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요한복음 2장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결핍을 채우시는 예수님, 부족함을 메워주시는 예수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 혼인 잔치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은 따뜻합니다.
그런데 같은 장 안에, 전혀 다른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조금 전까지 포도주를 채워 주시던 그분이, 성전 앞에서는 채찍을 드셨습니다. 사람들의 판을 엎으셨습니다. 결혼식에서는 잔치를 계속되게 하셨지만, 성전에서는 모든 시스템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결혼식에서는 마리아의 요청을 듣고 개입하셨지만, 성전에서는 스스로 개입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그 결핍의 장소에서는 예수님이 채우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채우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식 잔칫집에서는 은혜를 베푸시고, 성전에서는 분노하셨습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성전에서 분노하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채찍을 드셨을까요? 그리고, 요한은 왜 이 이야기를 가나의 혼인잔치와 함께 배치했을까요? 저는 여러분을 성전에 서 계신 예수님께로 안내하면서 예수님의 분노가 무엇을 드러내는지, 그리고 그 분노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떠한 메세지를 주는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 론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왜 성전에서 분노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유월절이 가까운 날에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순한 명절이 아닙니다.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구원하신 날, 출애굽을 기억하는 날이었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지면, 이스라엘 전역은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습니다. 출애굽을 기억하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멀리 갈릴리에서, 요단 건너편에서, 심지어 해외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까지도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성전에 올라왔습니다.
성경이 ‘올라간다’고 표현한 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는 믿음의 발걸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섬기는 표현을 성전을 향한 순례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몇 일, 몇 주를 걸어서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아이의 손을 붙잡고, 짐을 메고, 먼지 날리는 길을 지나 그들은 성전을 향해 올라 왔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레위기의 율법대로 제사의 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소를 가지고 왔고, 보통은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왔으며,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준비했습니다. 중요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 “흠이 없는 제물”은 단지 규정이 아니라, 메시지였습니다. “죄인은 아무렇게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메세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메세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소를 끌고 며칠을 걸어왔습니다. 배를 타고 양을 데리고 왔습니다. 처음 떠날 때는 흠이 없었습니다. 정성껏 골랐습니다. 그런데 험한 길을 걷는 동안 짐승에게 상처가 생겼습니다. 털이 빠지고 다리를 접지릅니다. 성전에 도착해 보니 흠이 생겼습니다.
그 제물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었습니다. 다시 가지고 집으로 가야했습니다. 먼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그래서 성전 당국은 고민 끝에, 성전 뜰 안에로 제물을 판매하도록 했습니다. 처음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배려'였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셨죠? 여기서 흠 없는 제물을 사서 드리면 됩니다. 예배를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월절 기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람이 몰리면 무엇이 생길까요? 시장이 생깁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생깁니다. 공급이 생기면 가격이 형성됩니다. 가격이 형성되면 경쟁이 생깁니다. 경쟁은 곧 이권으로 이어집니다. 성전 근처의 제물 판매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이 “흠 없다”고 인정해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상인 사이에 관계가 생겼습니다. 자리를 허락해주는 대신에 일정한 이득이 오갔습니다. 독점권이 생겼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려면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통되던 동전에는 로마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것은 우상 숭배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에는 로마황제의 형상이 찍힌 돈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무조건 성전 전용 화폐, 곧 세겔로 환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환전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수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이라는 독점적 공간 안에서 환율은 자연스럽게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물을 사야 합니다.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줄이 길어집니다. 기다림이 길어집니다.그리고 이런 말이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더 주면 빨리 처리해 줄게요.” “여기에 있는 양과 소가 더 좋다고 인정받을 겁니다.”
사람들은 더욱 좋은 것을 사기 위해서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래고 판매상들은 이 이권을 지키기 위해서 성전당국에게 뇌물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뒷 관계가 작동하고, 힘 있는 사람이 유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성전은 더 이상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돈이 더 많은 사람이, 성전당국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빠르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구조가 되어갔습니다. 처음에는 편의였습니다. 그러나 편의가 구조가 되고, 구조가 권력이 되고, 권력이 이익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예배는 거래에 종속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온 자리에서 사람들은 계산을 먼저 합니다. 기도는 뒤로 밀리고 거래가 앞에 섭니다. 이것이 그당시 탐욕의 구조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처음의 의도는 ‘배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배려’는 ‘배려’로 남지 않고,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배려’가 ‘편의주의’로 흘러갔습니다.
레위기 1장에 보면 하나님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편의주의는 그들로 하여금 그 과정의 소중함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가 예배를 드리려면 이렇게 드리라는 규정을 주셨습니다. 마음대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절차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복잡한 절차를 요구하신 이유는 그 수고로움 속에 담긴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편의주의는 그 과정을 '불필요한 번거로움'으로 치부해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과정 속에 숨겨진 은혜의 메시지까지 놓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에 제물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러 가는 이들은 어떤 과정을 준비해야 했을까요? 예배자는 직접 흠 없는 짐승을 고르고, 몇일 동안 살펴보며, 상처는 있는지, 없는지, 병은 있는지, 없는지, 가장 좋은 것인지.구별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자신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께 최선의 것을 드리려고 하는가?” “하나님앞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점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물을 고르는 시간은 물건을 고르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흠 없는 짐승을 직접 성전까지 끌고 가야 했습니다. 그 길은 고된 일이었습니다. 신경이 쓰입니다. 흠이 날까봐 조심스럽게 움직였습니다. 예배자는 성전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통해서, 예배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예배는 시간과 수고가 드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예배는 비용과 희생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흠 없는 제물을 가지고 가면서, 자신의 모습을 살폈습니다. 짐승을 끌고 가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소를 봅니다. 저항하지 않는 양을 보게 됩니다. 그것들은 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죽습니까? 왜 대신 제물이 됩니까? 흠 없는 소와 양은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아무 잘못이 없는데 대신 죽습니다.
예배자는 그 짐승의 눈을 보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 눈은 고요 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저 생명은 죄가 없는데, 나는 죄가 있다.”고 말입니다. “저 생명은 침묵하고 있는데, 나는 변명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저 생명은 저항하지 않는데, 나는 핑계대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알게 됩니다. “이 생명이 나를 대신한다.”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직감적으로 내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ㅣㅆ습니다. 예배자는 제물을 보며 자기 자신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걸어가는 길은 단순한 이동시간이 아니라, 회개의 시간었습니다.
그렇게 예배자들, 순례자들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지고 어렵게 성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마지막 관문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흠 없는 제물인지 아닌지 검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예배자들과 순례자들은 긴장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제사장에게 “흠이 없다. 흠이 있다” 판결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순간은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는 순간이었습니다. 제사장이 “흠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예배자는 깨닫습니다. “내 눈에는 괜찮아 보여도 하나님의 눈에는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예배였습니다. 예배는 내 기준이 깨지는 자리였습니다. 예배는 내가 옳다고 여겼던 것이 무너지는 자리였습니다.
예배는 내가 가져온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기준 앞에 서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이 과정에는 항상 긴장감이 있었고, 불편했으며,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 들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제사는 내가 드리고 싶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규정대로 드리는 것이 예배였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내가 감동받은 것을 표현하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예배는 “내가 정성을 쏟은 것을 하나님께 보여주는 시간”도 아니었습니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을 규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규정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안에서 파는 흠 없는 제물은 이 과정과 여정을 모두 생략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르는 시간이 사라지면서 마음을 살피는 시간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제물을 직접 끌고 가는 여정이 사라지면서, 회개의 시간, 자신이 죄인이라는 직면의 시간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검사하는 시간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의 기준이 흐려졌습니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경외하는 마음 긴장하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나를 깨뜨리는 경험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배려는 예배를 돕는 것 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예배의 본질을 제거해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이제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이 아니라, 처리가 되었고, 회개가 아니라 절차가 되었으며, 거룩 앞의 떨림이 아니라 종교적 시스템이 되었습니다.
예배의 과정이 사라지면서, 의미가 점점 흐려졌습니다. 의미가 흐려지면서, 점점 죄의 무게가 사라졌습니다. 죄의 무게가 사라지면서, 은혜도 매우 가벼워지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가볍게 되면, 더이상 은혜는 은혜로서의 감격이 아니라,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에서 분노하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과정을 지워버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는 준비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에 준비의 과정이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게 합니다.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주말 일정 중 하나’로 여기는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컨디션이 좋으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되고, ‘마음이 힘들 때만 찾는 피난처’가 되어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로 오기 전,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살피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시간이 사라지고, 준비는 최소화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줄어들고, 우리는 점점 더 “편한 방식”을 찾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오면서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 !! 기대하면서도, 어떤 말씀이든 받아 들이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게 된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하나님!! 내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지한 질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단지 예배를 습관에 따라 헤치우는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회개의 과정이 너무 형식적으로 변했습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아파하고, 하나님앞에서 씨름하고 눈물로 자복하는 ’애통의 과정’이 사라졌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너무 쉽게 “주님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마치 ‘죄 용서 자판기’버튼을 누르듯이 진정한 회개와 참회가 없는 우리의 모습을 폭로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아픔이 있고, 회복의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는 너무 값싼 위로만 빨리 얻으려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회개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도 생겼을텐데 말씀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도 않습니다. 말씀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 오래 마무는 대신에 잘 먹여주는 말씀으로만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위로만 받고 싶고 소망만 얻고 싶어하는 마음만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예배의 과정, 회개의 과정,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게 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신앙생활에 과정이 생략되면 안된다는 것을 주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일의 예배는 주중의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과정의 생략의 무서움을 보여줍니다. 과정이 생략되자, 회개의 눈물도 말랐습니다. 수고가 사라지자, 은혜의 감격도 증발했습니다. 남은 것은 차가운 동전 소리와 종교적 행위뿐이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혹시 우리 안에도 주님이 엎으셔야 할 모습이 있지는 않을까요? 혹시, 우리도 너무나 편의주의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형식만 남은 예배, 습관이 된 기도, 은혜를 말하지만 회개는 없는 삶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엎으셔야 하는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관계보다 거래를 더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전이 시장이 된 훨씬 더 교묘하고 본질적인 죄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이 단순히 편하고 싶어서 성전을 시장으로 만들었을까요? 단순히 '익숙함' 때문에 성전이 시장이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죄성이 어느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깔끔한 거래를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제물을 드리는 거래를 그들이 만족해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보다 거래를 좋아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거래'는 깔끔합니다. 마트나 편의점을 생각해 보세요. 물건을 고르고, 돈을 내면 끝입니다. "얼마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걸로 모든 상황은 종료됩니다. 판매자는 나에게 더 이상 무엇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물건을 가지고 가서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거래는 '비용'을 지불하는 순간, 나에게 지워진 모든 의무가 사라지는 아주 편리한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관계'는 복잡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내 시간을 내어주고, 내 마음을 쓰고, 때로는 상처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일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보십시오. 돈으로 해결됩니까? 용돈 드렸다고 효도가 끝납니까? 아닙니다. 마음이 가야 하고,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관계는 피곤하고, 무겁고, 부담스럽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이 시장이 된 진짜 이유였습니다.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 끌고오는 과정, 검사받는 과정 모두 관계적인 것이었습니다. 자신 때문에 죽어야 하는 제물을 보며, 자신의 죄의 무게를 뼈저리게 느껴며 하나남앞에서 자신의 삶을 점검하는 치열한 ‘관계’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과정속에는 아픔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찔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 시장'이 생기면서 마음의 짐도 함께 털어버렸습니다. "나 할 일 다 했어. 비싼 값 치렀어.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다 했잖아." 더 이상 내 삶을 요구하지 말라는 것을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삶이 깨지는 아픔을 겪고 싶지하지 않습니다. 내 자아가 죽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바꾸는 것'보다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훨씬 더 쉽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신앙을 '거래'로 만들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헌금 이만큼 했잖아요. 봉사도 했잖아요. 주일 성수 했잖아요.
그러니까 제 사업 잘 되게 해주셔야죠. 내 자식 잘 되게 해주셔야죠." 여러분,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이것은 협상이고, 거래입니다. 마트에서 영수증 내미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선지자 요엘은 피를 토하듯 이렇게 외쳤습니다. 요엘 2장 1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하지만 타락한 우리는 말합니다. "하나님, 마음 찢는 건 너무 아파요. 그냥 비싼 옷을 찢을게요. 비싼 황소를 살게요. 돈으로 때울게요." 성전 시장은 단순히 순례자의 편의를 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돈으로 회개를 대신하려는 인간의 교묘한 자기 방어 기제"가 만들어낸 시스템이었습니다. 내 삶을 고치기 싫어서, 내 죄를 직면하기 싫어서 만들어낸 거대한 도피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편해졌습니다. 편리해졌습니다. 익숙해졌습니다. 다들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전에서 상을 엎으시며, 그들을 꺠우셨습니다.
결 론
사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 번이고 다른 본문으로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니고데모 이야기처럼 조금 더 부드러운 말씀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고, 어려운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채찍을 드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이 제게도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교 원고를 쓰다가 문득 두려운 상상이 저를 덮쳤습니다. “만약 오늘, 채찍을 드신 예수님이 우리 은혜이음교회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면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 어떻게 말씀하실까?
아마 틀림없이 주님은 저부터 찾으실 것입니다. 제가 이 교회의 담임목사니까요. 주님은 저에게 무엇을 물어보실까요? 상상해 보았습니다. 개척교회 10개월 되었는데, 얼마나 성도가 늘었냐? 주일 예배는 몇 명이나 모이냐, 유튜브 구독자 수는 얼마나 되냐, 헌금은 월세 낼 만큼은 나오니? 이런 것을 물어보셨을까요?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이지, 주님이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묻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오직 저와 주님만이 아는 마음의 동기, 예배의 과정, 회개의 과정,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을 때, 제가 품었던 '마음의 중심'을 확인하실 것입니다. 너는 개척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 너의 야망을 거래하려 하지 않았느냐?" 너는 한 영혼이 귀하다 말하면서도, 사실은 교회의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았느냐? 이 부분을 물어보실 것입니다.
지난 10개월, 열심히 달려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불꽃 같은 눈앞에 서니,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장사꾼의 기질이 보였습니다. 아팠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고를 덮고 괴로워했습니다. 이 기도가 무서웠습니다. “주님... 혹여나 우리 은혜이음교회 안에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모습이 숨어 있다면, 저희가 모르고 지나치지 않도록 제발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무서웠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묵상하면서, 다시한 번 소망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엎으셨지만,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상을 뒤집으셨지만, 그들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뒤집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프게 하지만, 우리를 위한 위대한 계획을 바꾸지 않으신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서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19절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종교지도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성전 건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서 흠 없는 완전한 흠없는 대속의 제물이 되시므로, 하나님께 영원히 나아갈 수 있는 길, 통로, 성전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들이 흠 있는 제물을 들고 서 있을 때, 주님은 흠 없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들이 길을 잃은 성전 안에서 헤맬 때 주님은 친히 성전이 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거래하려 할 때, 주님은 십자가에서 값을 완전히 치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허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통해서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신 이유가 주님이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시 새롭게 세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선포는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 않고, 우리에게 참 소망을 됩니다.
우리가 예배의 과정을 잃어버리고, 회개의 과정을 잃어버리고, 검증의 과정을 잃어버렸어도, 우리를 세우시려는 선하신 계획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담대히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 안에서 엎으셔야 할 것이 있다면 엎으셔도 됩니다. 깨뜨리셔야 할 교만이 있다면 깨뜨리셔도 됩니다.
뒤집으셔야 할 동기가 있다면 뒤집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제물과 성전이 되셔서 영원한 사귐의 관계로 들어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죄성을 깨닫게 해달라고 나의 탐욕이 드러나게 해달라고 담대히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탐욕의 마음, 우상의 마음, 편안함의 마음을 엎으시고, 십자가로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개척이 되고 10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개척 멤버로 처음부터 눈물로 씨를 뿌리셨고, 어떤 분은 이 작은 교회를 돕고자 섬김의 마음으로 오셨고, 또 어떤 분은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겠다고 귀한 발걸음을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모인 이유는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우리 교회가, 작고 연약한 우리 공동체가 진짜로 갈망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 은혜이음교회가 무너질 것은 무너지고, 세워야 될 것은 세워 주옵소서. 탐욕의 마음은 무너지고, 종교적인 마음, 이기적인 마음, 자기 중심적인 마음은 무너지게 하시고, 죄를 깨닫게 되는 마음, 주님앞에 회개하는 마음,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세워 주옵소서.
우리 모두 예수님을 중심으로 두고 사는 성전이 되게 하옵소서. 모퉁잇돌 되신 예수와 하나되게 하신 성령안에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이런 교회 같이 만들어갑시다.
우리 같이, 예수님이 주인되시고, 우리의 죄성이 무너지고, 예수님이 주인되시고, 성전되시는 교회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해 힘쓰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