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예배에 나오신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의 자리에 있습니다. 찬양과 기도의 순서를 지나 이제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그런데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어도 우리의 마음이 늘 이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몸은 예배당에 있지만 생각은 여전히 지난 한 주에 머물러 있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이 내게 들릴지, 예배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더 생각하기도 합니다. 설교자인 저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예배의 본질보다 순서나 진행 같은 부수적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배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 곳까지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는 우리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오히려 예배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이 예배를 내가 어떻게 드려야 할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4장에도, 우리와 똑같이 예배의 자리에 섰던 한 사람, 가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물도 바쳤고, 정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를 거절하셨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저절로 예배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환문장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저는 오늘 가인의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예배를 진단해 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왜 안받으셨는지, 하나님은 가인에게 무엇을 원하셨는지, 가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예배의 통찰을 무엇인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이야기로 들어가 그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먼저, 하나님은 예배자로 나온 가인의 제물을 왜 거절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중요한 순서를 말해줍니다. 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과 그의 제물’, 이 단어의 순서를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이 가장 앞에 나오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의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인’이라는 것입니다. 제물은 제물을 드리는 자를 반영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예배의 형식과 주일성수와 헌금과 찬양과 교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예배를 드리는 우리 마음의 동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물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양이든, 곡식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배자의 마음, 그 마음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일관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 6장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숫양의 기름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예배를 기뻐하시지만, 그 예배를 드리는 마음의 동기와 삶의 열매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신학적 함의가 담겨 있을까요? 주일 예배가 주중의 삶을 대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중의 삶이 주일예배를 더욱 진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중에 내가 그분의 말씀과 은혜를 멀리한다면, 주일예배를 지키는 마음의 동기가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물을 드리는 가인의 동기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가인의 분노에서 그의 동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시자, 가인은 몹시 분했습니다. 성경은 안색이 변할정도로 화가났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제물에는 문제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열렬히 분노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동기로 제물을 드렸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분노가 그의 동기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우리의 예배의동기를 증명합니다.
동기가 진실한 사람은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상대가 거절할 경우, 선물이나 선물을 주는 자신의 태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돌아봅니다. 그러나, 동기가 맑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이런 선물을 거절할 수 있느냐고, 분개하며 역정을 냅니다.
확실한 것은 가인은 자신이 제물을 드리면, 하나님은 당연히 받으셔야 한다는 전제가 그의 마음가운데 깔려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서러움이 깊어지면 자기 수고에 대한 의가 더 강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분노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주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권사님은 아침 일찍부터 나오셔서 쌀을 씻고, 뜨거운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국을 끓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성도들이 식당으로 몰려옵니다. 밥을 퍼주고, 설거지를 하고, 잔반을 처리하느라 허리 한 번 펼 새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식당 밖 로비에서 "하하 호호" 웃으며 커피 마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늦게 와서 밥만 먹고 가는 성도들의 웃음소리입니다. 그 순간, 땀 흘리던 권사님의 마음에 묘한 '서러움'이 밀려옵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감정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 해결되지 않고 깊어지면, 무서운 '자기 의'로 변질됩니다.
어느새 나의 봉사는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내밀 '청구서'가 됩니다. 다른 성도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정죄로 바뀝니다. 가인이 아벨을 보며 느꼈던 그 미움이, 국자를 들고 있는 우리의 손끝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마음 안들었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이, 목사님. 저는 그렇게 유치하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한테 인정받으려고 봉사하는 거 아닙니다. 아무도 안 알아줘도 상관없어요. 저는 하나님만 보고 합니다. 하지만 그 ‘성숙해 보이는 마음’ 뒤에 숨어 있는, 어쩌면 더 무서운 가인의 모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은밀한 우월감입니다.
이런 분들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아주 잘 섬깁니다.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지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온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속으로는 벌써 그들의 믿음을 판단합니다. 이때 우리가 챙기고 있는 보상은 ‘사람들의 칭찬’이라는 얄팍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저들보다 낫다’는 자기 만족감, ‘나는 하나님을 더 잘 안다’는 영적 자부심을 보상으로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이 빠졌던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가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거절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동생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을 제물로 드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제물에는 자신의 온갖 수고와 땀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자신이 그토록 정성스럽게 준비한 예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면, 하나님께서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살피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손에 든 제물보다, 그 제물을 든 마음을 먼저 보십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평가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향한 그 순전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인간의 제 일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이 예배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종종 아내에게 꽃을 선물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자주 꽃을 선물하는 것 같지만,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내가 꽃다발은 아니어도, 꽃한송이를 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 17주년을 맞이해서 아내에게 꽃다발을 선물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내가 꽃을 받으며 묻습니다. “여보, 웬 꽃이에요?”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 결혼기념일이잖아. 안 사 오면 당신이 화낼 것 같아서, 의무감으로 사 왔어.” 여러분, 그러면 아내가 기쁠까요? 꽃은 받았지만, 영광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아내는 모욕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요? “당신을 생각하며 꽃을 고르는 그 시간이 나에게 너무나 큰 행복이었어. 당신은 나에게 그런 존재야.” 그 순간 아내는 진정한 영광을 받습니다.
남편이 자신을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내에게는 최고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와 두려움, 의무감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그분 자체를 기뻐할 때, 하나님은 최고의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통해서 그 분을 기뻐합니다. 그 기쁨이 찬양으로 흥얼거립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당신은 나의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 고백이 터져 나올 때, 우리의 기쁨이 완성되고 하나님은 영광 받으십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배자로 나온 가인에게 무엇을 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예배는 거절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 거절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불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사귐의 하나님, 관계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신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거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너 꼴도 보기 싫으니 손절하자'는 이런 뜻일까요? 아닙니다. 이 거절은 손절을 위한 거절이 아니라, 바른 사귐의 교제로 나아가고 싶다는 메세지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형식적인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하나님은 제물을 거절하신 뒤에 가인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말을 거십니다. 하나님의 말의 진정성은 그 분의 행동과 처신에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제물은 거절하셨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가인과 대화(사귐)를 시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절은 무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절은 싫어서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해서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이 거절은 단절이 아닙니다, 이 거절은 하나님과 더 긴밀한 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속해서 흥분한 상태로 있는 가인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가인의 분노를 걱정하십니다.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을 살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절에서도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의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 마음의 공백을 죄가 차지하려 한다는 것입니다.보십시오. 하나님은 가인의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가인에게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십니다. 이러한 진단은 저주하기 위한 진단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관계가 회복이 가능하다는 하나님의 초대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말씀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거부합니다. 성경은 가인이 회개했다는 말도, 질문했다는 말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말씀 앞에서 침묵합니다. 그리고 그 침묵이 8절의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기도 전에 하나님은 아벨에게 다시 질문하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정보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벨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까? 아닙니다. 가인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 앞에 해석하도록 요청하는 질문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고, 죄의 값을 받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벨을 죽였을지라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후에도 하나님은 가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질문 앞에서 화를 냅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의 질문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 5절부터, 15절까지 반복해서 읽다보면, 성경은 가인의 제사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반응하지 않는 가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5절 단 한구절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6절부터 15절까지 본문의 대부분은 무엇을 집중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에, 가인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주목합니다. 여기에 창세기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인의 비극은 하나님이 제물을 거절하신 것이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른 사귐으로의 초대에 계속해서 거부하고 반응하지 않는 가인의 완악함이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말씀하셨던 것 처럼 지금 가인에게 또다른 방식으로, 가인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반응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배자에게 원하시는 두 번째 메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중요하게 보신 것은 예배를 드리는 마음의 중심도 보시지만, 예배 이후에 그 사람이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가장 큰 위기를 목격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예배에 나오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위기가 아닙니다. 헌금을 드리지 않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고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슴에 찔려도, 가만히 예배당 밖으로 나가서 못들은 척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깨닫게 하셨는데, 그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을 내가 연약하다는 핑계와 합리화로 숨어버리는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가인은 말씀을 ‘들은 사람’으로 남았을 뿐, 말씀에 ‘반응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반응하는 예배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예배에 실패한 가인은 어떻게 변해갔을까요? 가인의 문제는 “예배를 한 번 망쳤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배에 실패한 가인은 마음이 강팍해지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사람은 갑자기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던 마음의 통로가 조용히 닫힙니다. 하나님께 묻던 질문이 멈춥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해석하던 자리가 사라집니다.회개와 기도와 간구가 오가던 방향이 끊깁니다. 가인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을 정당화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지켜낼 이유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의 시선은 반드시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확인받습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로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가 무너지면, 이 정체성의 흐려집니다.
그러면 마음은 다른 것을 향해 갑니다. 타인과 자신에게서 정체성을 찾습니다.
가인은 바로 옆에 있던 아벨을 주목합니다. 가인은 아벨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비교는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닙니다. 비교는 나의 정체성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 꺼내는 생존 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실패하면, 사람을 “미워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사람을 보게 되는 겁니다.
가인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붙들지 않습니다. 대신 마음속에서 아주 미묘하고 낯선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대놓고 "내가 쟤보다 낫지?”라고 묻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 사람을 깎아내려야지"라고 의도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아벨이 있는 그 공간이 숨 막히게 답답해질 뿐입니다. 아벨의 환한 표정을 보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은 무거워집니다. 아벨의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설명할 수 없는 피로감이 몰려옵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딱히 짚어낼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냥 그 자리를 피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의 기쁨이 나의 우울을 건드리고, 내 영혼이 채워지지 않으니, 타인의 충만함이 도리어 가시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모른 채, 마음은 저절로 냉랭해집니다. 이렇게라도 마음의 문을 닫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겨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든 이상 아벨은 더 이상 사랑하는 동생이 아닙니다.
아벨은 나의 결핍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침에 거울을 봤는데 얼굴에 뭐가 묻어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거울을 닦는 게 아니라 내 얼굴을 씻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무너진 사람은 반대로 갑니다. 내가 바뀌는 건 너무 아프고, 너무 어렵습니다. 회개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속삭입니다. “거울만 없애면 된다.” “저 사람만 치우면 편해진다.”
아벨이 가인에게 바로 그 거울이었습니다. 아벨이 옳아서가 아닙니다. 아벨이 완벽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아벨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가인의 마음속에서 이런 소리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형, 형은 지금 괜찮지 않아.” “형, 형은 뭔가 잘못됐어.”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벨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배가 무너진 가인에게 “옆에 있는 빛”은 자기 안의 어둠을 너무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가인은 얼굴을 씻지 않고 거울을 깨버립니다. 그게 살인입니다. 이건 “가인만의 비극”이 아닙니다. 예배가 무너질 때 나타나는 우리의 증상입니다. 직장에서 나보다 늦게 들어온 후배가 성실하게 일해서 칭찬받습니다. 그 후배가 나를 비난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불편합니까? 그 성실함이 내 게으름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취업 준비하는 청년이 친구의 합격 소식을 봅니다. 친구가 나를 조롱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마음이 무너집니까? 그 합격이 내 불안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똑같습니다. 누군가의 헌신이, 누군가의 평안이, 누군가의 기쁨이 나를 정죄하려고 존재합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그들을 멀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충만함이 내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때 우리의 문제는 “저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가 무너져 하나님 앞이 사라진 내 마음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무너지면 관계가 먼저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은혜에 용납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반드시 사람을 보며 자신을 증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인의 이야기를 통해 예배의 본질 세 가지를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은 손에 들린 화려한 제물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든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 하나님은 예배의 완벽한 형식이 아니라, 말씀 앞에 반응하는 '태도'를 보신다는 것, 우리가 가인과 같이 예배에 실패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는 것, 우리는 이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사실 앞에서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해져야 합니다. 이 기준대로라면, 과연 우리 중에 "나는 합격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늘 중심보다 겉모습에 신경 쓰고, 말씀보다 내 상황을 앞세우며,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려 애쓰는 '가인의 후예’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실패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더 완벽한 제물일까요? 더 철저한 의무감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변적이고, 자신을 의식하며,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는 우리의 죄성을 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자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반응이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감정을 중시하며,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제물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 완전한 예배자가 되어 주실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최고의 예배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인처럼 비교하지 않으셨고, 자기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으셨으며, 자기 의를 세우려 사람을 밀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셨고, 말씀 앞에서 도망치지 않으셨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리셨습니다.
우리가 드리지 못한 예배를 그분이 대신 드리셨고, 우리가 반응하지 못한 말씀에 그분이 완전히 순종하셨고, 우리가 재판장이 되려 했던 그 자리에서 그분은 기꺼이 죽는 자가 되셨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 동생의 피를 흘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기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지키는 자다"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내 죄와벌이 너무 무겁다"고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무거운 우리의 죄와벌을 어깨에 지시고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얻기 위해, 당신의 아들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꽃을 십자가 위에서 꺾으셨습니다. 그 꽃이 으깨어지고 찢겨지며 흘러나온 붉은 향기가 우리의 악취 나는 죄를 덮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를 완전히 드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예배도 받아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드려야 할 최고의 예배는, 나의 의로움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 기꺼이 꺾이신 그 사랑 앞에, 나의 실패를 인정하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잘 준비된 사람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는 설 수 없음을 아는 상한 심령입니다. “주님, 저는 제 힘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는 가인처럼 비교하며 흔들리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습니다.” 이 정직한 항복이 있는 곳에 성령께서 임하시고, 실패한 예배자는 다시 은혜로 예배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말씀을 품고 세상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나의 '약함'을 재료 삼아 예배하십시오. 우리는 한 주간 살면서 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가인처럼 분노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숨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실패를 들고 주님께 나오십시오. "주님, 제가 또 넘어졌기에 주님이 더욱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은 그 상한 마음을 그 어떤 화려한 제물보다 기쁘게 받으십니다. 오늘 이 시간, 의무감이 아닌 감격으로 나아갑시다. 내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를 위해 꺾이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