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새해라는 시간은 우리의 마음에 ‘변화’에 대한 갈망을 일으킵니다. 이제는 좀 달라지고 싶다. 올해는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단단해지면 좋겠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새해에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귀하고 거룩한 다짐을, 입 밖으로 말하는 것을 모두 다 주저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안의 다짐이 얼마나 연약한지, 상황 앞에서 얼마나 가벼운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비슷한 죄’ 앞에서 반복해서 넘어지는 사람인지, 지난날의 실패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왜 우리는 반복해서 무너질까요? 왜 그렇습니까? 단순히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환경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 반복의 원인을 훨씬 더 깊은 곳, 우리의 마음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새해 첫 주일, 창세기 3장을 펼칩니다. 창세기 3장은 “우리는 왜 반복해서 무너지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답을 해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새해 첫 주일 타락의 시작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타락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려면 죄에 대한 정직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의 쓴맛을 맛보지 않으면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의 달콤함을 맛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죄와 은혜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죄를 다루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죄는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죄는 어떻게 우리 마음에서 작동되는지,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죄의 종노릇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소망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오늘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그렇다면 죄는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죄는 행동이 아니라 말과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보통 죄를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선을 넘은 행동, 충동적인 행동, 의도적인 행동, 알면서도 하는 행동 말입니다. 그래서 죄를 설명할 때도 늘 결과부터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생각할 때도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에만 몰입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놓치는 것이 참 많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3장에서 단순히 “무엇을 먹었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떻게 그 자리까지 가게 되었는가”를 아주 길게, 아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죄는 준비됩니다. 과정이 있습니다. 마음 안에서 서서히 길을 만듭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니라. 이 말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은 타락의 순간보다 타락의 과정을 더 많이 기록합니다. 하와가 열매를 먹기까지 그 마음에서 어떤 말과 생각이 오갔는지 보여줍니다. 그 시작은 대화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와와 사단의 대화가 나와 있습니다. 왜 이런 대화를 보여줄까요? 우리의 죄가 우리 마음에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자세히 보여주기 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단은 누구인가? 사단은 어떤 추상적인 상징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단을 실재하는 인격적 존재로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단은 피조물입니다.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사단이 원래 천사였으나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으로 타락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유다서 1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그러므로 사단은 하나님과 권력 다툼을 벌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심판 아래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미 패배가 확정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이미 심판이 정해졌다면, 왜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미혹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사단은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 다시 도전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분노는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향해 있습니다.
사단의 목적은 자신의 구원을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망가뜨리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정면승부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처럼 명령할 수도 없고, 하나님처럼 진리를 선포할 수도 없고, 하나님처럼 생명을 창조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늘 우회로를 택합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항상 위장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사단이 가장 잘하는 일은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사단은 에덴동산으로 걸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단이다” 하고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뱀으로 위장했고, 배로 기어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겸손을 가장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뱀이 아닙니다. 뱀으로 가장한 사단입니다. 사단은 전면에 나서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말’로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사단은 선악과를 들고 오지 않습니다. 사단은 말을 들고 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질문을 들고 옵니다. 창세기 3장 1절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단은 명령하지 않습니다.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질문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닙니다. 팩트를 확인하려는 질문도 아닙니다.
이 질문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의심해도 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의 미혹은 항상 의심하게 만듭니다. “정말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다고?” “진짜 그렇게 믿어?” 사단은 처음부터 “하나님은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면 사람은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진리를 무너뜨리기 전에, 먼저 진리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단은 반드시 과장합니다. 부풀립니다. 왜곡합니다.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거짓말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모든”을 지워버립니다. “마음껏”을 지워버립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삭제하고, 금지된 한 가지를 부풀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열 가지를 삭제하고, 하나님이 아직 주시지 않은 한 가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우리의 마음이 미혹당하기 딱 좋은 마음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제한하고, 빼앗는 분인 것처럼 말씀을 비틀어 전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오해를 하나 짚고 가야 합니다. 성경이 사단의 존재를 말한다고 해서, 우리 죄의 책임을 사단에게 떠넘기지 않습니다. 사단은 말을 던질 뿐입니다. 결정은 언제나 사람이 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강제로 먹이지 않았습니다. 손을 잡아 끌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죄는 언제나 사단이 던진 말과, 그 말에 반응하는 내 마음의 욕심과 의심이 있습니다.
반응하지 않아도 되는 그 말에 항상 우리 스스로가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대부분 외부의 음성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귀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생각의 형태로 찾아옵니다.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생각, 이상하게 설득력 있는 생각, 괜히 마음에 오래 머무는 생각, 잘못된 말들을 듣고 반응하는 생각등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다들 이렇게 하는데 뭐.”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잖아.” “하나님이 정말 이 상황까지 요구하실까?” 편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합리화하는 생각들로 자연스럽게 나에게 말을 겁니다.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생각이 난다고 해서, 그 생각이 진리는 아닙니다.
자연스럽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모든 생각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분별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거룩은 행동을 억지로 참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내 목소리처럼 들려오는 ‘생각의 정체’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달콤한 합리화가 들려올 때, 이것이 나의 생각인지, 말씀을 흐리는 유혹인지 멈춰 서서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의 태도와 자세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분별은 하나닌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이 잘못된 생각은 우리 안에서 어떻게 작동할까요? 죄는 단순히 “나쁜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는 생각에서 자기해석으로 활동하고, 그 해석을 믿어버리므로 행동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 지점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흔히 사단이 하와를 완전히 속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사단은 그저 불을 지폈을 뿐입니다. 타오를 준비가 된 장작은, 이미 하와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서 죄가 들어왔다고 생각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은 이미 선악과를 먹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의 마음으로 인간의 의지가 떠났기에 행동이 따라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와의 손이 선악과를 잡기 전에, 그녀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하와는 사단과의 대화 속에서 적어도 세 번이상, 이미 자기 안에 품고 있던 ‘비틀어진 하나님’. ‘ 왜곡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읽겠습니다.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먼저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더함으로써 하나님을 왜곡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이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지지도 말라”고 말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와가 은연중에 이 말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단순한 말실수일까요? 아닙니다. 하와의 마음속에서 이미 하나님에 대한 해석이 바뀌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을 “이것저것 하지 말라” 강요하는 규범의 하나님처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악과를 먹거나, 먹지 않음이 관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본질인데, 하와는 그 본질을 흐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하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하나님을 ‘부담스러운 분’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리고 하와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빼버립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더 가볍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하와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을까 하노라.” 여기서 “반드시”가 사라졌습니다. 죄는 언제나 이렇게 죄의 결과를 축소시킵니다.
왜냐하면 죄는 결과의 무게를 줄여야 행동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시겠어? ” “이 정도는 괜찮겠지…” “날 사랑하시니까!"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니까”. “이렇게 안하는 사람이 어디있어?” 이렇게 생각이 작동합니다. 죄의 결과의 무게를 줄어야 마음에 안심이 되고, 마음에 안심이 되어야 경계가 풀리고, 경계가 풀리면 유혹은 더이상 ‘유혹’이 아니라‘ 합리적인 선택’처럼 느껴지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말씀의 원래 의미 자체를 지워버렸습니다. 하와는 나무의 이름을 다르게 부릅니다.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아니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라고 말합니다. 이건 단지 표현을 바꾼 게 아닙니다. 의미를 지운 것입니다. 선악과는 “선과 악의 기준은 하나님이다”라는 주권의 표지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그 의미를 싹 지워버립니다. 그저 동산에 있는 수많은 나무 중 하나로 격하시킵니다. 말씀의 권위를 살짝 내리고,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다르게’ 해석해 버리는 것. 말씀을 버리지 않으면서, 말씀의 의미를 제거해 버리는 것. 의도를 자기방식대로 왜곡하여 해석해 버리는 것 이것이 생각이 우리 마음안에 자리잡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사단은 하와를 같은 편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정면으로 왜곡하는 말을 통해서 안심하게 하죠!! 4절과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죽는다고 했는데, 하와는 “죽을까”로 축소했고, 뱀은 그 위에 쐐기를 박습니다. “결코 아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선해서 금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까봐 겁내서 막으신 거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라 통제이고, 하나님은 보호가 아니라 억압이고, 하나님은 선이 아니라 계산이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정면으로 왜곡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와에게 선악과의 열매가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이 흐려지자, “먹어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하와의 눈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관점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기준에서 내려오면 욕심이 기준이 됩니다.
그리고 욕심은 금지된 것을 ‘탐스러운 것’으로 바꿔 놓습니다.
왜 성경은 사단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말해주고 있을까요? 우리 마음안에 죄를 죄로 보지 않고, 탐스러운 기회나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모습을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욕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좋고 싫음으로 편집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장악한 죄는 결국 우리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죄는 생각을 넘어 반드시 밖으로 흘러나와 우리의 인격을 망가뜨립니다. 또한, 가장 소중한 관계들을 무너뜨린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죄의 비참한 영향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아담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3장을 읽을 때 흔히 착각을 합니다.
사단이 하와를 미혹하는 동안, 아담은 저 멀리 다른 곳에서 딴 일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와가 준 선악과를 아무것도 모르고 받아먹은 ‘피해자’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십시오. 여기에 소름 돋는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6절은 아주 짧지만 충격적인 사실을 기록합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성경은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이라는 말을 꼭 찝어 이야기합니다.
아담은 어디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사단이 하와에게 말을 걸 때도, 하와가 사단의 거짓말에 흔들릴 때도, 그녀가 손을 뻗어 선악과를 따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도, 아담은 바로 옆에서 그 모든 상황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몰라서 당한 게 아닙니다. 그는 알면서도 방관했습니다.
여기서 아담의 모습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아담도 하와처럼 똑같이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침묵합니다. 이 침묵은 점잖은 침묵이 아닙니다. “정말 죽나 안 죽나 한번 보자.” 아내를 앞세워 결과를 확인해 보려는, 비겁한 ‘동조’이자 ‘실험’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하기보다, 내 호기심과 안전을 먼저 챙기는 이기심, 이것이 아담이 선악과를 마음에 품자 그의 내면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장면이 나옵니다. 그토록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아담이, 죄를 짓고 나자 어떻게 변합니까? 하나님이 찾아와 “네가 먹었느냐?” 물어보시자, 그는 갑자기 ‘세상에서 제일 말 많은 사람’이 됩니다.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소리칩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열매를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소름 돋는 대조가 보이십니까? 아내를 살려야 할 때는 그토록 조용하더니, 자기가 살아야 할 때는 누구보다 말이 많아집니다. 아내를 보호해야 할 때는 입을 다물더니, 아내를 비난해야 할 때는 지체 없이 입을 엽니다. 이것이 죄가 하는 짓입니다. 죄는 우리의 인격을 이렇게 망가뜨립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던 그 고귀한 사랑의 고백은 온데간데없고, 자기만 살겠다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적으로 돌려세우는 비정한 이기심만 남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서로에게 탓을 돌리며, 책임을 전가하며, 핑계를 대고, 상처를 줍니다. 이러한 이기심이 공동체를 깨뜨리고, 관계를 깨뜨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가 어떻게 오늘 내 마음과 삶과 공동체를 여전히 할퀴고 있는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자, 그들은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게 된 것은 ‘하나님 같은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벌거벗은 자신의 비참함’이었습니다. 죄는 약속한 것을 주지 않습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를 속입니다.
영광을 약속했지만 수치를 주었고, 자유를 약속했지만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눈이 밝아짐’은 서로의 허물을 찾아내고, 나의 부끄러움을 확인하는 저주스러운 시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성입니다. 우리가 말씀이 아닌 죄성을 따라갈 때 반드시 겪게 될 열매들인 것입니다. 이때 아담과 하와가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신을 가립니다. 죄로 인해 생긴 수치심, 두려움, 불안을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똑같지 않습니까? 성공이라는 무화과 잎, 명예라는 잎, 쾌락이나 인정이라는 잎으로 내 영혼의 텅 빈 구멍과 부끄러움을 가려보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마치 무화과 잎은 해가 뜨면 금방 말라 비틀어지는 것 처럼, 인간이 만든 해결책은 결코 우리의 죄와 수치를 영원히 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 론
그들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게 되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심장이 멈추는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의 단절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뿌리 뽑힌 꽃이 잠시 화려해 보여도 이미 죽은 것처럼, 하나님을 피하여 나무 뒤에 숨는 그 순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는 그 순간, 그들의 영혼은 이미 죽음의 상태로 들어간 것입니다.
평안이 죽었고, 기쁨이 죽었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적인 죽음의 자리, 그 비참한 현장에, 놀랍게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몰라서 물으셨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가 어디있는지 다 다셨습니다. 그런데 왜 물으셨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져 묻기 위해서 찾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저주를 선언하기 위해서 찾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이제 나는 너와 관계를 맺지 못하겠다. 내가 널 포기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찾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화를 내신 것도 아닙니다. 저주의 선언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장소”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상태”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죄인을 잡으러 온 형사의 추궁이 아닙니다. 길 잃은 자식을 찾는 아버지의 애타는 부르짖음입니다. “아담아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내 곁인데, 도대체 왜 거기 있느냐?”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거닐던 네가, 어찌하여 나를 피해 두려움 속에 숨어 있느냐?”
이렇게 안타까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잠시 머물러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26년 새해 첫 주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아무개야,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너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느냐?”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죄의 유혹에 이끌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변명과 합리화라는 나무 뒤에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우리들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스스로 만든 무화과 잎으로 괜찮은 척 위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우리들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를 끄집어 내어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말라 비틀어진 무화과 잎을 벗기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이 무엇입니까? 짐승이 피를 흘려 죽어야만 얻을 수 있는 옷입니다. 여러분, 이게 왜 중요합니까? 아담과 하와의 무화과 잎은 그들이 만든 옷이었습니다.
수치를 느끼니까, 스스로 해결해 보려 했습니다. “이 정도면 가려지겠지.” “이 정도면 괜찮겠지.” 그런데 하나님은 그 옷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죄의 수치와 죄책은 인간의 노력으로 덮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죽옷을 입히십니다. 이 말은, 죄의 문제는 “조금 더 착해지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죽음과 피 흘림이 필요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죄의 값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직접 입혀주신 옷을 예비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가죽옷이 아닙니다.
이 성경을 읽는 우리들은 이 가죽옷에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표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때가 차매,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수치와 심판을 자기 몸으로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덮기 위해, 주님이 찢기셨습니다. 우리를 가리기 위해, 주님이 드러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죽옷이 아니라, 의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한 해를 시작해야 합니다.
2026년,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나의 결심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나를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의의 옷을 입혀 주시려는 하나님을 마주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해에 무화과 잎을 더 촘촘히 엮어서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나를 덮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믿음의 태도와 자세를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게 만들지만, 은혜는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숨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끝까지 찾아내십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실패했어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시 주님을 신뢰하며 도전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더디 믿지 마십시오. 더욱 굳게 붙잡으십시오. 사단이 참소하려고 할 때, 에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십시오. 언제나 자격을 논하는 사단의 미혹 속에서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께 받아 들여지기 위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선포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을 붙들고 부정적인 생각, 왜곡된 생각, 욕심의 생각의 불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십시오. 새해에는 우리의 다짐과 노력과 실패까지도 은혜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더욱 믿고 여기고 우리의 삶을 드리는 삶으로 걸어가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