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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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마음, 은혜의 길목에 서다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학개 1장 6-11절펼치기

6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7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8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9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10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11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

개역개정

2025년 11월 23일 주일

설교자: 이지열 담임목사

서 론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김수현 작가의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의 마음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는 문장들이 많아서, 읽는 내내 밑줄을 긋고, 곱씹고, 생각할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청년들이 흔하게 겪고 있는 감정”이라는 챕터를 읽는데 자꾸 우리 청년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챕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밝음을 잃어버린 것 같다. 웃긴 영상을 봐도 잠깐 웃었다가 곧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새벽에 괜히 우울해져서 좋았던 과거를 돌아보다가, 학창시절이 그리워지고, 노는 것도 이제는 별로 재미가 없다.” “그러다 보니 점점 혼자 있는 게 편해지고, 사람을 만나는 게 귀찮아지고, 휴대폰을 보면 나만 뒤처진 것 같고, 남들은 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은 책임감과 부담만 늘어나고, 미래는 착잡하고, 그 감정조차 어느 순간 식어져 공허함만 남는다.”

이 글을 읽는데… 참 많이 공감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기쁨은 짧고, 피로는 길어지고, 웃음은 얇아지고, 공허함은 두터워졌습니다. 이 감정은 단순한 기분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사람들 속에 있어도 혼자인 느낌이에요.”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막상 해보면 금방 지쳐요.”

“믿음도 지키려고 하는데… 요즘은 그냥 ‘오늘도 버티자’ 이 마음이에요.” 이게 바로 오늘 시대의 영적 공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과 ‘ 한 번만 만나 봤으면 하는 모든 사람’의 삶에는 이런 허무함과 공험하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한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잔인한 장난은, 사람이 평생 바라던 걸 얻은 바로 그날…오히려 절망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그 자리에도, 우리가 꿈꾸는 그 집 안에도, 우리가 올려다 보는 그 성공의 정점에도, 어떤 위치에 있든 마음의 전쟁은 똑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감정을 아주 오래전에 이미 설명했습니다. 전도서는 이 감정을 헛됨, 헤벨(hebel)이라 부릅니다. 헛됨, 헤벨(hebel)이라는 단어는 “수증기, 안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증기를 손에 꽉 쥐어 보십시오. 어떻게 되나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갑니다. 좋은 것들도 그렇습니다.

최근에 받았던 월급도, 최근의 여행도, 최근의 감정도, 최근의 만남도… 다 수증기처럼 손 사이로 빠져 나갑니다. 안개처럼 잡히지 않고,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붙잡을수록 손에서 빠져나가는 마음, 이 마음을 모두가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조용한 허무, 조용한 공허의 감정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이 허무함과 공허함은 단순히 마음의 컨디션 문제가 아닙니다. 조금 더 쉬면, 조금 더 정리하면, 조금 더 위로 받으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음의 비어 있음이라는 문제를 훨씬 더 깊이 다룹니다.

오늘 본문은 이 지점을 아주 정확하게 드러냅니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의 공허함을 심리적인 문제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삶이 안 풀려서 허무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과의 중심축이 흔들릴 때 생기는 영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죠. 오늘본문은 이 부분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찌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6절입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성전재건에 열심을 냈지만, 시간이 지나가면서, 상황적으로 여러가지 장애물이 있자, 그들은 성전재건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삶을 재건하기를 힘썼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집도 짓고, 밭도 일구고, 일상도 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족이 없었습니다. 수고는 많은데, 얻는 건 없었습니다. 겉모습은 멀쩡했는데 마음은 비어 있었습니다.

일은 하는데 성취감이 없고, 돈은 벌리는데 만족이 없고 사람은 많은데 외로움은 깊고, 휴식을 가져도 마음은 더 피곤하고 여행을 다녀와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허무하고 뭐든 해보지만 오래가는 기쁨은 없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삶은 돌아가는데 마음은 돌아오지 않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무엇인가 계속 부어넣고 있는데 우리 마음이라는 그릇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하나 뚫려 있는 것처 자꾸 새어나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원인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전환문장

이제 우리는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왜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비어 있는가?” 성경은 학개서를 통해서 이 허무함의 깊은 뿌리를 진단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주해하면서 왜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비어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은 비어있는 우리의 삶을 흔드시는지,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중심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을 따라가면서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왜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허무하고, 공허하며,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성경은 우리가 느끼는 이 허무함을 막연한 감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감정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하나님은 지금 단순히 “너희 잘못을 찾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 목록을 적어보라는 것도 아닙니다. 감정 조절을 더 잘하라는 조언도 아닙니다. 허무함의 원인을 찾으려면, 먼저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위를 살핀다”는 것은 내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나의 시간과 에너지가 어디에 쏠려 있는지, 무엇을 먼저 챙기고 무엇을 뒤로 미루고 있는지를 보라는 뜻입니다.

즉 허무함은 이유 없이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 어긋났을 때 영혼이 보내는 ‘경고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허무함이 찾아오면 보통 감정부터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잠깐 웃을 영상 하나 보며 잊어보려 하고, 쇼핑이나 여행으로 마음을 환기시키려 하고, 일정표를 더 채워 바쁘게 움직임으로써 생각을 잠재우려 하고, 감정을 환경 탓으로 돌리고, 좀 더 쉬면 나아지겠지 하고 스스로를 달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감정을 다루지 않으시고 “너의 삶의 구조를 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허무함의 뿌리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우선순위가 무너진 데 있기 때문입니다. 9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허무해 지느냐, 왜 만족이 없느냐, 큰 수확을 얻었지만, 왜 그만큼 기쁘지 않느냐? 그 이유는 각 사람이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해 달려갔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집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방점은 집에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의 삶을, 자기의 미래를, 자기의 안정을 더 절박하게 붙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영적인 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내 미래가 더 중요해.” “일단 삶부터 안정시켜야지. 신앙은 그다음이야.” “기도보다 불안이 더 시급해, 부르심보다 생계, 안정이 먼저야.”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린 게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나중’으로 미룬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미룬 그 순간부터 영혼은 서서히 비어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단은 너무나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행위를 살펴라” 당신이 무엇을 중심에 두고 달려가고 있는지 정직하게 점검해 보라는 것입니다. 허무함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 앞에서 하나님을 ‘미룬 삶’이 드러내는 영적 징후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보다 자기 집을 먼저 짓는 일에 그렇게도 빨리갈까요? 왜 하나님은 ‘나중’으로 미뤄지고, 왜 내 미래·내 안전·내 인정이 더 시급하게 느껴 질까요?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의 방향으로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중심에, 하나님이 아닌, 자아라는 우상이 자리 잡기 시작할 때 우리의 발걸음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자기의 집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갑니다.

왜 하나님은 ‘나중’으로 미뤄질까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집으로 맹렬히 달려갔다’는 표현으로 그들의 우상을 드러내셨습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인생의 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을 것 같은 허상을 쫓아 달려가게 합니다. 우리를 달려가게 하는 우상을 판별하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하루종일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얻지 못할 때 내가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해서는 지나치게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을 정직하게 적용해 보면, 오늘 우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가 선명해집니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붙듭니다. “내 인생은 내가 생각한 대로 되어야 해” 그래서 하나님보다 내 계획이 더 급해져 달려갑니다. 그런데, 달려가면 갈수록 불확실성을 만나는데, 불확실성을 만나면 만날 수록 걱정과 허망한 마음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제의 우상으로 이야기할 수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방식으로 이스마엘을 만든 이유도 이것입니다.

또한, 이렇게도 생각합니다. “저 사람만 나에게 있으면 인생은 의미가 있어” 그래서 야곱은 라헬만 얻으면 인생이 해결된다고 믿으며 14년을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야곱을 구원하지 못했고, 그의 삶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이 우상은 예배보다 ‘평판’을 더 크게 만들어 달려가게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는 느낌을 과민하게 받기에, 항상 질투의 감정과 경쟁심에 노출되어 그 끝은 허망과 공허함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사울왕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인정의 우상 때문에 평생 다윗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어떤 사람은“힘들면 안 돼. 부담되면 안 돼.”라는 생각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영적 결단이 미뤄지고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못합니다. 언제나 스트레스에 취약하다고 생각하다가, 지루해지고, 권태감을 통해 허무함과 공허함을 느낍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떠나 세상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이유는 편안함, 재물의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정도는 되어야 가치 있지.”이런 생각에도 달려갑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보다, 일단 능력과 영향력이 있어야 인생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성경보다 성공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래서 조금만 무시당해도 분노가 폭발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며 사람과의 관계가 이용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허무함과 공허한 마음을 향해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중 이렇게 권력과 성공의 우상에 달려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좌우에 앉아 권력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습은 다르지만 결론은 하나입니다. 우상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집이 아닌 자기 집을 세우기 위해서 ‘달려가게’ 만듭니다.

이런 우상의 마음은 단지 자연스러운 욕구가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크게 의지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탐심’으로 이야기합니다. 탐심은 우리의 마음을 끌고, 달려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종으로 만들며 마음을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허무함과 공허함은 우상이 만든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스스로 중심이 되려 하는 마음은 언제나 ‘찢어진 전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개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허무함의 더 깊은 차원을 보여줍니다. 허무함이 단순히 우상의 결과일 뿐 아니라, 그 허무함의 순간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9절을 보면 하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말은 허무함이 단순히 우상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허무함이라는 경험의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비어 있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흔드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핵심은 ‘내가 불어 버렸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으로 달려간 결과인 허무함과 공허함을 이용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상을 섬기도록 섭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성은 우상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허무함과 공허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 허무함과 공허한 감정을 느끼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만족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게 하는 방식, 갈급하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이용하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우상의 결과로 느끼는 감정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얻고도 만족하지 못한 마음을 우리 하나님은 사용하셨고,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불이 임하는 극적인 승리를 경험했음에도, 아합과 이세벨은 변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무너진 그 자리,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그 허무한 감정의 틈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엘리야를 광야로, 그리고 호렙산으로 이끄셨습니다.

엘리야가 초라한 자신을 직면하며 흔들릴 때, 하나님은 그 깊은 허망의 자리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시 말씀하시고 일으키셨습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가 밤새 물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질을 해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노동의 무가치성을 느끼는 허무한 마음이 들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른 아침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허무함을 이용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허무함은 심리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흔드시는 신호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하나님 없는 집으로 끝없이 달리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상의 결과인 허무한 감정을 도구로 삼아 우리를 멈추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붙잡고 있는 우상의 기능을 꺼버리십니다.

관계에 기대어 살면 그 관계가 더 이상 만족을 주지 않는 결과를 경험하게 하시므로 우상으로 달려가는 마음을 멈추게 하십니다. 성공에 올인하면 어느 순간 그 성공이 더는 우리의 공허를 메우지 못하고 돈에 집착하면 돈이 마음을 지켜주지 못하고 사람들의 인정에 목매면 인정이 늘 부족하게 느껴지는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이 불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은 우상의 결과인 허무함과 공허한 마음을  이용하셔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공허와 흔들림은 우상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망해가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허무함과 공허함은 우상의 결과이긴 하지만 정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것을 지혜로 사용하셔서  우리를 돌아오게 하는 부르심으로 삼으셨습니다. 허무함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고, 다시 하나님만이 우리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허무함은 파멸의 징조가 아니라 은혜의 길목에 세워진 표지판입니다.

결 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흔들림 속에서 다시 중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학개서는 그 답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주님은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입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하나님은 다시 성전을 건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으로 기쁨이 회복 될 것이라는 메세지입니다.

왜 주님은 성전을 다시 세우라고 하셨을까요? 성전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며, 예배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예배가 무너졌다는 뜻이고, 예배가 무너졌다는 것은 마음 중심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무너졌기에 우상이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세우라’는 명령으로 우리의 예배,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놓으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을 섬기던 방향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향으로 다시 돌아서는 것, 이것이 성전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언제나 이런 생각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지금은 너무 지쳐서 예배 드릴 힘이 없어…” “조금 내 마음이 안정되고 난 다음에 예배드려야지…”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친 영혼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예배가 아니라 ‘휴식’이라고 속이는 것, 이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곳이 아니라 무너진 영혼이 다시 충전하여 마음을 회복되는 자리입니다.

가장 지친 순간에 예배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리가 “힘을 빼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또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생각을 뿌립니다. “너 준비 안 됐어.” “이런 상태에서 예배 가면 안 돼.” “조금 더 나아지면, 그때 말씀 보자. 그 때 예배하자”라는 생각을 뿌립니다. 하지만 진실은 반대입니다. 몸이 아플 때 “조금 더 건강해지면 병원 가자”라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혼이 흔들릴 때일수록 가장 먼저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는  예배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무로 주신 게 아니라 우리를 살리기 위해 생명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여기서 마지막 공격을 합니다. “돌아가려면 더 준비돼야 해. 더 거룩해야 해. 더 힘을 들여야 해.” 이 말들이 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영적 삶을 ‘과제’로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감을 ‘목표치 달성’처럼 오해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은“힘을 더 내서 오라”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짐을 지고 그대로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허무한 마음, 만족하지 않은 마음, 공허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허무한 마음, 공허한 마음, 만족이 없는 마음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성전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예배하러 나아가야 합니다. 허무한 마음 그대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 그대로, 공허한 마음 그대로 그것을 숨기거나 정리한 뒤가 아니라 그 마음을 가지고 그대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배하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은 감정이 회복되고 여유가 생기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상황이 안정되면 도전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예배를 우선하라.” “다시 말씀 앞에 앉아라.” “다시 기도의 자리를 회복하라.” “다시 삶의 첫 이유를 하나님께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그 어떤 것을 조건으로 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잘하면, 준비되면, 변하면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재건하기 전에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사자 학개가 여호와의 위임을 받아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하니라” 예배를 드리면 기쁨이 회복되는 이유는 예배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분의 몸이 찢기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고, 지금 우리는 성령 안에서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허무한 마음을 들고도 예배 자리에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루지 말고, 지금, 그 마음 그대로 주님께 달려 나가십시오. 완벽해진 마음이 아니라, 허무한 마음, 지친 마음, 공허한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허무와 공허가 주님을 예배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소망과 기쁨으로 바뀌게 될 줄 믿습니다.

이 은혜를 붙들고, 다시 하나님께 달려 나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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