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은혜이음교회 주일설교

목자는 오늘도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지열은혜이음교회
오늘의 본문시편 23장 4절펼치기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개역개정

서 론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시편 23편을 한 절씩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오면서 한 가지 사실을 계속해서 발견하게 되는데, 양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양에게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목자가 푸른 풀밭으로, 쉴만한 물가로, 의의 길로 인도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삶의 여정을 인도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3절에서 ‘의의 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기대가 생깁니다. 그래도 조금은 평안하고, 큰 어려움은 비껴가고, 가능하면 내가 기대한 방향으로, 잘 풀리는 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인도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엄청난 성공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이 매일 극적으로 바뀌기를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조금 더 소박합니다. 그저 별일 없이 살고 싶은 것입니다.

몸 아프지 않고, 가족에게 큰일 생기지 않고,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고, 직장에서 머리 아픈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사람 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고, 갑자기 돈 들어갈 일 생기지 않고, 잠이라도 편하게 자고, 오늘 계획한 대로 하루가 무난하게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리는 ‘좋은 길’ 은 바로, 이런 길인지 모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길, 예상하지 못한 일이 끼어들지 않는 길, 마주하기 싫은 일을 마주하지 않는 길,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일이 별로 없는 길.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잘 인도하신다면, 삶을 크게 흔드는 일들은 조금은 비껴가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 23편은 바로 여기서 우리의 기대를 멈춰 세웁니다. 3절에서 목자가 ‘의의 길’로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그 인도하심은 4절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런데 4절에 들어서자, 길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이렇게 고백합니다. ‘의의 길' 다음에 ‘음침한 골짜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는데, 길이 어두워졌습니다. 목자를 잘못 따라간 것도 아닙니다. 양이 스스로 길을 이탈한 것도 아닙니다. 목자를 따라가고 있는데, 골짜기에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혼란스러운 순간도 바로 이런 때가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분명히 기도했습니다. 충분히 고민했습니다. 믿음으로 결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길이 막힙니다. 관계가 꼬입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문제보다 먼저 자신의 길을 의심합니다. “내가 잘못 선택했나?”,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했나?” “정말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 맞나?”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길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판정합니다. 길이 열리면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평안하면, 바르게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길이 어두워지면 반대로 생각합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은 우리의 그 판단 기준을 흔듭니다.

어두운 길이라고 해서 잘못된 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힘든 길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인도가 중단된 길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삶에도 골짜기는 있다고 말씀합니다.

당시 목자들은 양 떼를 이끌고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하면서 때로 깊고 좁은 골짜기를 지나야 했습니다. 골짜기는 양이 머물 곳이 아니라, 목자를 따라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목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이 지나온 인생의 골짜기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고백합니다. 그에게 골짜기는 단지 힘들었던 시간이 아니라, 목자가 어떤 분인지를 더 깊이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전환문장

그렇다면 다윗은 그 골짜기를 지나면서 무엇을 배웠을까요? 그리고 다윗이 골짜기에서 배운 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을까요? 이제 다윗의 고백을 따라, 오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본 론

첫 번째로, 다윗은 골짜기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다윗은 골짜기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골짜기가 생겼는지, 왜 자신이 이 길을 지나야 하는지, 언제 이 골짜기가 끝날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다윗은 골짜기 한가운데에서 한 가지 사실을 붙듭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골짜기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멀어진 것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골짜기는 하나님이 사라지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더 선명해지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다윗의 언어에서도 드러납니다. 1절부터 3절까지 다윗은 하나님을 계속 3인칭으로 말했습니다. “그가 나를 누이시며.”, “그가 나를 인도하시며.” “그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런데 4절에 들어오자 ‘말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가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던 다윗이, 이제 하나님께 직접 말하기 시작합니다. 3인칭에서 2인칭으로 바뀝니다. ’그가’에서 ‘주께서’가 됩니다. 골짜기는 다윗을 하나님에 대한 관찰자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두고 말하던 다윗이,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교리적으로도 정확합니다. 그런데 골짜기에 들어가면, 머리로 알고 있던 진리가 입술의 부르짖음이 됩니다.

예를들어, 어떤 아이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우리 아빠는 이런 사람이야.” 아빠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잠깐 아빠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순간에도 아이가 아빠를 설명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다급하게 “아빠!”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순간에는 아빠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빠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골짜기에서 우리의 신앙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조금 막막한 상황에 들어가면 “주님, 지금 저와 함께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감정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입니다.

골짜기에서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의 온도가 달라집니다.  간절함이 달라집니다. 평소에도 하나님을 찾았지만, 골짜기에서는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는 마음으로 찾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수술실에 들어가면, “가족의 건강을 지켜 주십시오”라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 제발 함께해 주십시오.”절실하게 간구합니다.

같은 ‘주님’인데, 부르는 깊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하나님을 내 삶의 여러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로 둘 수 있습니다. 일도 중요하고, 가족도 중요하고, 관계도 중요하고, 하나님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골짜기에 들어가면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이 뒤로가게 됩니다. 골짜기는 우리의 굳은마음, 냉랭함을 깨뜨립니다. 골짜기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절실함이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평소에는 하나님을 그렇게 절실하게 찾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실제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를 살아갑니다. 내 앞에 놓인 문제도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눈에 보이는 것들은 ‘현실’이 되고, 하나님은 그 현실에 대해 신앙적으로 설명해 주는 분처럼 뒤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급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익숙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의 감각이 보이는 것에 훨씬 더 빠르게 반응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도 오래 누리다 보면 익숙해집니다.

그리고 익숙해지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마치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당연하게 여깁니다. 건강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평범한 일상도 그렇습니다. 은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은혜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만 흔들리기 시작하면, 우리의 감각이 다시 깨어납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걷다가 발목을 한번 삐끗하면, 걷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코가 막히면, 평소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숨 쉬는 일이 절실해지고, 잠을 며칠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 그저 편안하게 잠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됩니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소중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소중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골짜기에서 갑자기, 우리에게 더 필요한 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평소에도 똑같이 필요한 분이셨습니다. 다만 평안할 때에는, 그 사실을 잊고 살아 갔습니다.

그러나 골짜기에 들어가면,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흔들리면서 다시 원래 소중했던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골짜기에서 알게 된 첫 번째 은혜였습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인생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다윗은 골짜기를 지나면서, 하나님의 함께하심만 선명해진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는 잘 보지 못했던, 목자의 손길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는 빈손으로 양과 함께 걷지 않습니다.

목자의 손에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들려 있습니다. 다윗은 마치 목자가 양들을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는 것 처럼, 인생의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더욱 선명해졌다는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목자가 양을 보호하는 데에는, 두 가지 도구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지팡이이고, 다른 하나는 막대기입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같은 말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한 표현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용도의 도구입니다. 지팡이는 비교적 길어서 양을 가까이 붙들거나, 길을 벗어나는 양의 방향을 잡아 주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반면에, 막대기는 조금 더 짧고 단단한 도구였습니다. 막대기는 들짐승이 양 떼를 위협할 때, 목자가 양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였습니다.

이 두 도구는 목자의 보호가 두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팡이는 위험한 방향으로 가는 양을 붙들고, 막대기는 양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막아 줍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보호라고 하면, 바깥에서 오는 위험을 막아 주시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사고가 비껴가고, 위험한 사람을 만나지 않고, 문제가 생기지 않거나 잘 해결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생각하지 못하는 보호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키실 뿐 아니라, 때로는 위험한 방향으로 가는 나에게서 나를 지켜 주십니다. 다윗의 생애에도, 바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당시 다윗은 아직 왕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을 피해 광야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근처 지역에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양과 염소를 많이 가진 아주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지내면서, 나발의 목자들과 양 떼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곁에서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양털을 깎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양을 잡고, 음식을 풍성하게 먹는 잔치가 열렸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 나발에게 음식좀 나눠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합니다. 그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나발이 양 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나발의 대답이 뜻밖이었습니다.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이렇게 조롱섞인 말로 다윗을 깎아 내렸습니다. 그동안 받은 도움은 무시하고, 다윗을 공개적으로 모욕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다윗이 칼을 찾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이끌고, 나발의 집을 향해 출발합니다.

다윗은 단순히 항의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발의 집안 남자들을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복수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이 장면에서, 다윗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처음에는 당연히 나발처럼 보입니다. 나발이 모욕했고,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조금 다른 것이 보입니다. 그 순간, 다윗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나발만이 아니었습니다. 상처받은 다윗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모욕당한 자존심, 치밀어 오른 분노, 그리고 “내가 직접 갚아 주겠다.” 는 마음이 다윗을 아주 위험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다윗이 그 순간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발이 실제로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는 분노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위험했습니다.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잘못된 길로 갈 때보다, 자기에게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때, 더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먼저 잘못했잖아.”, “내가 이 정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이건 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자기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하기가 아주 쉬워집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다윗 앞을 가로막습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칼을 차고, 자기 집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녀는 급히 음식을 준비해서 다윗을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다윗 앞에 엎드려 간곡하게 말합니다. 당신의 분노 때문에 직접 피를 흘리고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훗날 하나님께서 당신을 왕으로 세우셨을 때, 오늘의 일이 마음의 짐이 되지 않도록 멈추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그녀의 말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비가일의 이야기를 듣고 정신을 차리며,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사무엘상 25장 32절입니다.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비가일이 자기 앞길을 막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자기를 막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계획을 방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더 위험한 길로 가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를 돌아보면, 이런 하나님의 보호를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이 위험한 방향으로 가는데,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양이 원하는 방향이라고 해서, 끝까지 가게 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지팡이를 대어, 방향을 바꿉니다. 당장은 그것이 방해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방해가 아닙니다.

양을 잃지 않기 위한 보호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말 때문에 멈출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한데, 말씀 앞에서 입을 닫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밀어붙이고 싶은 일이 있는데, 이상하게 길이 열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답답합니다. “왜 자꾸 막히지?”낙심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그때 하나님이 내 길을 방해하신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나를 지키고 계셨구나.”하고,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길을 열어 주시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내가 가려는 길을 막으시는 것도 ‘보호’입니다. 왜냐하면 목자되신 하나님은 양이 원하는 길을 끝까지 보장하는 분이 아니라, 양을 끝까지 잃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목자의 지팡이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세심하신 보호하심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의 보호에는 또 다른 방향이 있습니다. 지팡이가 양이 위험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붙드는 것이라면, 막대기는 ‘위험’이 양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추격합니다. 마온 광야에서 상황이 아주 긴박해 집니다. 사울과 그의 군대는 다윗을 포위해 들어왔습니다. 거의 붙잡힐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이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울에게 한 전령이 달려와,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략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때, 사울은 다윗을 추격하던 일을 멈추고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 돌아갔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멈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더 좋은 전략을 세워, 포위망을 뚫은 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손댈 수 없는 곳에서, 상황이 움직였습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해줍니다.

사무엘상 23장 14절입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성경은 이 일을 단순히 다윗이 운 좋게 위기를 벗어난 사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다고 해석합니다.

다윗의 눈에는 사울의 추격만 보였지만, 그가 볼 수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의 막대기가 보여 주는 또 하나의 보호입니다. 내가 위험을 막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보호를 잘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에는 수면위로 드러나, 우리가 경험해서 아는 보호도 있지만, 경험하지 않도록 지켜 주셔서 끝내 알지 못하는 보호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우리가 기억하는 보호하심보다, 기억하지 못하는 보호하심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발견한 은혜보다, 발견하지 못한 은혜가 더 많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큰 사고가 난 날은 오래 기억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 없이 운전해서 집에 돌아온 수많은 날은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그날은 선명하게 기억하지만, 별일 없이 학교에 갔다가 웃으며 집에 돌아온 수많은 날은 그냥 평범한 하루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생각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를 두고 “오늘도 얼마나 많은 은혜 속에서 살았는가”를 생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평범함 속에도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보호하심를 알아차릴 수는 없지만, 내가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나를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 론

그러고 보면. 골짜기는 다윗에게 단지 힘든 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얼마나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는지, 더 깊이 깨닫게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깨달음이 골짜기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골짜기를 지나며 다윗이 새롭게 보게 된 것은 사실 평범한 날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골짜기에서 갑자기 가까워지신 것이 아닙니다. 골짜기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다윗을 보호하기 시작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미 함께하고 계셨고, 그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의 삶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골짜기에서 얻은 이 깨달음은 평범한 하루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별일 없이 하루를 보내면, 그것을 그냥 ‘평범한 하루’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사고도 없었고, 큰 문제도 없었고, 특별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기억할 만한 하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윗의 고백을 따라 삶을 바라보면, 조금 다른 것이 보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은혜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보호보다, 내가 알지 못한 보호가 더 많을 수 있고, 내가 발견한 은혜보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은혜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만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하루를 더 이상, 당연한 하루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별일 없이 지나간 오늘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낼 수 없었던 하루였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중에,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계십니까? 오늘은 그저 평범한 하루가 아니라, 내가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루인 줄 믿습니다. 반대로 여러분중에 골짜기를 지나는 하루를 보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다윗의 고백을 기억하십시오. 목자가 인도하시는 골짜기는 지가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혼자 지나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은혜로 붙들고 계시며,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은혜가 있길 소망합니다. 그 분은 자신의 양을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양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과 29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여기에서 자신의 손과 아버지의 손을 연이어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안전이 죄와 사망 그 어떤 것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목자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길을 지나게 될지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의 손에 붙들려 있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범한 날에는 보이지 않는 은혜를 감사하고, 골짜기에서는 나를 놓지 않으시는 목자의 손을 신뢰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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