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계속 목마르게 하는가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약 1,215자읽는 데 4분

이야기로 읽는 묵상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기도하러 나온 것도 아니고, 인생을 바꾸겠다는 결심을 품고 나온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필요한 것을 채우러 나왔습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 어제와 같은 시간, 어제와 같은 우물가. 그 반복의 한가운데에서 예수님은 그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로 들어오셨고, 일부러 그 시간에, 일부러 그 우물가에 앉아 계셨습니다. 종교적으로 준비된 자리도 아니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안전한 자리도 아닙니다.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반복적이며, 가장 피로한 자리, 우물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이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생수’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늘 마실 실제 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우물은 깊고, 당신에게는 두레박도 없지 않습니까?”

이 말은 단순한 정보 확인이 아닙니다. 이해의 한계가 드러나는 고백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방식, 자기가 경험해 온 세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예수님을 재단하려는 태도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의 삶과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묻습니다. “이 선택이 실제로 결과를 만들어 냅니까?”

직장인은 묻습니다. “이 믿음이 지금 이 조직 안에서 도움이 됩니까?”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은 묻습니다. “이 상황에서 믿음이 현실을 바꿀 수 있습니까?”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묻습니다. “이 불안과 책임을 정말 감당하게 해 줄 수 있습니까?” 문제는 질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질문이 예수님을 가두는 틀이 될 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우물가에 앉아 있는 낯선 남자’로만 보았고, 그래서 그분이 주실 수 있는 생명의 깊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설명을 늘리지 않으십니다. 논쟁으로 설득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더 나은 삶의 방법을 제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삶의 갈증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자주 생각합니다. 환경이 바뀌면 괜찮아질 거라고, 조건이 나아지면 평안해질 거라고, 성과가 쌓이면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우물은 다시 목마르게 할 것이다.”

이해의 한계는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갈증의 원인을 잘못 짚고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묵상과 성찰 3가지

예수님은 우리가 물을 길으러 다니는 삶의 반복 속으로 들어오신다. 나는 지금 어떤 우물에서 내 삶의 의미와 안정감을 길어 올리고 있습니까?

그분은 더 깊은 두레박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물을 바꾸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안식은 더 잘 버티는 데서가 아니라, 다른 근원에 삶을 기대는 데서 시작된다. “그 우물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가장 불편하게 들리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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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열은혜이음교회

은혜이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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