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우리는 식당을 고를 때, 생각보다 많은 것을 '사람 수’로 판단합니다. 한쪽은 사람으로 가득하고, 한쪽은 텅 비어 있습니다. 특별한 정보가 없다면, 대부분 사람이 많은 쪽으로 갈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데는 이유가 있겠지.”, “여기가 맛집인가 보다.” 생각합니다. 아직 먹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속에서는 어느 정도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내 판단을 안심시켜 주는 신호가 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물건을 살 때도 비슷합니다. 상품 설명을 꼼꼼하게 읽기 전에 별점을 보고, 리뷰가 몇 개인지 보고, 몇 명이 구매했는지를 봅니다. 별점이 4.9입니다. 리뷰가 만 개가 넘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입니다. 반대로 상품은 괜찮아 보이는데, 리뷰가 세 개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불안해집니다.
“이거 사도 괜찮을까?”, “사람들이 안 사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생각합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순간에 무엇이 정말 옳은가보다 나를 안심시켜 줄 기준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물론 이런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참고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습관은 식당이나 물건을 고를 때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선택만 안심시키고 싶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기 자신도 안심시키고 싶어 합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도, 우리는 나를 안심시켜 줄 기준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때, 가장 손쉬운 기준 가운데 하나가 ‘다른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발견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굳이 입 밖으로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보며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마음 한편에서는 이미 “적어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야”라는 비교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타인의 허물은 내 삶을 정직하게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어느새 나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을 나에게 유리한 기준으로 바라보던 이 마음은 신앙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까지 나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듣고 싶어 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약속을 만나고,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만나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시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밑줄을 긋고, 기억해 두었다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다시 찾아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어떻습니까? 갑자기 마음이 조금 무거워집니다. 앞의 말씀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구나.”하고 받아들이는데, 뒤의 말씀 앞에서는 생각이 많아집니다.
“이 말씀은 당시 상황을 좀 봐야 하지 않을까?” “너무 직접적으로 적용하면 안 되지 않을까?” 참 이상합니다.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 앞에서는 해석이 단순한데,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 앞에서는, 갑자기 해석이 복잡해질 때가 있습니다. 위로하는 말씀은 좋습니다. 그러나 나를 판단하는 말씀은 부담스럽습니다.
나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은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가장 어려운 지점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쩌면 더 어려운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옳으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내가 좋은대로 하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더 어려워합니다. 내 생각을 바꾸는 순간, 내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었던 나 자신까지 다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새로운 진리가 아니라, 그 진리 앞에서 드러날 나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성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을 그대로 만나기보다 내가 감당하기 쉬운 하나님을 원합니다. 나를 위로하지만 너무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는 하나님, 나를 사랑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에는 너무 깊이 간섭하지 않는 하나님, 세상의 악은 엄격하게 판단하지만 내 안의 악에는 조금 사정을 봐주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라면 참 편할 것입니다.
전환문장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보는 하박국서는 바로 이런 우리의 하나님 이해를 흔드는 책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고 일하시기 시작하자, 하박국은 자신이 생각했던 하나님과 실제 하나님 사이에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틀리신 것이 아니라, 하박국이 하나님을 바라보던 관점이 기울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박국은 처음에 유다 사회의 폭력과 불의를 보며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 자기 백성 안에 있는 이 악을 그냥 두십니까?” 질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그냥 두지 않겠다. 바벨론을 일으켜 유다를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을 들은 하박국은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 아니라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유다가 악하다는 것은 하박국도 인정했습니다. 문제는 바벨론이 유다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폭력적인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 유다를 심판하시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보다 더 악한 바벨론을 사용해서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왜 심판하지 않으시는지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왜 이런 방식으로 심판하시는지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하박국은 유다가 잘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우리보다 더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박국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하나가 드러납니다. “그래도 우리는 저들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하는 마음입니다.
유다가 악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바벨론보다는 낫습니다. 기울어진 생각입니다. 유다가 죄를 지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박국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공의를 유다와 바벨론의 비교 속에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비교를 깨뜨리십니다. 유다의 죄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바벨론의 폭력과 탐욕과 깊이 있는 교만도 보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모두 다루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하박국이 새롭게 배우게 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예외가 없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바벨론이 더 악하다는 사실이 유다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어 주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더 큰 죄가 내 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하박국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바벨론과 비교해서 판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죄는 유다에게서 다루십니다. 바벨론의 죄는 바벨론에게서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과 공의로 각각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유다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바벨론이 강하다는 이유로 바벨론의 악을 옳은 것으로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박국이 이것을 받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기울어진 신앙적 관점이 새로워 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하박국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요? 오늘 본문 3장 2절에 보면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기서 ‘놀랐다’는 것은 단순히 깜짝 놀랐다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두려워했다, 떨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왜 떨었을까요? 앞으로 유다에게 닥칠 심판이 무서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하나님께서 훨씬 더 공의로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거룩이 바벨론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내 편이라고 기울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편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 때문에 자기 백성의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분은 아니셨음을 진지하게 마딱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도 성찰해 봐야 할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은혜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문제는 은혜를 너무 많이 믿어서가 아닙니다. 은혜를 우리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내 죄 정도는 조금 봐주시겠지.” 우리의 입으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마음은 종종 그렇게 움직입니다. “그래도 내가 교회 다니잖아.”, “그래도 예배드리잖아.”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잖아.”,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잖아.”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거룩 앞에 작은 예외 조항, 하나를 만들어 놓습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의 ‘그래도’ 를 깨뜨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바벨론보다는 낫지 않습니까?”이 마음을 발견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죄만 미워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 안에 있는 죄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은혜로 우리를 받아 주셨다는 것도, 우리가 원하는 것과 붙들고 있는 욕망까지 모두 옳다고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모른 척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죄에 대한 책임을 축소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죄 가운데 그대로 버려두지 않는 사랑을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쉽게 혼동합니다. 특히 일이 잘될 때 그렇습니다. 분명 마음 한편에서는 불편합니다. “이 관계에서는 내가 잘못하고 있는데.”, “이건 내려놓아야 하는데.” “말씀대로라면 내가 돌이켜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성령께서 말씀과 양심을 통해,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일이 잘 풀립니다.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기도한 문제가 해결됩니다. 생각지도 못한 좋은 기회가 생깁니다. 경제적으로 막혀 있던 일이 풀립니다. 누군가 뜻밖에 나를 도와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나 봐.” 맞습니다.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그 은혜로 때때로, 말씀이 주는 불편함을 묵살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여전히 불편한데 “그래도 일이 이렇게 잘 풀리는 것을 보면 괜찮겠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돌이키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은혜가 오히려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을 가로막게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 묘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책망을 피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을 뒤로 미룹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누리면서, 그 선하심이 나를 어디로 부르고 있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울어진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은혜는 우리를 죄 가운데 편안하게 머물게 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숨 쉬게 하시고, 기회를 주시고, 내 삶을 붙들어 주신다면 그것은 분명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 속에는 돌이켜 회개하라는 부르심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죄를 가리는 천이 아닙니다. 은혜는 죄인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손길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원합니다. 자비도 원합니다. 용서도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해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내 삶을 판단하시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만, 그 은혜가 하나님의 공의를 흐리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를 원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기억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거룩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서, 우리의 죄까지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된 길에 머물러 있을 때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방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위로로 찾아오지만, 때로는 책망으로 찾아옵니다. 때로는 문을 열어 주시지만, 때로는 내가 가려던 길을 멈추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것을 주셨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내 삶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취업을 하고 사업이 잘되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기도하던 문제가 풀리는 것도 분명 은혜입니다. 좋은 기회가 찾아오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좋은 결과 하나를 가지고,나를 기뻐하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영역에서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계시면서도, 다른 영역에서는 동시에 우리에게 돌이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찾아오고 공동체가 성장하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졌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옳은길로 걸어가고 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지금 일이 잘되고 있는가?”. “내 인생이 평안한가?만이 아니라 “나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르게 서 있는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붙들면서 하나님께서 내 죄를 미워하신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남의 잘못에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야기하면서 내 잘못 앞에서는 은혜만 찾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을 하나님의 승인으로 오해하면서, 정작 말씀을 통해 나를 돌이키라고 하시는 음성은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이렇게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하박국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하나님께서 훨씬 더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박국은 잠잠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하나님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자,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다같이 다시 2절을 읽겠습니다. “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겉으로 보면 하박국은 두 가지를 기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그런데 이 두 기도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다시 보기 시작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하나의 기도입니다.
먼저 하박국은 말합니다.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여기서 우리가 ‘부흥’이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흥이라고 하면 보통 교회에 사람이 많아지고, 예배가 뜨거워지고,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떠올립니다. 물론 그런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부흥하게 하옵소서’라는 말은 원래 ‘살리다, 다시 살아나게 하다’ 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무엇을 살려 달라는 것입니까? 바로 앞에 나오는 “주의 일” 입니다. “하나님, 주께서 말씀하신 그 일을 우리 시대 가운데 살아 움직이게 하십시오.” 하박국의 기도는 이런 뜻입니다. 유다의 죄를 다루시겠다고 하셨다면 그 일을 이루십시오.
바벨론의 교만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면 그것도 이루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을 나타내십시오. 이것이 하박국이 말하는 부흥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박국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 주의 일을 이루십시오. 죄를 다루셔야 한다면 다루십시오. 교만을 꺾으셔야 한다면 꺾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면서 동시에, 그러나 그 모든 일을 이루시는 동안에도 주의 긍휼을 잊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보게 된 것입니다.
결 론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을 대하는 바른 관점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아가면, 알아갈 수록, 하박국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부흥이 일어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의 심판중에도 긍휼을 바라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이음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맞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의 모습만 붙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도, 나를 책망하시는 하나님도, 나를 품으시는 하나님도, 내 죄를 죄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도, 동일한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회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기울어지지 않는 ‘균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울어지지 않는 신앙적인 시각은 오직 한 가지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발전 됩니다. 그것은 바로 ‘긍휼’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하박국처럼 ‘하나님의 긍휼를 구하는 마음’이 우리의 내면에 가득하게 됩니다. “주님, 진노중에라도, 긍휼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 마음이 가득해 집니다.
자기 죄만 보면 절망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의만 보면 교만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보는 사람은 절망하지도,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보면, 내가 내세울 것이 아예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할 만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용서해야 할 때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옳은 것을 알면서도, 내 욕망을 따라갔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생각을 더 신뢰했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면, 마지막에는 한 가지 기도가 남습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여러분!! 긍휼은 자기혐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원하는 마음은 자신을 정직하게 보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긍휼을 소망하는 마음은 공의 앞에서는 변명을 내려놓고, 그 분의 사랑 앞에서는 소망을 내려놓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하나님, 제가 틀렸다면 고쳐 주십시오. 제가 돌이켜야 한다면 돌이키게 하십시오. 붙들고 있는 것이 죄라면 내려놓게 하십시오. 내 뜻을 이루는 것보다 주의 일을 내 안에서 이루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 그 과정에서 저를 포기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는 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는 것이 올바른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은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 주셨던 한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설명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말하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달랐습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한마디만 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 섰지만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았고, 한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과 비교했기 때문에 자신의 의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세리는 하나님 앞에 섰기 때문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긍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기 시작하면, 이렇게 비교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본 사람의 입에서는 비교보다 긍휼이 나옵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 달라야 하는 지점입니다. 교회는 죄를 가볍게 여기는 공동체도 아니고, 죄인을 너무 쉽게 버리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죄에는 정직하지만 사람에게는 소망을 남겨 두는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이음교회에 정말 부흥이 일어난다면,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에는 더 정직해지고, 다른 사람에게는 더 긍휼해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잘못했을 때 변명보다 회개가 빨라지고, 상처받았을 때 정죄보다 기도가 먼저 나오고, 누군가 넘어졌을 때 “이제 끝났다.” 라고 말하기보다, “어떻게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받은 긍휼을 붙들고, 자신에게는 회개가 빠르며 타인에게는 긍휼이 깊은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