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역대하 24장 1~3, 15~21절
서론: 어른의 언어, 아이의 감정
우리는 나이가 들어갑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하고, 부모가 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어른’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마음은 자라지 못한 채 멈춰 있을 때가 많습니다. 몸은 자랐지만 감정의 나이는 아이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상처 위에 ‘어른의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도 미성숙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른의 언어로 말하지만, 아이의 감정으로 반응합니다. 조금만 다르면 공격하고, 지적을 받으면 차단합니다. 회사에서는 침착하지만, 가정에서는 무너집니다. 배우자의 말 한마디에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 되살아납니다. 이런 반응은 단순한 예민함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의 ‘나’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지금도 우리의 해석을 지배합니다. 친구의 건성 반응 하나에도 마음이 닫힙니다. “역시, 사람들은 내 얘기에 관심 없어.” 어릴 적 외면당한 기억이 현재를 다시 해석합니다. 이것을 ‘내면아이(Inner Child)’라고 부릅니다.
어린 시절의 감정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성인이 된 후에도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아도 믿지 못하고, 비판을 받으면 과하게 방어합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 이런 감정은 가장 잘 드러납니다. 가정, 부부, 친구, 교회 공동체 속에서요. 낯선 이에게는 점잖은데, 가까운 사람에게는 쉽게 무너집니다.
한 상담학자는 말합니다. “결혼은 두 성인과 두 명의 내면아이가 함께 사는 일이다.” 성인은 사랑하지만, 내면아이는 부딪히면 전쟁이 시작됩니다.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내 감정이 튀어나올까 두려워 자리를 피합니다. 불편함 앞에서 도망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연약함을 안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도 기도했습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시 19:12) 보이지 않는 감정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여기서 ‘어린아이’는 나이가 아니라 사랑 없는 미성숙입니다.
전환
오늘 본문에도 왕이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이였던 사람이 나옵니다. 그가 바로 요아스입니다.
보호의 시기 — 품 안에 숨겨진 아이
요아스는 젖먹이 때 아달랴의 칼날을 피해 성전에 숨겨졌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자 피난처였습니다. 밖은 죽음의 세상이었고, 그는 숨죽여 자랐습니다. 늘 누군가의 지시를 따랐고,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들키면 죽는다”는 불안이 그의 마음에 자리했습니다. 보호 속에 자랐지만, 자유는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관계’가 아니라 ‘체계와 규율’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자율이 아니라 의존이었습니다. “나는 보호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마음이 깊게 새겨졌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보호의 시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셨습니다. 사람을 보내셨고, 환경을 통해 품으셨습니다.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지킨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부모, 공동체, 친구, 목회자… 하나님이 보내신 손길입니다. 그러나 보호의 품이 목적지는 아닙니다. 엄마 품이 아이의 종착지가 아닌 것처럼요. 하나님은 품 안에서 자라게 하시고, 세상으로 내보내십니다.
직면의 시기 — 의존이 드러나는 시간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의 민낯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야다에게 기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신앙보다 관계가 중심일 때가 있습니다. 친구가 떠나면 신앙도 흔들립니다. 따뜻한 공동체에 의존할 때, 공동체가 흔들리면 나도 흔들립니다. 습관과 루틴에 기대면 그것이 무너질 때 믿음도 무너집니다.
하나님은 이런 직면을 허락하십니다. 무너짐을 통해 믿음의 뿌리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은 무너짐의 시간이 아니라 다시 세움의 시간입니다. 작은 공동체 안에서 이 직면은 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숨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은혜입니다. 나의 신앙의 뿌리를 드러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관객이 아니라 관계를 원하십니다. 익숙함이 아니라 복음 위에 서게 하십니다.
회피의 시기 — 진실 대신 편안함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방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칭찬과 인정의 목소리를 택했습니다. 직면 대신 회피를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회피합니다. 불편한 대화를 피하고, 감정을 일로 덮고, 외로움을 SNS로 채웁니다. 하지만 그 끝에는 더 큰 공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피하는 요아스에게 스가랴를 보내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말씀을 사랑으로 듣지 못했습니다.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회피는 결국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결론: 요아스와 예수님
요아스의 인생에는 보호, 직면, 회피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같습니다. 보호받았던 시기, 신앙의 민낯이 드러난 시기, 그리고 도망치고 싶었던 회피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여호야다와 함께 무너졌습니다. 여호야다는 중요했지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보호자는 그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야다보다 더 크신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은 물러서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지키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속도를 재촉하지 않고, 상처의 속도를 존중하십니다. “왜 아직도 그러니?”가 아니라 “나는 너와 함께 걷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겟세마네에서 도망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직면하셨습니다. 우리의 회피 자리까지 오신 분이십니다. 여호야다는 죽었지만,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보호자이시며, 우리를 다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공동체는 상처가 드러나는 자리이지만, 동시에 치유가 일어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숨지 마십시오. 회피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품 안으로 걸어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