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읽는 묵상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도 우리처럼 이런 일상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인생이 정리된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준비된 상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결심의 자리에서 부름받지 않았고, 하루를 살던 중 부름받았습니다.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듣고 큰 소리 없이, 조용히 예수를 따라갑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은 놀라울 만큼 단순합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무엇을 주실 건지 묻지 않습니다. 어떤 계획이 있는지 캐묻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머무는 자리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긴 설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논리로 설득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라.” 증명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해하고 오라는 말도 아닙니다. 함께 있어 보자는 초대입니다. 그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어떤 감정이 생겼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날 이후, 그들의 하루의 중심이 이동했다는 사실입니다.
시간표는 같았을지 몰라도, 중심은 달라졌습니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로였을지라도, 의지하는 분은 바뀌었습니다. 안드레는 그날 이후 자기 형제를 찾아갑니다. 증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설명도 길지 않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의 말은 언제나 이렇게 단순합니다.
과장이 없고, 설명이 길지 않고, 삶이 먼저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며 그의 지금 모습보다 그의 장차 될 모습을 먼저 부르십니다. 아직 흔들리고, 아직 미완성이지만,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미래를 먼저 선언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람을 현재로만 규정하지 않으십니다. 빌립에게 하신 말씀도 같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은 더 잘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방향을 바꾸라는 초대입니다. 속도를 높이라는 말이 아니라, 기준을 옮기라는 부르심입니다. 나다나엘은 처음에 의심합니다. 쉽게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의심을 꺾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가 혼자 있었던 자리, 아무도 보지 못한 시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겉보다 속을 먼저 아시고, 사람의 말보다 사람의 시간을 먼저 보십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를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왜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다가오십니다.
지금 이 화요일 아침,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와 하루를 함께 보내겠느냐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 준비하고 오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의 오늘 한가운데에서 나를 중심으로 살아볼 수 있겠느냐는 조용한 초대입니다.
복음과 성찰 3가지
우리는 종종 예수님께 답을 구하지만, 주님은 먼저 자리를 함께하자고 초대하십니다. 믿음은 문제를 해결받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한가운데서 누구와 머무는지를 바꾸는 일입니다.
나는 오늘 예수님께 무엇을 묻고 있습니까? 해결을 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십니까”라고 묻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하루의 무게는 일정이 아니라 중심에서 결정됩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지치는 이유는, 내가 붙든 것이 주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내 하루의 중심은 어디에 놓여 있습니까? 성과와 불안이 방향을 정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의 임재가 하루를 지탱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지금의 나를 보고 부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장차 될 나를 먼저 부르십니다. 믿음은 현재의 모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신 미래를 오늘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나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실패와 부족함으로 정의하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이 말씀하신 미래를 믿고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지 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