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요한복음을 읽다 보면 한 가지 분명한 특징이 보입니다.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아무렇게나 나열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대조가 보이도록 본문을 배치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2주간 요한복음 2장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2장에는 두 가지 상반된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와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사건'입니다.
요한은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결핍을 채우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우리 신앙의 중심이 잘못될 때는 새롭게 세우기 위해 엎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3장과 4장으로 들어오면 이번에는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대조를 이룹니다. 요한은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웁니다. 3장에는 니고데모가 나옵니다. 4장에는 수가성 여인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유대교 중심에 서 있던 사람이고, 수가성 여인은 사회적으로 변두리에 서 있던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수가성 여인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산헤드린 공회원이었고, 수가성 여인은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녀야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수가성 여인은 율법으로 정죄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도덕적으로 정돈된 사람이었고, 수가성 여인은 도덕적으로 무너진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겉으로 보기에 충분해 보였고, 수가성 여인은 겉으로 보기에도 결핍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예수님을 한밤중에 찾아 왔습니다. 수가성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물을 길러 나오는 그녀를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이렇게 니고데모와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은 너무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3장과 4장은 사람의 대조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가 예수님이 필요한가? 결핍이 드러난 사람입니까? 아니면 충분해 보이는 사람입니까? 무너진 사람입니까? 아니면 종교적으로 정돈된 사람입니까? 요한복음이 이 둘을 나란히 붙여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불쌍한 사람”만 예수님 앞에 세우지 않습니다. 요한은 “부러운 사람”도 예수님 앞에 세웁니다.
우리는 보통 “다시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고 하면 수가성 여인 같은 사람을 떠올립니다. 실패한 사람, 인생이 뒤틀린 사람, 결핍이 있는 사람, 무너진 사람, 그래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 같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왜 다시 신앙에 있어서 “새로운 시작”이 필요할까요? 예수님은 왜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는 진단을 내리셨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니고데모에게 하신 “거듭나야 한다”는 메세지를 어떻게 들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이 하시는 메시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왜 다시 “새로운 시작”이 필요 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그가 누구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1절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요한은 1절에서 니고데모의 실패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자격을 말합니다.
그의 스펙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실패자가 아닙니다. 그는 덕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대 유대 사회가 자랑하던 ‘어른’이었습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존경을 받던 인물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은 위선자의 상징이 아니라, 율법을 가장 철저히 지키던 경건한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성공한 인생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확신에 갇혀 새로운 것을 배척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적 보고 그는 정직하게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저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체면보다 진실을 택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말씀을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말하는 거친 욕망은 버렸습니다. 분노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노골적인 탐욕도 줄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음란함도 정리했습니다. 말은 부드럽고, 표정은 단정하고, 태도는 점잖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입니다. 거친 욕망은 버렸지만, 더 정교한 욕망을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교한 욕망은 소리가 마음에서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이 정교한 욕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오래 갑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다.”, “하나님께 칭찬받고 싶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싶다.”는 이 욕망은 매우 도덕적이고, 거룩한 열정으로 보입니다. 이 욕망은 심지어 경건한 것 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착각했습니다.
“나는 욕망을 많이 내려놓았어.”고 말입니다. 사실 욕망을 많이 내려놓았다고 생각한 그 마음은 욕망을 없앤 게 아니라, 욕망을 세련되게 바꾼 것입니다. 예전에는 돈을 원했다면, 이제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원합니다. 예전에는 쾌락을 원했다면, 이제는 “영적인 사람”이라는 평판을 원합니다.
예전에는 높아지고 싶었다면, 이제는 “겸손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이게 더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이 욕망은 죄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취감과, 만족감이 ‘자기 의’가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옳은 자리에 서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알고 있었고, 그 율법을 기준으로 세상을 분별해 왔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가르쳐 왔고, 다른 이들의 신앙을 판단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지만, 이미 자신이 그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니고데모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가 악해서가 아닙니다. 그가 타락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주위사람과 비교해서 더 나은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겸손과 미덕을 추구한다는 생각아래서 말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약점보다 더 위험한 것은 때로 우리의 강점이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부족해서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너무 충분해서 문제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세지를 줍니다. 니고데모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그 사실이 그의 가장 큰 영적 걸림돌이었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의 문제는 죄가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죄가 없어 보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가진 가장 깊고 치명적인 문제는 ‘타락’ 그 자체가 아닙니다. 니고데모의 위기는 그가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행동으로 죄를 많이 죄를 지어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착각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끈질기게 타인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래도 나는 저 세리보다는 낫다.” “그래도 나는 모태신앙이다.” “그래도 나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은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평균 점수를 내고, 그 점수에 안도합니다. 이것이 ‘괜찮음의 마취’입니다.
니고데모의 위험은 타락이 아니라 자기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자신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지만 이미 자신이 그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진리를 연구했지만 자신이 이미 진리 편에 서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인간의 가장 깊은 착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너질 때보다 잘 서 있을 때 더 위험합니다. 죄를 지을 때보다 “나는 괜찮다”고 느낄 때 더 위험합니다. 실패할 때보다 성공할 때 더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기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조금 부족하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 더 노력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괜찮지만 조금만 보완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가 있었지만 거듭남이 없었습니다. 그는 경건이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에게 없는 거듭남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신학적 함의를 가져다 줄까요?
예수님이 거듭남을 설명하기 위해 출생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출생이란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임신과 출산은 아기가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스스로 작정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일입니다. 아기의 행위와는 무관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희생으로 태어났습니다.
영적인 출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출생은 나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조금 더 배우면 하나님께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율법을 더 지키면, 조금 덕을 더 쌓으면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향을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은 “내가 하나님께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오시는 사건”입니다. 니고데모는 자기 노력으로 생명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성취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물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공로를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은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위로부터 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주어진 생명은 우리안에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다시 아기의 출생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여러분, 아기가 태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면 빛이 들어옵니다. 소리가 들립니다. 냄새가 느껴집니다. 촉감이 닿습니다. 맛을 압니다. 세상이 새롭게 열립니다.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엔 “세상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세상은 이미 있었는데, 아기가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감각이 없었을 뿐입니다.
거듭남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래 여기 계셨습니다. 말씀은 원래 살아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원래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 안에 영의 감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없던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실제로 느끼고 알아차리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내 인생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주변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거듭남은 하나님이 내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생각’이 아니라 ‘현실’이 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문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신다”는 감각이 생겨납니다.입니다. 그래서 일상이 달라집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하나님을 “필요할 때 찾는 분”으로만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거듭나면 문제가 없어도 하나님이 생각납니다.
마음이 평온한 날에도 하나님이 떠오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도,“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게 영적인 감각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나는 내 기분으로 나를 해석했습니다. 내 성과로 나를 해석하고, 내 실패로 나를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거듭나면 내 마음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큰 기준이 됩니다. 내 감정이 나의 정체성이 되지 않습니다. 내 상황이 내 존재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내 인생을 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흔들려도 주님은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무너져도 주님은 나를 붙드신다.” “나는 죄인이지만 사랑받는 자다.” 이게 새로운 생명의 감각입니다.
거듭나지 않았을 때 신앙은 의무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면 신앙은 관계가 됩니다. 의무는 “해야 한다”에서 시작하지만 관계는 “만나고 싶다”에서 시작합니다. 거듭나지 않았을 때 예배는 습관입니다. 거듭나면 예배는 만남됩니다. 습관은 건너 뛰어도 별 일 없지만 만남은 건너뛰면 마음이 이상합니다.
보고 싶은데 못 본 느낌이 듭니다. 내 영혼이 허기집니다. 거듭나지 않았을 때 말씀은 정보입니다. 거듭나면 말씀은 음성입니다. 정보는 내가 통제할 수 있지만 음성은 나를 건드립니다. 나를 드러냅니다. 나를 위로하고, 때로 나를 찌릅니다. 그 말씀 앞에서 “아멘”이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회개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거듭나지 않았을 때 회개는 기분 나쁜 인정입니다. 자존심이 상합니다. 내 이미지가 깨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대충 하고 싶습니다. 빨리 끝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거듭나면 회개는 관계 회복의 문이 됩니다. “들켰다”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아프게 했다”가 아픈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자기혐오로 끝나지 않습니다. 관계로 돌아가는 길이 됩니다.
죄를 지을 때도 달라집니다. 거듭나지 않았을 때 두려움은 사람의 시선입니다. 평판이 깨질까 두렵습니다. 이미지가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거듭나면 두려움의 중심이 바뀝니다. “주님이 아프시겠구나.”, “내가 주님의사랑을 배반했구나.” “내가 다시 예수님 믿기 전의 자리로 돌아갔구나.”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그러나 동시에 그런 내가 내가 하나님앞에 갚을 수 없는 용납과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또한 다시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듭난 사람은 죄를 ‘규정 위반’으로만 보지 않고 ‘사랑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감각입니다.
이 감각은 내가 훈련해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하나님의 영이 주어져 열리는 감각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우리를 더 “잘난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우리를 더 주님의 말씀앞에서 “살아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남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깨닫게 하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으로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 새로운 이해와 감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역사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어차피 성령이 하셔야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기다리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지만, 그 생명을 외면할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은혜는 강제로 밀어 넣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처럼 다루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선물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받지 않겠다고 손을 뒤로 숨길 수는 있습니다. 거듭남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지만, 그 은혜를 거절할 수는 있습니다. 선물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손을 내밀어 받아야 합니다. 햇빛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눈을 감으면 빛을 볼 수 없습니다.
물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지만, 마시지 않으면 목마름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기다려라”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젠가 성령이 하실 것이다”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결 론
그대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구약의 민수기 말씀으로 예로 드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이 배경을 알아야 오늘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매일 먹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반복되고, 은혜가 익숙해지자 사람들은 더 이상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음식 만나는 당연한 것이 되었고, 하나님의 임재는 배경이 되었고 마음에는 원망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와 죽게 한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고 원망했고, “하나님 없이도 우리는 살 수 있다.”는 교만함이 그들의 속마음이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아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사건은 언뜻 보면,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감정적인 징계같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갑자기 새로운 위험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동안 붙들고 계셨던 보호를 거두셨을 때 광야의 현실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하던 그 현실을, 그대로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불뱀에 물려 죽게 되자,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의 죄성과 교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뱀에 물린 사건은 “그동안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었구나” 하는 그들의 진짜 현실을 눈으로 보이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뱀에 물리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와 우리가 잘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직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노력으로 죽어가는 그들의 생명은 살릴 수 없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런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민수기 21장 8절과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던 바로 그 불뱀의 형상을 만들라”고 하셨고, 모세는 그것을 청동으로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습니다.
보통 우리는 해독제를 주셔서 그들을 치유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해독제를 먹는 방식이 아니라, 불뱀의 형상을 놋으로 만든 것을 장대에 올리셨고, 그것을 바라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죄를 직면하게 되었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처음에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저걸 본다고 낫는다고?”, “이게 무슨 방식인가?”, “이건 상식에 맞지 않는데?”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자존심을 지킬 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놋뱀을 바라볼까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독이 퍼져가고 이젠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낀 자들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나는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에 대한 조바심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백으로 그들의 죽음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고통은 죄를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생명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후회는 마음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회가 죽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죄를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이 곧바로 그들의 몸에 퍼진 독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들은 장대위에 높이 쳐든 놋뱀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바라본 자는 모두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선택했습니다. 자기 방식을 붙들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장대의 놋뱀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눈동자의 움직임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 전환입니다. “나는 나를 살릴 수 없다.” “나는 독을 제거할 능력이 없다.” “나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신뢰한다.” 그 믿음이 그들을 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니고데모는 평생 ‘쌓아온 사람’입니다. 율법을 쌓았고, 경건을 쌓았고, 지식을 쌓았습니다. 조금 더 배우고, 조금 더 지키고, 조금 더 정결해지면 하나님께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어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밤, 니고데모에게 ‘더 쌓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려면, 새로운 생명을 얻으려면, 마치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신의 상태를 직면하여, 살기 원하는 사람들이 간절히 높이 처든 놋뱀을 바라보는 것 처럼, 니고데모가 앞으로 십자가라는 장대위에 달릴 예수님, 자신을 바라보아야 새로운 생명, 거듭남이 이루어진다는 메세지를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놋뱀을 바라보고 죽어가던 그들이 새 생명을 얻었던 것 처럼 십자가에 달릴 자신을 믿고 바라보면 새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우리 다같이 16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입니다.
니고데모는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정보를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좋은 분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살릴 수 없다는 자리에서 그분의 십자가를 나의 생명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내가 쌓아온 의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던 자존심과 공로와 계산을 내려놓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내 생명의 유일한 근거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이 “나의 죽음이었어야 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위로부터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신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부르게 하십니다. 멀리 계신 신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 계신 아버지께 기대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죄를 ‘규칙 위반’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상태로 깨닫게 하십니다. 불안 속에서 자신을 붙들던 손을 놓고 은혜를 붙들게 하십니다.
비교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던 삶이 아닌, 감사 속에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운 감각입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나는 생명입니다.
우리도 니고데모 처럼 그동안 우리가 했던 신앙생활을 다시 점검하고 시작해야 하는 자리에 서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불안하고, 속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공허가 있고, 속으로는 하나님이 정말 가까운지 잘 모르겠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스스로게 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더 잘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더 착해져라”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 달렸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감당해야 할 죄와 두려움을 내가 대신 짊어지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고백하길 원하십니다. “주님, 저는 제 힘으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저를 살려 주셔야 합니다.”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 이고백을 전심으로 하기를 간절히 바랍십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들이라도, 세례와 입교와 학습을 통해 신앙고백을 확실히 하신 분들이라도, 교회에서 귀한 직분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오늘 다시한 번 이렇게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 힘으로는 안됩니다. 주님!! 새로운 생명을 제 안에서 시작하여 주옵소서.!! 이 고백 위에 성령께서 우리 안에 새 생명의 감각을 주시며,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의무 대신 기쁨을, 종교 대신 살아 있는 관계를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