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언제나 바깥에서만 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느끼는 방식 그대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저희 아내가 종종 두통 때문에 힘들어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두통이 심한 편이 아니라서, 사실 그 고통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옆에서 걱정이 되니까 물어봅니다. “많이 아파?”, “약 먹었어?”
“좀 쉬어야 하는 것 아니야?”그러다 보면 가끔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는 몰라. 이게 얼마나 아픈지.”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아내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두통을 대신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데도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자녀의 마음도 그렇고, 부모님의 마음도 그렇고, 배우자의 마음도 그렇고, 아주 오래된 친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표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오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른 사람의 마음은 들어야 알고, 물어야 알고, 기다려야 조금씩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저는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기억이 있고,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상처가 있고, 내가 경험하지 않은 하루가 있고,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마음의 방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 내 아픔은 다릅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압니다. 내가 오늘 얼마나 피곤한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압니다. 어제 들었던 말 한마디가 왜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지도 압니다. 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무엇을 잃을까 두려워하는지, 무엇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한지, 우리 자신은 직접 경험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관계에는 어쩔 수 없는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내 사정은 직접 경험하지만 다른 사람의 사정은 들어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이러한 한계는 우리에게 한 가지 태도를 요구합니다. 바로 겸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 “내 입장에서 옳아 보이는 것이 저 사람의 삶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를 반대 방향으로 데려갑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삶을 부분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교만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성경은 교만을 굉장히 심각하게 다룹니다. 잠언 16장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야고보서는 더 강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굉장히 강한 표현들입니다. 패망의 선봉입니다.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는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성경은 교만을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다룰까요? 단지 자기 자랑을 많이 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잘났다.”, “내가 너보다 낫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성경이 왜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라고까지 말하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교만에는 어떤 깊은 뜻이 담겨 있을까요?
저는 오늘 하박국 2장이, 바로 이 질문에 굉장히 깊은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살펴보았던 하박국의 흐름을 잠깐 기억해야 합니다. 하박국은 자신이 살아가던 유다 사회에 가득한 폭력과 불의를 보았습니다. 힘 있는 사람은 약한 사람을 억압했고, 법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악을 그대로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하박국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하박국이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악을 심판하기 위해 바벨론을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유다도 악했지만 바벨론은 훨씬 더 잔인하고 폭력적인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더 악한 나라를 사용하여 자기 백성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까?” 처음에는 하나님의 침묵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면 답을 듣고 마음이 편안해질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대답은 하박국의 질문을 없애기보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박국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더 질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박국은 파수대에 올라 하나님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자기 생각으로 답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기다립니다.
하박국이 궁금한 것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 저렇게 악한 바벨론이 계속해서 이기도록 두실 것입니까?” 그리고 4절부터 하나님께서 그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악을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최후를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다 같이 4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의 눈에는 바벨론의 폭력과 탐욕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보다 더 깊은 곳을 보십니다. 그 모든 행동을 만들어내는 마음의 뿌리를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한 이름을 붙이십니다.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은 교만하다.”라는 선언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6절 이후에 다섯 번에 걸쳐 “화 있을진저.”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교만이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교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돈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 집을 안전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로 성읍을 건축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사람에게 수치를 주는 이야기가 나오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까지 나옵니다. 그러면 질문이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이 도대체 교만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돈과 교만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사람을 이용하는 것과 교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안전을 원하고, 좋은 결과를 만들고,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 하는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교만이 되는 것일까? 더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교만을 겸손과 대조하지 않으시고, 믿음과 대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만의 반대말을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겸손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만한 자는 망하지만 겸손한 자는 산다.” 이 문장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만과 대조를 이루는 겸손을 이야기하실 줄 알았는데, 겸손이 아니라 믿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왜 교만의 반대편에 겸손이 아니라 믿음이 있을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과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서 보신 교만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교만이 우리의 관계와 삶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우리는 어떻게 그 교만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 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서 보신 교만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말씀을 보면 교만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말해줍니다. 5절입니다.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며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의 욕심을 스올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와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몇 가지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만히 있지 못한다. 욕심을 계속 넓힌다. 족한 줄을 모른다.” 여러 나라와 여러 백성을 자기에게로 모읍니다. 이미 강한데 더 강해져야 합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더 가져야 합니다. 이미 여러 나라를 정복했는데도 멈추지 못합니다. 자기 힘이 미치는 범위를 계속 넓히고 싶어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많은 나라를 자기 아래 두면 자기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은 줄어듭니다. 더 많은 재물을 가지면 더 많은 군대를 가질 수 있고, 더 많은 군대를 가지면 더 넓은 영역을 자기 통제 아래 둘 수 있습니다. 결국 바벨론이 원했던 것은 단순히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의 미래를 자기 손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자신들을 위협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지고, 자기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를 자기 힘으로 결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마음입니다.“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바벨론의 교만은 강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미래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할 수는 있지만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계획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계획한 대로 반드시 이루어지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인생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사실을 잊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소망으로 시작합니다. “이 일이 잘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가 좋은 길로 갔으면 좋겠다.”, “내 인생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 마음에 조용한 ‘반드시’가 붙습니다. “잘되었으면 좋겠다”가 “반드시 잘되어야 한다”가 됩니다. “우리 아이가 잘되었으면 좋겠다”가 “반드시 내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되어야 한다”가 됩니다. 처음에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반드시’가 붙기 시작하면서 소망은 조금씩 통제로 바뀝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준비하는 것과 통제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준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까지 내 뜻대로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하고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진실하게 말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까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과까지 결정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교만은 바로 이 경계를 넘어갑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결과까지 내 손에 쥐려고 합니다. 그 순간 책임과 통제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책임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통제는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까지 결정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내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결과까지 내 뜻대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우리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주인은 아닙니다. 교만은 미래를 준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미래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내가 미래와 결과를 내 뜻대로 붙들려고 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까지 붙들려고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반드시 나와야 한다면, 내 주변의 사람들도 그 결과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만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관계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때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그 사람의 사정보다 내 계획이 더 중요해지고, 그 사람의 아픔보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더 크게 보이고, 그 사람이 누구인가보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가 먼저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벨론이 그랬습니다. 자기 나라의 안전이 너무 중요해지자 다른 민족의 안전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기 성을 세우는 일이 너무 중요해지자, 그 성을 세우기 위해 흘리는 다른 사람의 피도 가벼워졌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지나치게 커지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점점 작아집니다.
이것이 교만이 관계 속에서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힘들다고 말할 때 처음에는 그 사람의 사정이 들립니다. 그런데 내가 붙들고 있는 결과가 너무 중요해지면 어느 순간, “이 사람이 괜찮은가?”보다 “이 사람이 빠지면 내 일이 어떻게 되지?” 가 먼저 들리기 시작합니다.
일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사람보다 기능이 먼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이의 미래가 내 마음에서 너무 커지면, “나 너무 힘들어”라는 아이의 말보다 “그래도 지금 멈추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 내 불안이 섞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은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책임감 속에 통제가 섞이고, 사랑 속에 불안이 섞이고, 좋은 비전 속에도 내가 원하는 결과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이 섞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교만을 왜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시는지 알게 됩니다. 교만의 가장 무서운 결과는 단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높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하나님과 사람을 작게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아이를 작게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결과를 만들고 싶은 책임감 때문에 동료를 작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배우자를 내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으로 작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좋은 비전을 이루고 싶은 마음 때문에 사람을 비전을 위한 자원처럼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만 보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이루는 동안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도 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왜 최선을 다한 뒤에도 사람의 반응까지 움직이고 싶고, 미래까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야 마음이 놓일까요? 교만의 문제를 끝까지 따라가면 결국 ‘신뢰의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와 다른 결과가 와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하시다고 믿을 수 있는가?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을 놓아도,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잘 붙들고 계신다고 믿을 수 있는가? 자녀의 미래가 내 계획대로 가지 않아도, 그 아이의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이심을 믿는가? 신뢰의 문제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만의 반대편에 단순히 ‘겸손’을 놓지 않으신 것입니다. 겸손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겸손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과를 붙들고 계심을 믿기 때문에, 사람을 통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가치를 이미 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인정받으려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겸손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종종 “잘될 거야”, “분명히 될 거야”라고 긍정적인 결과를 확신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결과를 미리 아는 능력이 아닙니다. “이건 절대 안 될 거야”라고 미리 결론 내리는 것도, “이건 무조건 될 거야”라고 결과를 확정해 버리는 것도 둘 다 내가 아직 모르는 미래를 이미 아는 사람처럼 판단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미래를 맞히는 능력이 아닙니다. 믿음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오늘 내게 맡겨진 일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선교를 다녀오면서 이것을 조금 더 실제적으로 경험했습니다. 대만의 칭화대학교에 가서 한국인의 밤과 예배를 소개하는 전단지를 가지고 노방전도를 했습니다. 낯선 곳이고 언어도 달랐습니다. 솔직히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될까?”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말을 건다고 누가 멈춰 설까?, 우리 이야기를 들어줄까?
교회 주변에서도 한국인의 밤과 어린이 캠프를 알렸습니다.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정말 누가 올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 명의 청소년과 두 명의 청년이 찾아왔고, 선교사님들과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그때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결과를 너무 빨리 판단하고 있었구나.”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들을지, 오늘 건넨 한마디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제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내 몫은 순종이고, 결과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주일 설교 때도 비슷했습니다. 번역이 완벽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잘 듣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제가 판단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 있었습니다. 저는 설교할 책임은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주권은 없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고 전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사람의 마음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겸손이 생겨납니다. 겸손은 ‘믿음의 조건’이라기보다 ‘믿음이 맺는 열매’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자녀는 내 성공을 증명하는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한 사람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배우자는 내 필요를 채워줄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한 사람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동료는 내 성과를 위한 자원이 아니라, 자기 삶과 사정과 한계를 가진 한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돈도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돈은 나를 구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도구입니다. 사역도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내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무대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입니다. 믿음은 나를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제 크기로 돌려놓습니다. 이것이 진짜 믿음이고 이 믿음 속에 겸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 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교만한 마음을 잠잠하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온유하고 겸손해 질 수 있을까요? 교만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순히 “조금 더 겸손해야지”라고 마음먹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보다 크신 분을 다시 보는 데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우리를 작게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다시 크게 보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크게 보이면 내 문제도 원래의 크기로 돌아오고, 내 계획도 ,나 자신도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하박국도 처음에는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이 너무 크게 보였습니다. 유다의 악이 너무 컸고, 바벨론의 힘이 너무 컸고, 하나님의 방식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질문했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박국의 시선을 계속 문제에만 머물게 두지 않으십니다.
바벨론보다 크고, 지금의 혼란보다 크고, 하박국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은 바벨론의 영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물이 바다를 덮듯 결국 온 세상을 덮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이것을 다시한 번 깨닫게 합니다. 이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다시 보는 것입니다. 상황이 당장 달라지지 않아도, 누가 역사의 주인인지를 다시 보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덥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믿게 되자, 하박국은 잠잠했습니다. 우리 다같이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참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하박국입니다. 왜냐고 물었고, 언제까지냐고 물었고,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합니다. 모든 질문에 답을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벨론이 이미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유다의 미래가 갑자기 밝아진 것도 아닙니다. 아직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니.”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내가 모든 결과를 만들어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붙들고 있어야,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잠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상황이 잠잠해진 뒤에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기에 내가 먼저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잠하십시오. 마음이 너무 조급해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것 같고,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것 같고,내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바꾸어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임감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열심 가운데는 때때로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 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고, 결과를 앞당기려 하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까지 미리 붙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열심은 믿음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교만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교만은 언제나 큰소리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지나친 조급함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잠잠하십시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충실히 하되, 하나님이 하실 일까지 대신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책임을 다한 뒤에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조용한 ‘반드시’ 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반드시 내 인생은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 ‘반드시’를 내려놓고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 몫은 충실히 감당하겠습니다.그러나 결과는 주님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니 잠잠하십시오. 잠잠함은 무책임이 아닙니다. 내 책임의 끝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잠잠함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성전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을 하고, 그다음에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은 결과 또한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것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모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억지로 작게 만들어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보이기 시작하면 내가 자연스럽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우리 눈에 다시 크게 보이고, 그 영광 앞에서 내 문제도, 내 계획도 제자리로 돌아가며, 우리 모두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며 온유함과 겸손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