응합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부당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같은 일이 반복되면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더 지나면 부당함에 적응한 사람이 현실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불의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불의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강포가 반복되면 사람들은 악을 악이라고 부르지 않고 현실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시대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모두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강포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강포가 일상이 되는 시대속에서  하박국이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지듯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구했습니다. 이런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보면 이런 뜻입니다. “하박국아,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일하고 있다. 다만 내가 행하는 일이 너의 예상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누가 미리 말해 주어도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박국은 아마 하나님께서 악한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정의로운 왕을 세우며, 율법과 질서를 회복해 주시기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6절보면 하나님이 “내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키겠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대아 사람은 당시 새롭게 부상하던 바벨론 제국을 가리킵니다. 주전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바벨론에게 무너지고, 주전 605년 바벨론이 이집트를 격파하면서 유다 역시 바벨론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의 땅을 빼앗고, 성읍을 무너뜨리며,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잔인한 제국이었습니다.

하박국은 유다의 강포를 심판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유다보다 훨씬 더 강포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일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하박국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유다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에 징계가 필요하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 유다보다 더 악한 나라가 하나님의 심판 도구가 되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침묵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이 하박국의 질문을 끝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은 질문으로 그를 이끌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방식 사이에 모순처럼 보이는 지점을 물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미워하시고, 악을 심판하시며, 의로운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더 악한 바벨론이 일어나 유다를 삼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믿는데, 하나님의 방식은 거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다고 믿는데, 하나님의 결정은 정의롭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바벨론의 등장은 하박국이 원하는 변화의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유다의 강포가 사라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유다 전체가 바벨론에 의해 흔들리는 방식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악은 제거되기를 원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는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변화의 필요성이 아니라 변화의 방식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도 드러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삶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변화의 필요성만 하나님께 맡기는 것 같습니다. 변화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무엇은 바뀌고, 무엇은 남아 있어야 하는지는 미리 우리 스스로 정해 놓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기도는 종종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의지하는 것은 건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나님, 제 삶을 새롭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방식은 그대로 남겨 주십시오”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의 대가는 치르고 싶지 않습니다.

회복은 원하지만, 회복을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남겨 두고 싶습니다. 잘못된 질서는 고쳐지기를 바라지만, 그 질서 안에서 내가 누리던 익숙함과 안전까지 흔들리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의 예상과 다르게 올 때 당황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보다 더 깊은 곳을 건드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경이 달라지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환경에 매달리게 했던 우리의 두려움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달라지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상대방의 반응으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던 우리의 마음을 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가 달라지기를 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녀의 미래를 통제하려 했던 부모의 기대부터 내려놓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수입이 늘어나기 전에 소비 습관과 비교 의식, 돈으로 불안을 잠재우려 했던 마음이 먼저 드러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돈이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으로 우리를 빚으려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상한 방식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가 예상한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바국은 모든 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바벨론을 보며 내린 판단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은 실제로 악했습니다. 유다보다 더 폭력적이었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삼키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모든 것을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박국은 바벨론이 일어나는 것은 보았지만, 바벨론이 어떻게 무너질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하박국은 유다가 심판받는 과정은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심판 이후에 무엇을 이루실지는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 장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야기의 처음과 과정과 마지막을 함께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금 눈앞에 있는 한 장면을 봅니다. 취업에 실패한 오늘을 봅니다. 관계가 끝난 오늘을 봅니다. 몸이 아픈 오늘을 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은 오늘을 봅니다. 그리고 그 한 장면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선하신지, 내 인생에 소망이 있는지를 판단하려 합니다.

그러나 한 장면은 이야기 전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이 실제로 아프고 부당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억지로 좋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은 나쁜 일을 좋은 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상처를 입고도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길을 잃으신 것은 아닙니다. 내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결말을 알지 못한다고 하나님께 결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쉽게 불신합니다. 설명할 수 있어야 안심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신뢰합니다. 어떤 일이 왜 일어났으며 앞으로 어떻게 끝날지 알아야 마음을 놓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기보다, 내가 이해한 설명을 믿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제할 수 있는 설명일 때가 많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려 주십시오.”, “언제 끝나는지 알려 주십시오.”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확실히 말씀해 주십시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설명을 즉시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하심마저 의심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방법을 이해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성품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그 당시 현실이 하나님의 성품을 최종적으로 정의하게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상황이 좋으면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말하고, 상황이 나빠지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계속 달라집니다. 일이 잘 풀리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고, 일이 풀리지 않으면 나를 외면하시는 하나님이 됩니다.

기도가 응답되면 신실하신 하나님이고, 응답이 지연되면 약속을 잊으신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에 따라 성품이 바뀌시는 분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변하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체 계획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상황을 근거로 하나님을 해석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붙들고, 그 하나님을 통해 상황을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무관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연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낯선 방식이 하나님의 잘못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보는 현재에는 바벨론이 마지막처럼 보였습니다. 바벨론이 일어나고, 유다가 무너지며,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역사의 마지막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마지막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이 마지막이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불의한 사람이 이긴 것처럼 보이고, 정직한 선택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며, 기도가 허공으로 사라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 계획이 무너져도 하나님의 선한 뜻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악한 사람이 당장 심판받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악에 동의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을 즉시 제거하셔야만 일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와 방식으로 악의 한계를 정하시고, 악을 심판하시며, 심지어 악한 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하셨다고 바벨론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바벨론은 그 악으로 인해 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어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악이 자신의 선한 뜻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무조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가벼운 낙관이 아닙니다. 믿음은 이유를 알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악에게 역사의 마지막 결론을 넘겨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입니다.

결 론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믿을 수 있습니까? 지금 눈앞의 현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해 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경험도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여전히 응답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다가 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믿었지만, 자신이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단지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다 뜻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믿을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이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그분의 거룩하심을 붙들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이 악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디에서 하나님이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인간의 악조차 하나님의 구원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신 한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박국이 탄식했던 일이 십자가에서 가장 깊이 일어났습니다. 악인들이 의로우신 분을 삼킨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잠잠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십자가만 보면 거짓이 진실을 이기고, 폭력이 사랑을 짓밟으며, 죽음이 생명을 삼킨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구원의 성취가 아니라 모든 기대가 무너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던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살리는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정죄를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악이 선해진 사건이 아닙니다.

악조차 하나님의 구원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하박국은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현실을 보며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는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불의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음에 삼켜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후, 하나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음이 마지막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무덤도 예수님을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침묵처럼 보였다면,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 침묵 속에서도 구원을 이루고 계셨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분명히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의 고통 가운데 들어오신 분이심을 믿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악과 죽음에게 마지막 말을 넘겨주지 않으시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눈앞의 한 장면만 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너무 빨리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나님께서 길을 잃으신 것은 아닙니다. 내 계획이 무너져도 하나님의 선한 뜻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믿음은 질문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하면서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직 결말이 보이지 않아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말씀을 가지고 계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방식을 다 이해한 뒤에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눈앞의 현실보다 십자가를 더 믿고, 불안의 해석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믿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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