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우리는 살아가면서 시작만큼이나 끝을 궁금해 합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될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너무 답답하면 결말부터 찾아보기도 합니다. 결말을 알면 중간의 긴장감을 조금 덜 견뎌도 되기 때문입니다. 시작에는 기대가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낯선 환경에 들어서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가능성을 바라봅니다.
반대로 끝에는 해석이 있습니다. 한 과정이 마무리되고 결과가 드러나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 필요했구나.”, “그때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구나.” 끝에 도착하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일들이 어느 정도 설명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시작도 끝도 아닌 중간에서 살아갑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은 합격 소식을 받은 날보다 아무 연락 없이 준비하고 기다리는 날들을 훨씬 오래 살아갑니다. 직장인은 첫 출근이나 승진의 날보다 눈에 띄는 변화 없이 맡은 일을 반복하는 평범한 날들을 훨씬 많이 살아갑니다.
관계도 그렇습니다. 처음 가까워졌을 때의 설렘과 분명한 결론 사이에서 이 관계를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깁니다. 결혼한 사람도 결혼식 하루보다 서로의 다름을 발견하고, 부딪히고, 이해하고, 다시 대화하며 살아가는 시간이 훨씬 깁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날만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모든 죄와 연약함에서 벗어나 주님 앞에 서는 마지막 날을 지금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이를 살아갑니다.
말씀을 읽었는데도 마음이 금방 달라지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기도했는데 상황은 어제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날도 있습니다. 옳다고 믿어서 순종했는데 생각했던 열매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믿으면서도 불안하고, 하나님께 맡겼다고 기도해 놓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납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은 대부분 이 중간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간의 삶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작할 때의 설렘은 이미 지나가고, 끝에서 얻게 될 결과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하는 수고가 어디로 이어질지,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오늘의 선택이 나중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알기 어렵습니다. 끝에 도착하면 지나온 시간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서는 아직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질문이 생깁니다. “계속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을까?”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박국도 바로 그런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하박국은 자신이 살아가던 유다 사회에 가득한 폭력과 불의를 보았습니다. 힘 있는 사람은 약한 사람을 억압했고, 법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악을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하박국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하박국이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악을 심판하기 위해 바벨론을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유다도 악했지만 바벨론은 훨씬 더 잔인하고 폭력적인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더 악한 나라를 사용하여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하나님의 침묵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면 답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질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대답은 하박국의 질문을 없애기보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박국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더 질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은 믿는데, 그 의로우심이 지금 눈앞의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었는데 현실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은 믿는데 그 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박국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눈앞의 현실 사이의 중간에 서 있었습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눈앞의 현실 중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하박국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상황과 감정이 제멋대로 우리의 삶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결말은 약속하시지만 그 시간표는 보여 주지 않으실 때,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본문을 따라가며,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고 붙드는 하박국의 모습을 통해 시작과 끝사이의 중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눈앞의 현실이 어긋나 보이는 이 중간에서 하박국은 어떻게 했을까요?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을 쏟아 놓은 뒤, 이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기다립니다. 1절입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박국은 자신을 성루에 선 파수꾼처럼 묘사합니다. 파수꾼은 원래 적군이 오는지 살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어야 했고, 전령이 올 때를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하박국도 바로 그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박국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하박국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현실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기다렸습니다. 유다의 불의도 충분히 보았습니다. 바벨론의 잔인함도 보았습니다. 자신의 답답함과 분노도 하나님께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알았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현실만 계속 바라본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까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말하는 자리에서 듣는 자리로 옮겨 갑니다. 자기 생각이 맞다는 것을 하나님께 확인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자신의 생각도 다시 살펴보겠다는 것입니다. 왜 바벨론을 유다를 치는 도구로 삼으셨는지, 하나님의 대답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박국이 성루에 선 이유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실을 똑바로 보면서도, 내 눈에 보이는 현실만으로 하나님까지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 있고, 내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이 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아직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성루에 섭니다.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현실을 없던 일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현실에 내가 붙여 놓은 해석이 정말 옳은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과 현실에 붙인 해석을 자주 혼동합니다. 예를들어 친구에게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 그것은 해석입니다. 이번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할 사람이야.”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내가 붙인 결론입니다. 자녀가 지금 흔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야.” 그것은 아직 내려서는 안 되는 결론입니다.
우리의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하다면 실제로 불안한 것입니다. 슬프다면 실제로 슬픈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다면 그 아픔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감정을 없는 것처럼 취급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박국 역시 분노했고, 혼란스러웠으며, 하나님의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감정이 진실하다고 해서 감정이 내린 해석까지 언제나 진실한 것은 아닙니다. 감정은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신호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현실 전체를 판결하는 최종 재판관은 아닙니다. 불안하다고 반드시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두렵다고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도 아닙니다.
답답하다고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하박국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는 않았지만, 그 감정이 하나님에 대한 최종 판결을 내리도록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파수대에 섰습니다. 자신의 질문만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중간’을 살아갈 때 필요한 마음입니다. 중간에서는 아직 결론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이 어디로 이어질지, 오늘의 눈물이 나중에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지금의 실패가 정말 실패로 끝날지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그래서, 이 처음과 끝사이의 중간에 사는 우리들은 모든 답을 빨리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아니라, 아직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는 채로 하나님 앞에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말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오늘 내가 해야 할 일까지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중간을 잘 살아가려면 한 가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내가 순종해야 할 것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실하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까지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말하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까지 내가 바꿀 수는 없습니다.
나는 자녀를 사랑하고 가르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인생 전체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설계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실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불안은 때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까지 내가 책임지려고 할 때 더 커집니다. 믿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일에는 충실하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중간을 산다는 것은 손을 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붙들어야 할 것과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을 구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경계를 견디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자꾸 내가 더 움직이려고 합니다. 조금 더 말하면 사람이 달라질 것 같고, 조금 더 밀어붙이면 일이 빨리 풀릴 것 같고, 조금 더 애쓰면 결과가 오는 시간을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조급함입니다. 조급함은 하나님께 맡겼던 결과를 다시 내 손으로 가져오게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더 길어지면 반대편에서 또 다른 마음이 찾아옵니다. “이제 그만하자.”, “아무리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괜히 기대했다가 또 실망하지 말자.” 이것이 포기입니다. 조급함은 하나님보다 먼저 가려고 하고, 포기는 하나님보다 먼저 이야기를 끝내려고 합니다.
하나는 너무 빨리 움직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빨리 멈춥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조급함과 포기 사이에서 하나님보다 앞서가지도 않고, 하나님보다 먼저 끝내지도 않는 믿음의 씨름입니다.
그런데 중간을 살아갈 때, 우리를 흔드는 것은 현실에 대한 해석만이 아닙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생각보다 오래 계속되면 마음속에서 질문이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다가,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 왜 아직도 그대로입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문제의 내용보다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이 없으면, 기도의 내용보다 기도시간이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새로운 길을 놓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문이 오래 열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벌써 뭔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에는 각자 보이지 않는 시간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나이쯤이면 이 정도는 되어 있어야 하고,” “이만큼 노력했으면 이제는 결과가 나와야 하고,” “이 정도 기도했으면 하나님도 뭔가 보여 주셔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는 단순히, “오래 걸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잘못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말씀하십니다. 2절과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저는 이 말씀에서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그런데 바로 뒤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디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지체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늦어 보이는데 하나님께서는 늦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앞에 있는 한마디 때문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더디게 느껴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 답답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늦으셨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하박국의 눈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너무 늦어 보였습니다.
유다의 악은 계속되고 있었고, 바벨론의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한 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모든 날짜를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내가 말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를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간을 살아가는 두 번째 믿음은 내가 세운 시간표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쯤이면 되었어야 하는데.” 그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때가 지나갔다고 해서, 하나님의 때까지 지나간 것은 아닙니다. 내 계획보다 늦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늦어진 것도 아닙니다.
중간에서는 이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아직’이라는 말과 ‘틀렸다’는 말은 다릅니다. 아직 열리지 않았다고 길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죄나 습관을 놓고 기도했는데도 다시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왜 아직도 이 모양이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그냥 두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힘들어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었는데도 다음 날 다시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해도 달라지는 게 있나?” 싶습니다. 아직 마음이 불안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그냥 두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나님께서 손을 놓으신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한 날짜가 지나갔다고 하나님을 재촉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 사이의 중간의 삶은 내 시간표를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시간이 아니라, 내 시간을 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서 다시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빨리 해 주십시오”라고 정직하게 구하십시오. 성경은 그런 기도를 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원하는 때와 주님의 때가 다를 때 주님이 늦으셨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직 이해되지 않는 이 시간을 버려진 시간이라고 판결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결과가 오기 전에 오늘을 포기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중간을 살아가는 두 번째 믿음입니다.
결 론
그렇다면 그 ‘정한 때’가 올 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계속 미래만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아주 짧고도 결정적인 한 문장으로 대답하십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4절입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마지막 단어가 중요합니다. “살리라.”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의인은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인은 미래를 미리 알게 될 것이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인은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라는 것입니다.
아직 결말이 오지 않은 오늘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중간에 들어가면 자꾸 미래로 마음이 달려갑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언제쯤 끝날까?”, “결국 잘될까?”
그런데 미래를 계속 생각한다고 미래가 더 분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 때문에 오늘까지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취업이 언제 될지를 걱정하느라 오늘 해야 할 준비를 놓칩니다.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될지를 걱정하느라 오늘 해야 할 진실한 대화를 하지 못합니다.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늘 그 아이에게 필요한 사랑과 격려를 놓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응답하실지만 바라보다가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작은 순종을 놓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미래의 모든 장면을 보여 주시는 대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살아라.” 믿음은 미래를 미리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미래를 알지 못해도 오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입니다.
결과를 확인한 뒤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생각보다 굉장히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일이 불확실해도 오늘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금방 달라지지 않아도 오늘 내가 해야 할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보이지 않아도 오늘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번 말씀을 읽는다고 내 문제가 곧바로 해결되지 않아도 오늘 다시 말씀 앞에 앉는 것입니다.
넘어졌다면 또 회개하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어렵지만 복음을 기억하며 다시 용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믿음은 거대한 순간보다 이런 평범한 하루에서 더 많이 드러납니다. 믿음은 먼 미래에 대한 거대한 확신보다 오늘 하나님께 드리는 작은 순종의 모습으로 더 자주 나타납니다.
믿음은 자기 한계를 압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지만 내가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나는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을 내가 열 수는 없습니다.
나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셔야 하는지를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무책임한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분명하게 책임을 구분하는 삶입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내가 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가 중간에서 그렇게 힘든 이유는 고통 자체 때문만은 아닐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결과를 알고 싶고, 시간을 정하고 싶고, 사람을 바꾸고 싶고, 내 인생이 내가 계획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중간은 계속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너는 하나님이 아니다.”그래서 중간은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자리에서 믿음이 자랍니다. “하나님, 저는 모릅니다.”, “하나님, 저는 이 결과를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문장을 더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는 마지막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나는 오늘 한 걸음밖에 걷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이 길의 시작과 끝을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너무 빨리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기도했는데도 상황이 그대로이고, 사람은 달라지지 않고, 내가 기대했던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한 장면만 가지고 “이제는 끝났다”, “아무 소용이 없다”고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하박국이 파수대에 섰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내 생각을 더 밀어붙이기보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를 묻고, 내가 붙인 해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크게 들어야 합니다. 또 내가 생각했던 때보다 늦어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늦으셨다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정한 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길게 느껴지는 시간도 하나님의 손 밖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오늘 하십시오. 준비해야 한다면 준비하고, 사랑해야 한다면 사랑하고, 사과해야 한다면 사과하고, 기도해야 한다면 다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만들 수 없는 결과와 내가 정할 수 없는 때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내일을 다 감당할 힘까지 오늘 미리 가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을 살아갈 은혜를 오늘 주십니다. 흔들리면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고, 조급해지면 다시 맡기고, 포기하고 싶어지면 다시 말씀 앞에 서면 됩니다. 우리가 끝까지 가는 것은 모든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길을 아시고, 정한 때까지 우리를 붙드시며, 오늘도 필요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끝나지 않은 중간에서 하나님보다 앞서가지도 말고, 하나님보다 먼저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오늘 주시는 은혜로 오늘의 한 걸음을 살아가십시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