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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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에게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시편 23편 1절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시편 23장펼치기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개역개정

서 론

오늘부터 시편 23편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편 23편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익숙하다는 것이 꼭 깊이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익숙해서 쉽게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주 동안 이 말씀을 한 절씩 천천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시편 23편이 시작되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시를 쓴 다윗은 어린 시절 실제로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 목자의 돌봄을 받는 “양”으로 바라봅니다.

전환문장

저는 오늘 목자와 양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왜 다윗은 자신을 양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목자로 여겼는지, 그리고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는 무엇인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다윗은 자신을 양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양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다윗은 양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양의 모습과 자신의 삶이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서에 기록된 다윗의 삶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세 가지 점에서 양의 특성과 다윗의 모습이 연결됩니다.

먼저 양의 첫 번째 특징은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양은 끊임없이 보호가 필요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연약하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에게 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근력도 있습니다. 어떤 양에게는 뿔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힘만으로 자신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양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자기보다 훨씬 강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사자도 있습니다. 곰도 있습니다. 여러 들짐승도 있습니다. 양이 아무리 애를 써도 사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용기를 낸다고 곰과 대등하게 싸울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양의 연약함은 단순히 힘이 조금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와 상황 앞에 반복해서 놓인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다윗의 인생과 참 많이 닮아 있습니다. 다윗의 삶에는 계속해서 자기보다 큰 현실이 나타났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골리앗이 있었습니다. 골리앗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괜찮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이번에는 사울이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왕이었습니다. 권력과 군대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계속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기보다 강한 현실은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다윗은 왕궁을 떠나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의 삶에는 계속해서 자기보다 강한 현실이 있었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골리앗이 있었고, 그 이후에는 사울이 있었고, 왕이 된 뒤에는 압살롬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무능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용감했고, 전쟁에도 능했습니다. 사람을 이끌 줄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힘을 가진 다윗에게도 자기가 가진 힘보다 더 큰 현실은 계속 찾아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다음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학생 때는 취업을 준비합니다. 취업하고 나면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자리를 잡으면 결혼과 가정을 생각합니다. 가정을 이루면 집과 자녀를 걱정합니다. 조금 안정되었다 싶으면, 부모님의 건강과 노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 문제를 넘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다음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벽을 넘으면, 조금 더 높은 벽이 나타납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좀 괜찮아지겠지.”, “여기까지만 가면 조금 편해지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버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막상 거기에 도착하면, 또 지켜야 할 것이 생깁니다.

어릴 때는 누군가가 나를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 내가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가정을 지켜야 합니다. 일터에서 맡겨진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관계를 지켜야 합니다. 때로는 흔들리는 내 마음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알게 됩니다.

나는 많은 것을 책임지고 있지만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지켜야 하지만, 우리 역시 보호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보호가 필요 없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보호가 필요한 티를 내지 않는 법을 배워 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합니다. 계속 결정합니다. 계속 책임집니다. 계속 다음 벽을 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내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계속 더 강한 사람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도, 나를 붙들어 줄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왕이 된 뒤에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지켜야 하는 왕이었지만, 자기 자신을 끝까지 지켜 줄 목자가 필요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지나오면서 이 사실을 누구보다 깊이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 40편 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내게 능력이 있다는 것과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편 39편에서는 더 놀라운 기도를 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우리는 대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강하게 해 주십시오.” “이 문제를 이길 힘을 주십시오.”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다윗은 조금 다르게 기도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확인시켜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제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알게 해 주십시오.”이렇게 기도합니다.

왜 이런 기도를 했을까요? 자신의 연약함을 모르면, 목자의 필요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순간이 있습니다.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판단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 목자는 필요 없어집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유는 아직 내가 나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에게도 필요한 것은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것은 아름다운 비유가 아니라, 자기 인생을 돌아본 다윗의 결론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양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양은 앞서가는 다른 양을 잘 따라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양은 기본적으로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동물입니다. 혼자 떨어져 있기보다 다른 양들과 함께 있으려고 합니다. 무리가 움직이면 함께 움직이고, 앞의 양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움직임을 따라가는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실제로 양의 행동을 연구한 자료들을 보면, 양은 무리 안에서 서로의 행동을 맞추고, 다른 양의 행동을 모방한다고 합니다. 또 한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앞의 양을 따라 움직이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목축 현장에서도 이러한 특성을 이용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양을 따라가는 것은, 양의 약점이면서 동시에 생존 방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생깁니다. 앞의 양을 따라간다는 것과 올바른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앞의 양이 좋은 길로 가면 함께 좋은 길로 갑니다. 그러나 앞의 양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뒤에 있는 양들도 그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양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움직일 수 있느냐’가 아닙니다.

‘누구를 따라 움직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우리와 닮았습니다. 가만히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다른 사람을 보면서 결정합니다. 어떤 옷이 예쁜지, 어떤 차가 좋은지, 어느 동네에 살아야 성공한 것인지, 몇 살쯤 결혼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돈을 벌어야 괜찮게 사는 것인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좋은 부모인지, 심지어 어느 정도의 삶을 살아야 내 인생이 뒤처지지 않은 것인지까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기준을 만들어 갑니다.

특히, 무엇이 옳은지 확신이 없을 때는 다른 사람의 판단을 따라가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선택이 맞는지 모르니까,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보는 것입니다. 이 길이 맞는지 모르니까, 몇 명이나 이 길로 가고 있는지를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은 식당 앞에 줄이 서 있으면 왠지 맛있을 것 같고, 많은 사람이 투자하면, 왠지 좋은 투자일 것 같고,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집을 사기 시작하면,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고, 친구들이 결혼하기 시작하면, 어제까지 괜찮았던 내 삶이 갑자기 늦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그 방향이 옳은 것 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길을 모르는 순간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한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그 길에 대하여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위험합니다.

다윗도 중요한 순간마다 이 문제 앞에 섰습니다. 다윗에게도 혼자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곁에는 늘 함께 싸워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다윗보다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런 장면이 사무엘상 24장에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엔게디 광야로 도망하고 있을 때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삼천 명의 군사를 데리고 그를 추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울이 볼일을 보기 위해 하필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숨어 있던 동굴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계속 도망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울만 없어지면 모든 문제가 끝납니다. 게다가 사울이 스스로 다윗이 숨어 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 4절입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의 참모들 모두가 지금 이 순간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그 순간 다윗에게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금 사울을 제거하면 오랜 도망 생활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멈춥니다. 다윗은 모두가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하나님의 방향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상황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보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더 중요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잘못된 왕이라는 것’과 ‘내가 사울을 죽여도 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그동안 하셨던 말씀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멈췄습니다. 사울을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는 일은 다윗이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벱니다. 그런데 그것조차 마음에 찔립니다. 그만큼,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려는 다윗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점점 인생을 살아가면서 목자의 음성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기록한 시편을 읽어 보면 놀랍도록 자주 ‘길’ 을 묻습니다. 시편 25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시편 27편에서도 똑같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다윗의 시편을 읽다 보면 다윗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인도를 구하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자꾸 목자보다 다른 양들에게 갑니다. “저 사람은 어디까지 갔지?” “저 사람은 무엇을 가졌지?”, “저 사람은 얼마나 잘되고 있지?” 계속 다른 양을 보다 보니까 목자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교가 시작됩니다. 없던 결핍이 생깁니다. 조급해집니다.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속도보다 다른 사람이 앞서가는 속도가 더 중요해집니다. 양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천천히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대상을 따라 빨리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갔다고 해서 내가 늦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길과 나에게 주어진 길은 다를 수 있습니다. 신앙은 남보다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걸음에 내 속도를 맞추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보다 길을 잘 아시는 목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생의 여정속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양의 특징이 있다면, 양은 자기 방식대로 가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어쩌면 이 특징이 인간과 가장 많이 닮았습니다. 필립 켈러가 쓴 『양과 목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켈러는 실제로 양을 기르고 목장을 관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양을 돌보며 경험한 이야기로 시편 23편을 설명합니다.

그 책에 보면, 아주 골치 아픈 암양 한 마리를 소개합니다. 목장 안에는 좋은 풀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은 계속 울타리를 따라다녔습니다. 틈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틈을 발견하면 밖으로 빠져나갔습니다. 밖에 더 좋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안에도 좋은 풀이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새끼들과 다른 양들까지 그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참 흥미롭습니다. 양은 연약합니다. 혼자서는 자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다른 양을 따라가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기가 가고 싶은 길에 대해서는 고집이 있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와 참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6절은 인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각기 제 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단순히 길을 잃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 길로 갔다고 말합니다. 길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문제는 단순히 판단력이 부족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 싫어서 다른 길을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대표적인 장면이 사무엘하 11장의 밧세바 사건입니다. 다윗이 왕궁 옥상에서 한 여인을 봅니다.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봅니다.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여기까지 들었으면 길은 분명합니다. 다윗은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아내입니다. 멈추어야 합니다. 마음은 그것을 알았습니다.0 그런데 다윗은 멈추지 않습니다. 다시 사람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데려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길을 몰라서입니까? 아닙니다.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기 길, 곧 죄를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의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지금 해결하고 싶습니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붙들고 싶습니다.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만큼은 예외로 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각기 제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각기 제 길’로 섬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은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다스림은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응답은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수정받는 것은 싫습니다. 보호는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결정권까지 넘겨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면서도 길은 내가 정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저는 이 말씀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이 목자에게서 멀어졌을 때, 목자가 다윗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단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우리아를 죽이고, 한 가정을 망친 그 사람이라” 다윗의 입장에서는 정말 숨기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을 보내셔서 다윗에게 아픈 말씀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말은 다윗을 무너뜨리기 위한 말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길로 빠져나간 양을 다시 목자의 길로 돌려놓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가 있습니다. 말씀으로 불편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양심을 찌르실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통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그것을 방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좋은 목자는 양이 원하는 길을 모두 허락하는 목자가 아닙니다. 양이 죽는 길로 갈 때, 그 길을 막아서는 목자인 것입니다.

결 론

이렇게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이 강하지도, 늘 옳지도, 언제나 순종했던 사람도 아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부족함만 본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를 더 보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수록 자신을 끝까지 지키신 목자이신 하나님을 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목자이신 하나님이 얼마나 충분한 분인지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는 이 사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왜 나는 아직 이 자리에 있는지, 왜 다른 사람에게 열린 문이 내게는 열리지 않는지, 왜 내가 원하는 시간보다 하나님의 시간이 이렇게 늦은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부족함’이라고 부릅니다. 돈도, 기회도, 시간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뒤를 돌아보면, 이상한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보호였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열렸다면, 오히려 더 깊이 다쳤을 문이 있습니다.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놓치고 나서야 그것이 나를 얼마나 붙잡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 것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길이 막혔는데, 나중에 보니 그 막힘 때문에 다른 길을 만나게 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잘못된 길로 너무 멀리 가고 있을 때, 듣기 싫었던 말씀 한마디가 나를 다시 살린 적도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모릅니다.늦는 것 같고, 잃어버린 것 같고,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그 길 곳곳에 목자이신 하나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열어 주신 문에도 계셨고, 닫힌 문 앞에도 계셨습니다. 내가 잘 따라갔을 때에도 계셨고, 내 욕심 때문에 길을 잃었을 때에도 계셨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여정속에 반복적으로 이런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고 성경을 계속 읽어 가다 보면 이 목자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세밀하게 사랑하시는지도 알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너무  큰 말이라서, 오히려 우리에게는 조금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하나님이 정말 나 한 사람까지 그렇게 깊이 알고 계실까?” “모두를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정말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일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할 만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동시에 깊이 사랑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쓰는 사람이 몇 명만 늘어나도, 금방 여유가 없어집니다. 한 사람의 아픔을 깊이 품다 보면, 다른 사람의 형편까지 세밀하게 살피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의 사랑처럼 생각합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이 많아지면 한 사람에게 향하는 사랑은 조금씩 얇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3절에서 목자가 자기 양을 어떻게 대하는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모든 성도의 이름을 각각 이름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얼굴 없는 군중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 대충 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름을 아시는 한 사람입니다. 내가 어디에서 지쳤는지 아십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는지 아십니다. 사람들에게는 괜찮아 보이지만, 혼자 있을 때 어떤 생각으로 무너지는지도 아십니다.

내가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 마음까지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아시기 때문에, 나를 대충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두를 아시면서도, 나를 한 사람으로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수님께서 들려주신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백 마리의 양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습니다. 한 마리입니다. 숫자로 보면 백 마리 중 하나입니다. 우리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흔아홉 마리가 남았잖아.” 그러나 목자는 그렇게 계산하지 않습니다.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자에게 그 한 마리는 손실률 1퍼센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찾아야 할 한 마리입니다. 사랑하는 한 마리입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동시에, 없어졌을 때 찾아 나서시는 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는 목자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우리를 놓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찾으러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한 마리를 찾아오는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목자는 보통 양을 지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키는 정도에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 길의 끝이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그런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목자를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의 댓가까지 자기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개인적인 선언입니다.

“아무개야!! 너는 내가 잃어도 괜찮은 한 사람이 아니다. 너를 위해 나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을만큼 너는 나의 양이란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현재의 상황만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문이 닫혔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까지 닫힌 것은 아닙니다. 기다림이 길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도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직 없다고 해서, 내 인생 전체가 부족한 인생도 아닙니다. 지금의 형편만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보면 하나님의 마음은 분명합니다. 나를 위해 생명까지 내어 주신 목자가 지금 내 인생을 무관심하게 바라보고 계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두 가지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지금 내게 없는 것 하나 때문에 내 인생 전체를 부족한 인생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취업이 늦어지고 있습니까? 결혼이 생각했던 것보다 늦어지고 있습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습니까? 건강의 문제가 있습니까? 자녀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까?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힘든 것은 힘든 것입니다. 신앙이 있다고 없는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채워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도와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함을 가지고 내 삶 전체와 하나님의 사랑까지 판단하지는 마십시오.

내게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지금 내가 목자보다 앞서가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보십시오. 이미 내가 길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허락만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서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계속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앞으로도 부족함을 느낄 것입니다. 길을 모를 때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질 것입니다. 심지어 제 길로 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이름을 각각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없어진 것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길을 잃으면 찾아오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까지 내어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다윗과 함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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