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이지열 담임목사
서 론
성경에는 믿음으로 끝까지 걸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모세, 여호수아, 다윗, 사무엘…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붙들려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고 묵상합니다. 하지만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처음엔 괜찮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무너지고, 끝은 어둡습니다.
요아스가 그랬고, 오늘 만날 아마샤가 그렇습니다. 회복의 반전도, 극적인 부흥도 없습니다. 그냥 무너집니다. 이런 본문은 설교에서 자주 비켜갑니다.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침묵하는 본문’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이름을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은 인간의 성공담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개입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인간의 반복된 죄와 어리석음도 하나님의 이야기 밖에 버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다윗처럼 회개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끝내 돌아서 버린 사람의 이름도 담겨 있습니다. 이건 정죄를 위한 기록이 아닙니다. 성경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어두운 이야기 안에 우리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가 아니라, “이게 바로 내 이야기구나”라고 봐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아마샤의 이야기도 먼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 이야기입니다.
아마샤는 요아스의 아들입니다. 어릴 적부터 제사장 여호야다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왕궁에는 율법이 스며 있었고, 성전은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회심이나 결단의 사건 없이 자연스럽게 신앙을 배웠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2절)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도 드렸고, 말씀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심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지만, 삶의 주도권은 여전히 자기 손에 있습니다.
이게 바로 아마샤의 신앙이었고,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떠난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심으로 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던 날이 있었지만, 이젠 익숙함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다니잖아.” “그래도 주일은 지키잖아.” “그래도 세상 사람보단 낫지.”
‘그래도’의 신앙이 기준이 되어버린 겁니다. 익숙한 신앙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괜찮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신뢰의 무게중심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겉은 믿음인데, 속은 불신입니다. 예배하는 불신앙, 말씀을 아는 불순종. 하나님을 거부하진 않지만, 내 선 안에서만 인정합니다.
아마샤가 그랬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아마샤는 왕이 된 후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심판합니다. 분노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권력도 있었습니다. 복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명기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아버지의 죄로 자녀를 벌하지 말라.” 그 자녀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옳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달랐습니다. 동정도, 신앙도 아니었습니다.
계산이었습니다. 정치적 명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온전한 마음으로는 아니었다.” 이게 균열의 시작입니다. 겉으론 순종, 속으론 계산. 하나님을 계산 아래 두는 신앙. ‘내 선’에서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아마샤는 에돔과 전쟁을 준비합니다. 북이스라엘에서 용병 10만 명을 고용합니다. 100달란트를 줍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그때 선지자가 와서 말합니다. “왕이여, 이스라엘 군대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미 돈을 줬습니다.” ‘이미’라는 말은 묘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내 계획이 더 현실적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돌이키기 싫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이미 정했어요.” “이미 늦었어요.” 하나님께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는 겁니다.
아마샤에게 하나님은 인격적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계산을 보완해주는 존재였습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100달란트보다 더 많은 것도 주실 수 있다.” 그건 보상 약속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이미 늦었다’는 네 마음에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아마샤는 하나님을 계산의 대상으로만 봤습니다.
순종도 거래였습니다.
아마샤는 선지자의 말을 듣고 용병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집니다. 돌아가던 북이스라엘 용병들이 유다 성읍을 약탈한 겁니다.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불안이 밀려옵니다. 계산된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그는 하나님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에돔의 신상을 가져와 경배합니다.
혼합주의로 빠집니다. 하나님도, 에돔의 신도 함께 두는 신앙. 사실상 자신을 섬기는 신앙입니다. 이건 아마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충분히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내 선’ 안에서만 믿는 것입니다.
결 론
우리는 아마샤를 보며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순종의 부담을 느낍니다. 우리도 계산된 신뢰 위에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불완전함을 아시면서도 순종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왜일까요? 사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주신 사랑을 누리게 하시려는 겁니다. 순종할 때 확신이 자랍니다.
불순종할 때 확신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 방향이 바뀌는 겁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할 때 부모의 사랑이 커지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가까워져서 사랑을 더 느끼는 겁니다. 불순종할 때 사랑은 사라지지 않지만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순종은 사랑을 끌어내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입니다.
아마샤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성경은 실패를 지우지 않습니다. 그 위에 은혜를 덧칠합니다. 아마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지만 하나님의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아마샤처럼 흔들립니다. 계산합니다. 두 마음을 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늦었어요”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붙잡는 손에 달린 게 아닙니다. 우리를 붙드시는 예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두 마음을 부끄러워만 하지 마십시오. 계산된 신뢰까지 들고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분은 실패자를 막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초대하십니다. 작은 순종으로 한 걸음만 내딛으십시오. 전화 한 통, 미움 내려놓기, 말씀 한 줄, 정직한 선택. 결과가 예상과 달라도 괜찮습니다. 그분의 은혜가 덧입혀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약 4:8) 주님은 흔들리지 않으신 분입니다. 흔들리는 우리를 붙드시는 분입니다. 계산된 신뢰 속에서도 우리를 끝까지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믿음의 걸음이 있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